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이야기] '조선의 양심' 김영만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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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이야기] '조선의 양심' 김영만 선생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5.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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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17일, 나는 '화해와 평화를 위한 베트남 진료단' 일원으로 1주일 간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 1967년 해병대원으로 참전한 김영만 선생은 짜빈동 부대에서 포로를 학살한 죄책감에 35년간 시달렸다. 당시의 현장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에서 남쮸딘(남조선)의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3월 20일 오전 밀라이 기념관을 견학했다. 우리 숙소 미짜 호텔에서 20분이 채 안 되는 곳에 있었다. 그 곳은 미국이 저지른 베트남의 아우슈비츠였다. '손미'라는 마을에서 베트남 양민이 당한 참혹한 악몽을 사진으로 전시한 학살 현장이다. 20세기 미국이 저지른 야만을 이토록 생생히 보여주는 곳도 달리 없을 것이니,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 날 밤 나는 잠을 뒤척였다.

3월 21일 부스스 일어나 아침을 먹고 카메라를 둘러메고 로비로 바삐 내려갔다. 그런데 이한우 단장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 날 내 일정을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는 진료단을 3조로 나누었다. 진료기간 4일 동안 각조는 교대로 오전이나 오후를 택해 밀라이 기념관을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군에게 학살 피해를 입은 지엔 니엔, 푹빈, 하타이, 이 세 마을을 한 조씩 따로 방문해 피해자 증언을 듣고 위령비를 참배한 것이다. 나는 되도록 진료하지 않겠다고 양해를 구하고서 베트남진료단에 참가했다. 그래서 나는 밀라이를 두 번 갈 수 있었고, 세 마을 모두 방문할 수 있었다.

이 날은 우리와 함께 온 참전용사 김영만 선생이 당신이 주둔했던 부대를 찾아간다고 해서 나도 따라간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베트남에는 비자 심사를 엄격히 적용하던 때여서 진료이외의 활동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딱딱한 사회주의 국가라서 입국 목적 이외의 활동이 드러나 의심을 받게 되면 진료활동에 많은 곤란이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남조선' 참전용사가 사전 허락없이 돌아다니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진료단 집행부에서 김영만 선생에게 전적지 방문 자제를 요청했고, 김영만 선생을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하여 집행부와 마찰을 빚었다. 그래서 이한우 단장은 나에게 따라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당시에는 갈등의 내용을 몰라 몹시 당황했다. 어떨떨한 표정으로 로비를 서성거렸다. 다행히도 10여분 뒤 이한우 단장이 양보를 하여 김영만 선생 일행은 예정을 치를 수 있었고 나도 일행의 차에 합승할 수 있었다.

김영만 선생은 1999년 한겨레신문이 촉발한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성운동에서 가장 먼저 양심고백을 한 참전용사이다. 김영만 선생은 마산·창원에서 지역민주화운동의 핵심역할을 하며 이한우 단장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 진료단에 합세할 수 있었고, 마침 당신이 주둔한 부대가 우리 진료지역 인근이라 전적지를 방문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 이정명 PD와 인터뷰하면서 김영만 선생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고 이 PD 역시 내내 눈물을 훔쳤다
김영만 선생과 같이 온 일행은 진주 MBC 이정명 PD와 방송작가 이장원 선생이었다. PD와 방송작가 두 사람의 목적은 김영만 선생의 증언을 현장에서 취재하는 것이었다. 이 날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타리 "아직 끝나지 않은 길, 짜빈동을 찾아서"는 2001년 '한국방송대상' 지역교양부문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우리 일행은 김영만 선생이 주둔한 짜빈동 마을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미군이 관할했던 작전 지역 이름은 실제 베트남 지명과 다른 것이 많았다. '밀라이'라는 지명도 프랑스군이 멋대로 지은 이름으로 미군이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베트남 사람은 '손미'마을이라 부른다. 짜빈동이라는 지명도 미군과 그 용병인 한국군만이 사용한 지명이라 베트남 사람에게는 생소한 지명이었다.

1967년이래 산천도 많이 달라졌으니 김영만 선생 기억으로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를 안내할 베트남 사람 세 명과 동행했다. 당시 참전군인과 젊은 인민일보 기자, 그리고 인민 위원회 위원이었다. 김영만 선생 일행 3명, 베트남 안내인 3명, 통역인 베트남 학생 띠우, 그리고 나 모두 8명이 승합차에 탔다.

참전군인은 북베트남(월맹) 정규군 출신으로 호치민 루트를 따라 남하해 주로 이곳에서 전투를 한 전사로 이 지역 지리에 밝았다. 나이를 추측해 보면 쉰이 훨씬 넘었을 것인데 보기에는 40대 나이로 보였다. 다정한 눈매, 수줍은 듯한 미소를 머금은 입술, 호리호리하고 약간 키가 큰 몸매에서 풍기는 체취는 인자한 이웃집 아저씨처럼 보였다. 인자한 아저씨는 다리를 약간 저는데 전쟁 때 입은 총상 때문이라고 했다.

인자한 아저씨 덕분에 짜빈동 마을을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베트남의 여느 농촌과 다름없었다. 마을 앞 개울 너머는 너른 들판이 펼쳐있고 당산 나무처럼 큰 나무가 마을 입구를 지키고 서있었다. 마을 뒤편에는 나지막한 야산이 살포시 누워 있었다. 마을이 무척 안온하게 느껴졌다. 김영만 선생은 이 야산에 청룡부대가 주둔한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어 사방이 잘 보이는 전략 요충지라 했다. 지금은 지나간 세월만큼 나무가 자랐다.

마을 노인 한 사람과 같이 뒷산에 올랐다. 노인은 여기서 한국군과 큰 전투가 있었다고 했다. 김영만 선생은 기억을 되살리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너무나 바뀐 모습에서 옛 부대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였는데 노인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안도하였다.

▲ 가운데 흰 셔츠에 가방을 둘러맨 사람이 참전전사 탄타오 시인이다
깊은 감회에 젖은 김영만 선생은 혼자 숲으로 들어가더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꼭 쥐고 고개 숙인 채 기도를 올렸다. 나는 내 생애 가장 엄숙한 순간을 목격했고 전투병이 총을 쏘듯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렀다. 한 참 뒤 일어난 김영만 선생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지난 회한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서인지 나무를 잡고 이정명 PD의 취재에 응했다.

『한국군은 수색정찰 갔다오면 종종 베트콩 용의자를 체포해 온다. 그 용의자를 포로수용소로 이첩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2∼3일 뒤에 부대 현장에서 처치해버린다.
어느 날 김영만은 30대 초반쯤 된 베트콩 용의자를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용의자를 부대 밖으로 데리고 나가자 용의자는 죽음을 알아채고 도중에 생똥을 쌌다. 그에게 야전삽을 던져주고 구덩이를 파라 했다. 네 명이 그를 구덩이에 세워놓고 장난치듯 총살하고 대충 묻었다. 그리고 아무 느낌 없이 돌아섰다.

그 날 해가 막 질 무렵 어떤 할머니가 부대 앞에서 울고만 있어 가라고 해도 꿈쩍도 않았다. 김영만은 체구가 자그만 이 할머니가 자기 친할머니를 빼 닮았다고 느꼈다. 손짓 발짓으로 까닭을 물으니, 자기 아들이 이 부대에 잡혀왔다고 했다. 김영만은 순간적으로 둘러댔다. 아들을 아침에 헬기에 태워 포로수용소로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침에 비가 와서 헬기가 뜨지 않았다고 했다. 김영만은 거짓말에 당황하고 머뭇거렸다.

할머니는 죽 그릇을 아들에게 건네 달라고 부탁했다. 김영만은 죽 그릇을 들고 부대에 들어가 조금만 남기고 땅 바닥에 버렸다. 30분쯤 뒤 그릇을 돌려주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안 보이던 아이 둘이 할머니 양팔에 매달려 할머니와 셋이 부슬부슬 비 맞으며 울고 서 있었다. 다 먹지 않은 그릇을 받아든 할머니는 갑자기 통곡을 하였다. 아들은 반드시 그릇을 깨끗이 비운다는 것이었다. 날이 어둑해지도록 애들을 껴안고 막무가내로 울고만 있어 김영만은 그만 부대 안으로 돌아왔다.

이틀 뒤 김영만의 부대는 월맹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고, 김영만은 그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며 큰 부상을 당한다. 바로 이 전투가 베트남에서 한국군 해병대가 큰 승리를 했다고 자랑하는 짜빈동 전투였다. 덕택에 김영만은 화랑무공훈장 대상자가 되었다. 김영만은 제1급 원호혜택을 누릴 수 있는 원호심사를 거부했다. 부상당한 김영만은 황급히 제대를 신청했다. 그 날을 잊기 위해 전쟁을 자신의 인생에 담아놓지 않기로 했다. 김영만은 베트남전쟁으로 돈을 받는다면 그것은 사람을 죽인 대가로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영만 부인은 보따리 장수만 20년을 하면서 아이들 학비 한번 제대로 주지 못했다. 원호신청을 하기만 했어도 긴 세월을 힘들게 살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사람을 죽였어요, 내손으로" 인터뷰를 마치자 김영만 선생은 그만 오열하고 말았다. 이정명 PD는 한 손에는 마이크 한 손에는 손수건으로 인터뷰 내내 눈물을 훔치며 증언을 녹음했다. 이장원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내 카메라 뷰파인드도 눈물로 얼룩졌다.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죄야말로 미래를 위한 화해임을 가슴에 새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 김영만 선생이 남쮸딘(남조선) 군인이라고 하자 차고 매서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우리 일행은 산에서 내려와 우물이 있는 민가를 찾았다. 김영만 선생은 당시 이 동네 우물물이 매우 맛있었다고 했다.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우리는 목을 축였다. 주인 할머니가 탁자가 놓여 있는 방으로 들어오라 하더니 차대접을 했다. 할머니 치아는 다 빠져서 입이 합죽하였으나 눈동자만은 커다랬다.

김영만 선생이 자기는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한국군이라 소개하자 할머니의 커다란 눈매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지고 차가워졌다. 김영만 선생이 용서를 빌고자 무릎 꿇고 큰절을 올리니 금새 어진 미소로 바뀌었다. 짤막한 순간 표정 변화에서 증오와 용서를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 불의에 대해 저항할 때는 끝까지 저항을 하고 끝나면 다시 평상으로 돌아오는 베트남 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과 화해정신을 할머니 얼굴에서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통역학생인 띠우를 통해 인자한 아저씨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려고 했다. "미국 독립선언문과 프랑스 대혁명 정신은 인간의 존엄성을 드높인 인류의 귀중한 자산이다. 그러한 프랑스와 미국이 당신들의 나라를 총칼로 잔인하게 짓밟았다. 당신들은 그들과 전쟁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민족의 존엄성을 지켜왔다. 베트남전쟁은 앞선 두 혁명보다 더 위대한 혁명이라 생각하는데 당신들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나 띠우 자신이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 인자한 아저씨와 대화를 포기하였다.

숙소로 돌아와 하루 일을 메모하고 저녁을 먹었다. 이한우 단장에게 오늘 아주 뜻깊은 일정이 무사히 끝나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저녁 8시 베트남이 자랑하는 국민시인 탄타오의 강연이 있어 8층 강연장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기 위해 앞자리에 앉았다. 조금 지나 탄타오 시인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 유명한 시인이 오늘 우리 일행을 안내한 호리호리하고 다리를 저는 바로 그 인자한 아저씨가 아니던가?

2001년 3월 21일, 나는 내 생애에서 결코 잊지 못할 감동을 하루에 두 번을 만끽하는 커다란 행운을 맞은 것이다. 하나는 김영만 선생의 참회 모습이고, 하나는 시인 탄타오와 만남이었다.

송필경(대구 범어연세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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