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72]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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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72]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전민용
  • 승인 2013.01.29 10:5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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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자음과모음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전자책6)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한국에서 미국에 입양된 카밀라 포트만은 사랑하는 양모를 갑자기 잃고 실의에 빠져 산다. 우연히 만난 쾌활하고 다재다능한 유이치와의 사랑이 그녀에게 구원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 잘 만나면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유이치와의 사랑을 통해 카밀라는 21년간 자신을 괴롭혀 온 고통과 절망을 치유 받고 자신의 소중함을 자각한다. 게다가 유이치는 카밀라의 재능을 간파하고 글을 쓸 것을 제안하고 함께 규칙을 정한다. 카밀라는 양부 에릭이 재혼하면서 보내 온 여섯 상자의 과거의 유물을 가지고 있었다. 카밀라는 매일 상자 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무작위로 꺼내 그 것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쓰기 시작한다.

처치 곤란했던 잡동사니들이 카밀라의 관심을 받자 소중한 보물들로 변한다. 우연과 규칙과 노력이 만나면 뭔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카밀라는 이 글들을 사물에 들러붙은 삶의 흔적을 찾아가는 형식의 자전소설로 출간하고 주목받는 작가로 인정받는다. 제목은 ‘너무나 사소한 기억들; 여섯 상자 분량의 입양된 삶’이다.

뉴욕의 한 유명 출판사는 책에 소개된 한 사진에 대한 논픽션을 써서 출판할 것을 카밀라에게 제안한다. 입양되기 전 한국에서 친모가 아기인 카밀라를 안고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카밀라는 사진과 관련돼 어떤 것도 쓸 수 없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세계가 우리 생각보다는 좀 더 괜찮은 곳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사진(1988년경)’이라는 제목만 붙여 책에 실었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동백꽃들은 카밀라(동백)라는 독특하면서 열등감까지 느끼게 한 이름이 아무렇게나 막 지은 이름이 아니라는 것과 친모의 태도를 통해서 자신이 하찮게 태어나고 버려진 아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근원적인 위안을 주었던 사진이다.

출산할 때 친모가 열일곱 살의 진남여고 학생이었다는 정보와 사진 한 장을 단서로 카밀라와 유이치는 한국 남쪽의 항구도시 진남에 가서 진남여고를 찾는다. 충효의 고장에서 순결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고 있는 진남여고의 교장 신혜숙은 카밀라에게 엄마에 관한 얘기를 밝히기를 매우 꺼린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카밀라는 조금씩 엄마의 흔적에 다가간다.

바람처럼 떠도는 소문인 풍문(風聞)을 작가는 ‘바람의 말’이라고 풀어쓴다. ‘바람의 말’은 천리를 달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휘감아 사건을 만들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예쁘고 생각이 깊고 작가가 꿈이었던 엄마 정지은은 17세에 미혼모가 되고 이듬해 자살한다. 풍문에는 엄마 지은이 국어 교사와 사랑에 빠졌거나 성폭행을 당했고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한다.

카밀라는 유이치가 프로포즈를 하기위해 함께 탄 유람선에서 갑자기 바다에 뛰어든다. 엄마가 뛰어들어 자살했던 그 바다이다. 카밀라가 자신의 한국 이름은 정희재이고 아빠는 정재성이며 엄마와 아빠는 남매간이었다는 이야기를 신혜숙으로부터 들은 날이다.

극적으로 구조되어 한국을 떠난 카밀라는 유이치와의 관계마저 서먹해진다. 자신은 유이치와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니 친밀감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희재를 바다에서 구했던 구조원 김지훈은 우연히 라디오에서 “그 때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오빠가 아이의 아빠라고 믿었지요. 하지만 저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전자책 161)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 내용을 희재에게 메일로 보낸다. 희재는 외면했던 엄마의 고통과 외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하기로 하고 중단된 논픽션프로젝트를 계속하기로 한다.

지훈이 들었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은 진남방송국이 ‘바람의 말 아카이브’와 함께 제작한 ‘우리들의 사랑이야기(줄여서 우리사이)’이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는 이야기 박물관으로 진남을 배경으로 전해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 전시하는 곳이다.

정지은의 아버지는 진남조선소의 노동자이자 노동운동의 지도자였다. 조선소 노동자들이 파업하던 생활관에서 끔찍한 화재가 발생해서 4명이 죽고 다수의 조합원이 연행된다.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아버지는 동료들의 죽음에 자책하며 스스로 떨어져 죽는다. 이때부터 지은은 말을 잃는다.

지은의 도서반선생인 최성식은 지은을 동정했고, 지은과 함께 서정주의 시를 읽다가 지은의 말문이 다시 트이는 것을 본다. 최선생은 지은을 여자로 사랑했지만 지은이 최선생을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은이 걸레라서 총각선생을 유혹했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남학생을 따라 양관에 올라가기도 한다는 소문이 퍼진다.

사실 지은의 말을 되찾아 준 것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이다. 이 시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 이야기 박물관 언덕에 있는 앨리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시이다. 진남여고 근처에 있는 이 집은 일제시대에 호주선교사가 지은 집이라 양관이라 불렸다. 1922년 한국에 온 목사 메클레인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1939년 막내딸 앨리스가 연못에 빠져죽자 언덕에 묻고 묘비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홀로 남은 앨리스의 영혼이 가족이 떠난 후에도 양관에 살고 있다는 풍문을 사실로 믿었다.

양관의 저주는 나중에 양관을 사서 들어온 진남조선공업 일가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1981년 이선호 회장이 갑자기 사망하고, 이듬해 며느리 홍신혜가 자살한다. 87년 경영권을 빼앗긴 이선호회장의 아들 이상수는 승용차를 몰고 바다로 돌진해서 사망한다. 사라졌던 이상수의 아들 이희재는 고향으로 돌아와 양관을 이야기 박물관으로 개조하고 이곳에서 지낸다.

‘바람의 말 아카이브’ 이야기 박물관에는 지은에 대한 온갖 풍문들의 전모가 기록과 영상으로 전시되어 있다. 지은의 친구 미옥은 지은에 대한 미움 때문에 지은과 최성식선생이 정사를 벌이는 것을 목격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최성식과 결혼해서 임신 5개월 이었던 신혜숙은 지은의 아이가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는 남편의 결백을 믿지 못하고 지은의 아이를 멀리 입양 보내기 위해 사실을 조작한다. 결국 지은의 오빠 재성은 동생을 범하고 동생을 도와주려는 교사 최성식을 칼로 찌른 패륜아로 낙인찍히고 실형을 선고받는다.

오빠의 딸을 낳은 것으로 된 지은은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딸 희재가 강제 입양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세상에 저항한다. 한 학생의 거짓말과 한 교사의 의도적인 사건 조작과 사건의 실체에 대한 다수의 무관심이 부른 참극이었다.

소설은 희재(카밀라)가 자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친부를 만나는 장면에서 끝난다. 친부가 누구인지는 앞의 글만 잘 읽어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희재의 친모와 친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는 일부러 생략했으니 직접 소설을 읽으며 재구성해 보시길 바란다. 지은의 오빠 재성의 이야기나 친부가 더 일찍 희재를 찾지 않았던 이유를 아는 사람은 댓글을 달아 알려주시기 바란다.

한 인간의 정체성 찾기와 성숙의 과정을 흥미 있게 잘 그린 책이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계속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나고 마지막까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져 죽은 지은의 아버지 이야기나 부산 신발공장의 부침과 관련된 통역자 서교수의 개인사는 개인의 삶이 사회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일깨워준다. 여러 장면에서 삶에 대한 통찰력과 다양한 생각꺼리를 던져주는 소설이다.

저자는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작가세계문학상 등을 수상한 40대 초반의 대표적인 중견작가이다. 전에 읽었던 ‘원더보이’도 좋은 작품이었다. 6개월 전쯤 전자책으로 처음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읽었는데 여전히 새롭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전자책은 아직은 종이책에 비해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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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인 2013-01-29 12:17:04
이런 이야기를 창작해내다니...머리속이 궁금해집니다. 부럽부럽!

류재인 2013-01-29 12:16:03
도대체 그 사람 머리속에는 뭐가 있는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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