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 시스템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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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시스템의 붕괴
  • 유동기
  • 승인 2013.01.2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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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기 원장의 『마키아벨리 로마사이야기』③

 

그렇다면 로마의 통치시스템이 변화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로마는 멀리 떨어진 동맹국의 주민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으므로 시민이 직접 참여해 결의를 행하는 민회의 시스템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해 시민들은 병역을 거부하거나 로마 이외의 다른 도시건설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대립의 결과 기원전 367년에 ‘리키니우스법’이 제정되어 모든 공직이 평민에게 개방되었고,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법’ 이후에는 평민회(시민집회)의 결의만으로도 법률 제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평민에 의해서 선출된 호민관 10인의 권한이 확대되고 호민관은 법률을 발의할 권리와 거부권(한표라도 성립했다)을 행사하였고, 행정관으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당한 시민들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대로 근무했다.

공화정 초기에 존재한 뛰어난 정치시스템 덕택에 로마에는 폭력적인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대규모의 영토 확장을 이루었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정면으로 충돌한 포에니 전쟁은 200여 년을 걸쳐서 지속되었다.(‘포에니’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일컫는 것으로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이 건설한 도시국가이다) 제 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241년)은 로마군이 종전에 경험하지 못한 해전으로 시칠리아섬, 사르데냐섬, 코르시카섬을 수중에 넣었다. 이것으로 로마가 제국으로 가는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차에서 승부가 나지 않아 기원전 218~201년에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행한다. 카르타고의 젊은 장수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북쪽에서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반도로 침입하여 트라시메누스호반 전투와(기원전 217년)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서 2배의 병력을 지닌 로마군을 괴멸시켜 로마 남부의 도시들이 카르타고로 넘어 갔다.

그러나 한니발은 병력의 열세와 물자부족으로 로마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장기전으로 가면서 결국 기원전 202년 자마전투에서 스피키오가 이끄는 로마군에 패하고 만다.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획득하면서 로마인은 새로운 이익의 존재를 깨닫고 새로운 영토획득에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시칠리아섬, 사르데냐섬, 에스파냐에서 보내오는 노예와 황금이 로마인의 야심을 일깨운 것이다.

기원전 148년에 로마는 일찍이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지배한 그리스 북부의 마케도니아 왕국을 속주로 편입한다. 동방지역의 영토 확장 뿐 아니라 에스파냐 정복, 발칸반도 서부의 일리리아, 남프랑스까지 속주화시킨다.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년)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무찌르고 북아프리카도 차지하게 된다. 로마는 영토를 계속 확대함으로써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수많은 동맹도시국가로부터 언제라도 병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통치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속주들은 속주총독이 임기 1년 기간 동안 부임하여 다스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가난한 시민들이 정치참여가 힘들어지고 장기화되는 전시체제하에서 원로원계급의 힘은 지나치게 강대해지면서 큰 문제점으로 대두된다.

유력한 장군이나 속주총독 등 개인적으로 막대한 부를 손에 넣는 사람들이 생겼고 특히, 타국의 침략에 성공한 장군들은 상상을 초월한 정도의 부를 획득한다. 어쨌든 이와 같은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계층은 엘리트 계층뿐 이었다. 로마의 중요한 공직은 대부분 원로원의원 중에서 선출되고 있었다.

한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는 것이 로마의 장점이었으나 장기화된 전쟁으로 인해 풍부한 경험을 가진 장군들에게 큰 권한을 계속 맡길 수밖에 없게 된다. 충성을 바치는 병사들이 많아지는 장군들은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

그 결과 공화정 시스템은 붕괴 위기에 직면하고 제정이라는 새로운 통치시스템이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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