로마문명의 최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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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문명의 최대 유산
  • 유동기
  • 승인 2013.01.2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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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기 원장의 『마키아벨리 로마사이야기』②

 

로마문명이 후세에 남긴 최대의 유산은 호화로운 건축물이나 미술작품이 아니라 ‘특별한 시스템’이다.

로마 건국신화에서 군신 마르스와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 레실비아 사이에 태어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왕위를 빼앗은 숙부에 의해 테베레강에 버려진다. 그러나 그들을 넣은 바구니가 무화과 가지에 걸리고 암늑대가 구해서 이 두 갓난아기에게 젓을 주어 키운다.

그 뒤, 성장한 형제는 세력을 확장하고 전쟁에 승리해 도시를 건설한다. 둘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레무스를 죽인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건설한다.

기원전 1000년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 철기문명이 싹트고 철제무기로 무장한 에트루리아인은 이탈리아 최강의 세력이 된다. 기원전 6세기 말까지 에트루리아인의 왕정에 의해 통치되다 기원전 509년에 로마인에 의해 공화정으로 바뀐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은 450년 정도 이어진 뒤 군주정으로 이행된다.

공화정 시대에 로마가 겪은 변화들은 시대의 필연적인 흐름에 의한 것이다.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공화정으로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가 어려웠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창시된 ‘제정’이란 통치시스템이 탄생했고 200년 동안 산통을 겪었다.

시민이 왕정을 타도한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공화정 로마에서는 정권의 최고책임자인 집정관의 임기가 1년이고 반드시 두 사람이 취임해 서로 거부권을 갖는 등,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정권의 자문기관인 원로원과 로마시민이라는 양대 축으로 정치가 행해졌다. 제도상으로는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에서 다양한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세력은 귀족층으로 이루어진 원로원계급이었다.

원로원 계급과 시민의 대립이 역사적으로 진행되면서 시민들의 권리는 확대되어 갔다. 기원전 300년에 귀족뿐 아니라 유복한 시민들도 원로원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래서 로마의 공화정은 실질적으로 원로원 의원에 의한 과두정(소수지도제) 체제라 할 수 있다.

원로원의 자격은 30세 이상이었고 종신제였으며, 300명 정도였다.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이 되기 위해서는 재무관과 법무관이란 요직을 거쳐야 했다. 하위의 직무로 경험을 쌓고 유능하다는 것이 입증된 사람 가운데서 고위의 행정관이 선출되는 시스템은 우수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시스템은 장기간에 걸쳐 대단히 잘 운영되어 로마정계에는 우수한 인재가 계속하여 등장하였다. 그러나 문제점으로는 평민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적 과실을 얻기가 어려웠고 그 과실의 대부분은 일부 부유층으로 한정되었다.

로마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정복당한 국가의 주민에게도 로마시민권을 부여했다. 로마시민의 거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농업이 사회의 주춧돌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에 걸쳐서 로마의 영토가 확대되자 소규모 농업을 영위하는 평민들이 몰락하기 시작하는 한편 귀족계급은 정복으로 가져온 부를 이용하여 대규모 농장경영에 나서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농업국가인 로마의 근간을 뒤흔들게 된다.

유동기(유동기치과, 동작구치과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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