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동북아 갈등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랄 것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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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동북아 갈등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랄 것이가?
  • 박한종 논설위원
  • 승인 2013.02.1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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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박한종 논설위원

 

인문주의적 바람의 어려움....

설 연휴의 끝이다. 새해를 맞는 인사를 하기엔 약간은 쑥스러운 감이 있는 늦은 설이지만 새해는 새해이니 바람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국내적으로 급박한 대선에 관심을 집중하고 나니, 오히려 중대한 문제는 국내의 그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이 아닌가싶다. 대를 이은 남북한 정권의 등장에 더해 중국과 일본 역시 2세 정치인들의 등장이 정치적 가십거리이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동북아 4개국에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갈등이 오히려 복잡하게, 그리고 첨예하게 대두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 일본과 중국의 센카쿠열도 분쟁, 거기에다가 북한의 미사일(인공위성)과 핵실험 등등.... 중일간의 갈등은 국지적 충돌의 가능성마저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고, 한일간의 독도 문제도 국제 사회에서의 외교적 충돌이 예견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 역시 북한의 기대처럼 미국과 국제 사회에 대한 자주권의 선포내지 힘 있는 파트너로서의 인정으로 가기보다는 단기적으로는 국제적 고립으로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과 중장기적으로는 동북아의 군사적 팽창을 초래하여 오히려 전쟁의 위협을 고조시킬 반대급부의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란 물음을 우리는 무엇을 할까란 문제로 시작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이에 대한 판단의 차원이 너무도 다르고도 또한 많기 때문에 오히려 혼란만 부추길 수 있다. 민족적 감수성, 이데올로기적 반감,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 등등이 그러하고, 또한 모든 분쟁이 그러하듯 어느 한쪽의 의지로 해결이 보장되는 것도 아닐 것이니 이 상황을 게임적 차원마저 고려해야 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바랄 수 있는가에서 출발 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이지 않을까 한다(눈치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질문은 이미 칸트가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에서 시도한 문제라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칸트의 문제의식이나 또는 그 방법에 대한 유비적인 접근을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마주 한 문제는 신자본주의에 덧칠해 진 생존과 소비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현세적 욕망의 문제이거나 종교화 된 민족적, 이데올로기적 미래에 약속된 보상에 기반을 둔 바람, 또는 독단적인 옳음의 확신에 입각한 의무와 같은 바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사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 속에서도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바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의 존립과 이익을 위해 맹목적으로 무한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곧 나의 이웃, 이웃 사회들이 나와 함께 그런 경쟁에 뛰어드는 것을 초래할 뿐이다. 이웃들 간의 갈등 속에서 우리의 손익을 계산하는 따위의 태도는 바로 나와 이웃의 갈등에서 자신의 이해를 계산하는데 바쁜 또 다른 이웃을 봄과 다르지 않다. 이 바람은 우리 삶의 가치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타자에 대한 연대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무반성적인 신념의 체계로 되어버린 이데올로기나 또는 신성화 되어버린 민족이란 담론이 만들어 내는 것이 현 동북아 상황은 주된 측면이다.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파국으로 치닫는 듯 하다 위험한 외줄타기는 그것이 비록 파국으로 결과지지 않더라 하더라도 갈등하는 두 사회(그 구성원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앞의 경우 바람이 현세의 욕망에 근거한다면, 이 바람은 현세에 도래하지 않을 미래의 욕망에 근거할 터인데, 그러나 이러한 욕망은 오히려 역사를 통해 형성된 다양한 삶의 조화를 파괴할 뿐이다.

우리가 이 두 바람의 기원을 벗어나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를 유혹하는 위험한 바람이 있을 수 있다. 비록 고된 사유를 통해 얻어진 판단에 기초한 바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독단적인 옳음, 그래서 그것만을 현 상황에서 우리의 의무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일 터이다. 그러나 우리의 바람이 인간의 한계와 가능성에 입각한 바람이라면 바로 그런 인간이 가지는 역사적 성격에서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역사를 갱신하는 그런 인간의 존재에 기반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그 갱신의 길은 다양할 수 있는 바, 동북아란 특수성에 즉 다양한 사회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사회의 조화를 추구한다면 우리의 바람은 이런 유혹에서 자유로와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런 바람을 인문주의적 바램이라 부르고도 싶다. 우리의 동북아의 역사는 아마도 민족적 전개에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더 해진 것이고, 현재는 민족(정권)적 이해 속에서 각 구성원이 능동적이건 수동적이건 욕망(대개는 신자본주의적인)의 팽창을 스스로의 삶의 규정으로 삼고 있다. 인문주의적 바람은 이 상황에서 그 바람의 실현(을 통한 보상) 여부이전에 그 바람이 과연 우리의 삶의 가치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란 차원에서 현실과 역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북아 지식인, 또는 시민 사회 단체들이 동북아 평화를 위한 연대적 활동 같은 것이다. 비록 그런 연대 활동 자체가 어떤 결과물을 내기 힘겨울 지도 모른다. 또한 그런 결과물이 나온다 하더라도 오히려 소속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모욕과 비난을 받을 지도,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어떠한 현실적 미래적 성과를 내기엔 너무도 미미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 동북아 갈등 속에서 가장 고통 받을 집단이 바로 동북아 전체의 힘없는 민초들이라 할 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라야 할 것이며, 또는 한 그것은 인문주의적 바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거창한(?) 바람은 역시 사소한 작은 바람과 함께 가길 거부하지는 않을 터이니,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박한종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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