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ntal Antonia's Line] 베트남에 빛난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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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tal Antonia's Line] 베트남에 빛난 별들
  • 신순희
  • 승인 2005.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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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닌 것의 힘

지난달 12일부터 19일까지 있었던 베트남평화의료연대의 제6기 진료단에는 모두 11명의 덴탈 안토니아가 참여했다. 나를 포함해 8명의 여성치과의사와 3명의 치과위생사가 그들이다.

"내가 속해 있는 나라의 남자들이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이곳까지 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농토를 파괴하고, 우리는 또 그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이렇게 베트남을 떠돈다.

아내를 잃은 남편을 만나고, 자식을 잃은 부모의 피눈물을 바라보고, 이웃의 참혹한 주검을 수습한 사람들의 기억을 끄집어내며 나는 내내 어떤 무력감에 시달렸다. 마을에서 돌아와 숙소에 누우면 몸은 땅 속으로 깊이 꺼져들어갔고, 그날 들은 이야기들이 가슴을 짓눌렀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가.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데. 몸 속의 총탄을 제거할 수도 없고, 고엽제로 온 몸이 가려운 이 사람을 위해 약을 가져올 수도 없고, 게다가, 게다가 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도 없는데...... 이런 일들이 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혹 간신히 잊고 살아가는 지난 날의 상처만 덧내는 게 아닐까.(김현아,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2002)"

나는 끊임없이 고민했고, 여전히 그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진료시작 전날 진행된 특강에서 반레 시인은 우리에게 말했다.

"처음 건치 사람들이 양민학살을 사죄하기 위해 베트남에 진료장비를 들고 왔을 때 나는 당황하고 의아했다. 한국군대(아니 박정희 군대)는 미국의 용병이었을 뿐이며, 더구나 건치사람들은 학살의 당사자도 아니고, 직접적인 권한이나 책임도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 작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큰 십자가의 멍에를 스스로 지려고 하는지 처음에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내가 '왜' 이곳에 왔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명확히 정리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고 절규하는 학살의 피해자들에게, 혹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우리의 진료는 어떤 의미인가. 나에게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여전히 어려운 화두이다.

반레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학살의 직접 책임자들이 아니다. 주월한국군사령관도 아니었고, 소탕작전의 소대장도 아니었고, 명령에 복종하는 일개 부대원도 아니었다. 명령권자도, 군인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정치인도 아니었고 당시의 책임있는 지식인도 아니었던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그냥 사람들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나는, 구찌터널에서 아무것도 아닌 작은 호미와 소쿠리를 보았다. 그것은 시청각 자료실 한켠 바닥에 그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 호미와 소쿠리를 가지고, 총 연장 250km에 달하는 구찌터널을 팠고, 그리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이겼다.

미국이 물질만능주의의 군사력으로 싸웠다면, 베트남 사람들은 전혀 다른 가치관으로 맞서 싸웠음을 구찌터널에서 보았다. 베트남인들이 미국의 탱크에 맞서, 소련제 탱크를 수입해 싸웠더라면 아마 이기지 못했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세계 최강을 물리칠 때, 그것은 더이상 아무 것도 아니지 않다. 그것을 규정할 권력은 외부에 있지 않다. 스스로에게 있을뿐. 베트남 인민들은 그것을 전쟁에서 보여줬고, 어떠한 직책도 없는 10명의 여성들은 그것을 생활에서 보여주었다.

베트남에 빛난 별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이 부시도록...

장면 #1.

정효경 선생이 호텔 구석에서 구토를 하고 있다. 빡빡한 일정에 아침을 거르고, 흡족한 진료를 할 수 없음에 속이 상해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가슴이 아파 흐르는 눈물과 한숨을 줄담배에 날려 보낸 후, 쇠약해진 심신을 이끌고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내 식은땀을 흘리더니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기어이 구토를 시작했다.

진료단에서 수도 꼭지라는 별명으로 불린 정효경 선생은 건치부경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1기 베트남 진료단부터 참여해 올해가 세번째 참가다. 두아이의 엄마로, 아내로, 원장으로 8박 9일의 시간이 쉽지 않을 듯하나, 여전히 '내가 왜 베트남에 오는가'에 대한 고민이 끝나지 않아 그는 또 베트남으로 향했다.

체력저하는 약으로 버티고, 베트남 인민들에게 맘껏 진료하지 못하는 아픔은 눈물로 삼키며, 그렇게 선생은 진료단과 함께 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후배들에게 힘이 되는 선생은, 젊은 후배 진료단원 한사람 한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어루만지며 모든 진료단을 한껏 품안에 안아주는 어머니같은 넉넉함으로 빛났다.

장면 #2.

진료 마지막 날의 만찬회장에서 한 여성이 소복을 입고 북춤을 추고 있다. 죽은 자를 위해 산자가 입는 옷, 하얀 소복은 북과 함께 무대에서 빙글빙글 돈다. 억울한 죽음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넋을 위해 더덩실 추는 춤은 진혼이다.

노은희, 그는 베트남평화의료연대 6기 진료단원이자 나와우리의 공동대표다. 그리고 1999년부터 민간인 학살지역의 답사를 진행했던 김현아, 김현숙, 노은희, 짱, 구수정 이 다섯 여성 중의 한명이기도 하다. 그들의 답사와 조사 기록은 역사가 되었고, 그 역사를 쫓아 수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을 알게 되었으며 그 안에 베트남평화의료연대가 있다.

진료기간 내내 소독실의 뜨거운 불 앞에서 기구를 닦고 소독하고, 여기저기 모자란 것들을 챙기고, 사람들은 안내하느라 분주했던 노은희 선생은 3개월간 연습했다는 북춤을 추면서 웃었다. 죽은자를 위한 진혼에 눈물은 오히려 가볍다. 그의 북춤을 보면서 우리들은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고 함께 어우러졌다.

장면 #3.

한정된 시간에 한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을 진료하고 싶어 진료실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그래서 늘 아쉬움이 남는 곳, 진료기간 내내 악명높았던 그 보존과 진료실에서 한 선생이 소아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아이는 울고, 진료시간 종료가 다가온다. 마침내 진료가 끝나고 신운 선생의 입술은 마비되었다.

제6기 진료단 중 유일하게 부부동반으로 참가한 신운선생은 진료기간 내내 보존과에서 진료를 했다. 진료단 어느 곳, 어느 누구도 편하지는 않았으나 보존과 진료의 특성상 1회진료로 모든걸 마무리하는 일은 술자에게 늘 힘든 선택을 강요한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는 것. 평가와 개선은 나중의 문제이고 우선은 진료를 해 나가야한다. 그렇게 신운 선생은 진료를 했다.

무한히 잔인할 수도 있지만, 진심이 통하면 못할 것도 없는게 또 '사람'이라는 존재가 아닌가 라는 그의 말 속에 힘이 느껴진다. 조용하면서 부드러운 사람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일까.

장면 #4.

모든 환자가 스케일링 진료를 원했던 곳, 장비도 인원도 부족한 속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진료해야 했던 치주과 진료실. 그곳에서 함께 진료하는 따이손현 의료센타의 간호사들에게 "좋아"를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 가장 바쁘면서 늘상 웃음이 흐르던 치주과에는 양손의 엄지를 추켜세우며 "좋아"를 외치던 환자들, 간호사들 그리고 김종애 선생이 있었다.

그의 주위엔 늘 웃음꽃이 피어난다. 모두들 빡빡한 일정에 지쳐가는 속에 항상 환하게 웃고 있는 그가 있다. 누가 빠뜨리지 않아도 수영장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만찬회장에는 파티복을 입고 나타나고, 족구시합에서는 가장 강력한 서브를 날리던 여성선수, 베트남에 대해 잘 모르고 진료단에 참가했지만 베트남에서 많은 것을 얻고 간다고 말하던 김종애 선생의 밝고 힘찬 기운은 진료단의 진정한 아름다움이자 저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장면 #5.

진료단이 앞을 보고 있으면 혼자서 뒤를 보고 있던 사람, 진료단의 일거수 일투족을 카메라에 촬영하고 기록하던 사람, 진료단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던 시간에 촬영한 영상을 밤새 편집해 만찬회장에서 상영하던 사람, 피곤에 지쳐 낮이면 버스에서 곯아 떨어지던 사람, 그 사람은 안세치과의 박두남 선생이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의 제6기 진료단 기록담당 박두남 선생은 그렇게 8박 9일을 보내고, 곧바로 이어진 나와우리의 답사를 따라갔다.

제5기 진료단에 처음 참가했다가 깊은 인상을 받고 집행진에 합류해, 작년 9월의 사전답사에도 참여하고 이번에 6기의 기록을 담당하게 된 박두남 선생은 포항공대를 졸업하고 다시 치대를 다녀 치과의사가 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선에 잡힌 베트남과 진료단은 어떤 모습일까?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으로서의 자세를 물었더니 사마천처럼 고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고 대답하는 그의 카메라에는 권력의 시선을 경계하는 믿음직함과 재치가 느껴진다.

장면 #6.

인형도 안 좋아하고, 쵸콜렛도 안 좋아하는 6살짜리 딸에게 무엇을 사다주면 좋아할까를 고민하던 엄마. 8박 9일간 보이지 않았던 엄마를 6살 딸아이는 이해할까?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서 미워지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두고 온 아이들을 그리며 공항 면세점에서 우리는 함께 향수를 샀던가.

강문선 선생은 이번 진료단에 참가한 치과위생사 선생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기혼이며 아이를 둔 여성이다. 건치 전북지부 차윤상 선생의 부인이자 치과위생사로 현직에 근무중이며 현재 대학생이기도 하다. 또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주부다. 그런 그에게 8박 9일은 얼마만큼의 시간일까.

인천공항에서 전주까지의 시간들을 또 기다려야 남편과 딸아이를 만날 수 있는 그 공간적 거리와, 일상에서 단 10분도 자신만을 위해 쓰기 어려웠을 그 시간적 제한을 뚫고, 직장여성이자 가정주부이자 대학생인 그는 제6기 진료단에 참가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누구보다도 따뜻하게 진료를 했다. 베트남 분들에게 더해 주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한국의 환자 한분 한분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정말 따뜻함이 전염되는 사람이다.

장면 #7.

출발하는 공항에서부터 진료장비 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진료 개시후에도 모자란 장비, 고장난 장비 점검하랴, 이런 저런 요구사항들 체크하랴 도무지 한 순간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더니, 급기야 밤에는 집행부 회의로 날밤을 세우고, 그날 그날의 자료정리하느라 또 남은 밤을 세우던 사람.

그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술자리에도, 동생같은 베트남 학생들과의 시간에도 한번 맘 놓고 편히 함께하지 못했던 사람. 처음 1기 진료단 때는 해외에 한번 나가보고 싶은 어린 호기심에 따라갔는데, 베트남에 다녀오고 나니 건치일 하기가 오히려 쉬워졌다는 그 사람은 건치 서경지부의 사무국장 이선영 선생이다.

옛 말에 힘 좋은 놈 일복만 터지고 재주 많은 여자 박복하다고 했던가. 아마 그말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더더욱 많은 일이 주어지는 세상사의 속성을 지적한 말이 아닐까 싶다.

베트남 학생 신애가 부른 '휘파람'과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는 작년에 이선영 선생이 목이 쉬어가면서 가르쳤던 노래다. 올해는 신애에게 노래하나 가르치지 못했다. "이선영이 힘든가보다, 술도 안 먹으러 온다"는 주위 선생들의 말을 가슴 아프게 들으며 그는 또 호텔방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의 진료가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수많은 준비와 노력들이 있었다. 같은방 룸메이트로 그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후배, 이선영 선생의 쓸쓸함을 보았다. 늘 웃고, 늘 기운찬 후배의 활동들 속에는 그가 감내해야할 개인적인 아쉬움들이 그렇게 숨어 있었다. 그래도 그가 보여주는 씩씩함은 늘 싱그럽다. 믿음직스럽다. 그래서 그는 일복이 많은가 보다.

장면 #8.

보존과의 대장, 큰 키 만큼이나 큰 목소리의 윤현서 선생이 날아다닌다. 모자라고 부실한 재료와 장비, 그 속에서도 술자들이 진료를 원활히 해 나갈 수 있도록 그가 준비해주는 재료들은 놀랍다. 손느린 술자가 미처 요청하기도 전에 재료가 먼저 도착해 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윤현서 선생의 환상적인 어시스트로 양쪽 체어가 모두 원활히 돌아간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똑같다. 부산에 번쩍, 광주에 번쩍, 서울에 번쩍이다. 진료단 뒷풀이가 있는 곳에는 늘 그가 있다. 베트남 이야기만 나오면, 아쉬움에 이별했던 베트남 학생들 얘기만 나오면 눈자위가 새빨개지는 그는 몸의 피곤함도 개의치 않고, 베트남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그리워 그렇게 이곳저곳에 번쩍번쩍하고 다닌다.

애틋한 그리움을 직접 찾아가 만나는 실천으로 표현하고, 속 깊은 정을 큰 목소리의 농담으로 보여주는 그는 마음여리고 목소리 큰 경상도 가시나다. 눈이 빨개질수록 더 커지는 그의 목소리가 오늘도 또 그립다.

장면 #9.

▲ 맨 오른쪽 윤정식 선생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그는 노래패 공연으로 만찬회장 무대에 섰다. 전주 부흥회에서 베트남 평화의료연대를 알게 되어 진료단에 참가했다는 그는 이미 한겨레 문화센타의 강의를 들으며 베트남관련 발표를 한 경험도 있다.

보존과 진료실 구석에서 허리도 제대로 펼수 없고, 앉을 수도 없고,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도 없는 그 어시스트 자리에 그는 늘 서 있었다. 모두들 잠시 담배를 피러 커피를 마시러 나갈 때도 그는 그곳에 서 있었다.

약한 체력으로 모든 일정을 견디다 견디다 마지막 날에는 드디어 호텔방에 누워버렸는데도, 그렇게 몸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냈는데도 그는 쉬면서 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괜찮다며 웃었다. 그가 그렇게 호텔방에 누워버리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가 그렇게 힘든 것을 알지 못했다. 아니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가 행동했다. 아주 씩씩하게 말이다.

너무 조용했기에 윤정식 선생을 많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잠깐씩 보여준 꿋꿋함과 재치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강함을 이기는 부드러움의 전형이었다고나 할까.

장면 #10.

지친 체력에 안 좋은 자세로 일하느라 허리가 아파 쓰러진 그는 한방 진료소에 가서 침을 맞고 다시 돌아와 일한다. 모두들 좀 쉬라고 말리지만, 그는 예의 그 사람좋은 웃음으로 정말 괜찮다며 웃는다.

함께 한 베트남의 어린 학생들을 일일이 챙기고, 누구하나 소외된 사람 없는지 꼼꼼히 살피며 이것저것 챙겨주는 폼새가 영락 큰언니다. 그 자신은 어리지만 품은 큰 언니다.

일산의 외국인 노동자진료소에서 오랜기간 활동한 김정은 선생은 베트남에서도 그 경험을 십분발휘했다. 누구나 소홀히 하기 쉬운 뒷정리에서부터 쓰레기 정리까지, 그는 늘 마지막에 진료소를 빠져나가는 사람 중 하나였다.

꼼꼼하고 자상한 성격 그대로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그의 손길은 언제 어느곳에서나 그랫듯이 베트남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신순희(서울 이대 푸른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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