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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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의 등장
  • 유동기
  • 승인 2013.03.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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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기 원장의 『마키아벨리 로마사이야기』④

 

로마는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헬레니즘세계를 통해 다양한 물자와 지식이 유입된다. 예로 로마인이 목욕을 좋아하는 것도 동방의 헬레니즘 문화에서 들어온 것이다. 또, 로마의 초기 문학작품은 그리스의 극을 번역한 것이었고 최초의 희극도 그리스 희극을 답습한 것이었다.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시민주의) 사상이 더욱 발달한 결과 로마는 피정복민들에게 로마인과 똑 같은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세금징수 및 법률과 치안이 유지되면 그 밖의 면에서는 관용적이었다.

동서를 잇따라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는 한편 로마 국내에는 차츰 긴장이 고조된 이유로 대다수의 공직에 대한 엘리트계급의 독점과 소규모 농민계급의 몰락이다.

전쟁을 이용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토지를 대량으로 매수하여 대농장이 출현하였고 전쟁을 통해 값싸게 구입한 노예를 통해 농작물을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반면 토지를 잃은 소작농들은 도시로 나가 최저생활의 수준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무산계급으로 전략한 다수의 로마시민들의 선거권을 자산가들이 사들여 공직에 오르는데 이용했다.

포에니전쟁 이후에는 농한기에 시민들을 징병하는 방법으로는 더 이상 방대한 로마군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기원전 107년에 일정의 재산을 지닌 시민만 병역을 수행할 수 있는 병역법을 개정해 무산시민들을 채용함으로써 무산계급의 생활고와 부족한 로마군사 수를 동시에 해결했다.

이 개혁을 실행한 마리우스 집정관은 연전연승하고 군대의 정치적인 힘은 충성스런 다수의 병사들로 해서 더욱 강력해진다. 마리우스를 대표로 하는 유능한 장군들(술라,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은 원로원의 권력 제한과 평민계급의 등용 등을 감행하면서 로마정계는 민중파와 원로원파가 공화정 말기 100여 년간 다툼이 격하게 생긴다.

기원전 90년에는 동맹도시국가들의 반란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거의 모든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인정하게 되고 로마의 민회는 최고결정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한 때 마리우스의 부하였던 술라는 마리우스와의 암투에서 승리하고 원로원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2년에 걸치 ‘무기한 독재관’ 시절에 펼친다. 술라의 후원을 얻은 폼페이우스는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소아시아에 대한 영토확장을 이루면서 한편으로 원로원파의 경계의 대상이 된다.

기원전 59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카이사르는 7년 간 눈부신 전투를 통해 갈리아지방을 평정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군대를 지휘하려 하자 원로원들은 경계심을 높혀 집정관 시절의 불법행위를 추궁하려 하자 기원전 49년 1월에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까지 군대를 이끌고 점령함으로써 공화정이 붕괴하게 된다.

로마법에 따르면 반드시 루비콘강변에서 군을 해산해야 했기 때문에 군대가 로마 내부로 들어온 것은 엄연한 불법이었고 원로원들은 폼페이우스에게 지원을 요청하나 카이사르 군대에게 격파된다. 4년 후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잔당까지 완전 토벌한다.

카이사르는 술라처럼 2명이 선정되는 집정관이 아니라 1명만 선정되어 혼자서 권력을 장악하는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된다. 원래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독재관의 임기는 6개월이나 실제적으로는 종신이었다.

원로원 세력들의 카이사르의 권력독점에 대한 불만은 결국 루비콘강을 건넌지 15개월만인 기원 44년 3월 15일에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된다. 그러나 암살을 주도한 집단은 미래에 대한 비전과 통치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집권은 실패하고 2년 만에 모두 척결돼 공화정 시스템은 무너지고 제정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유동기(유동기치과, 동작구치과의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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