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이 가는 길은 조선 땅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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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이 가는 길은 조선 땅을 닮아있다
  • 윤은미 기자
  • 승인 2013.04.05 19: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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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연 현장르포Ⅰ]14기 진료단, 호찌민시 ‘전쟁증적박물관’서 가해역사의 아픔 마주하다

 

▲ 사진1)
"베트남 중부의 밀라이 마을. 사진 속 6살, 9살쯤 돼 보이는 두 소년이 바닥에 엎드려 있다" 위 사진1)은 1968년 3월 15일 미군이 자행했던 ‘밀라이 대학살’ 현장에서 쏟아지는 포격 속에 동생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동생을 품에 안았던 형의 모습이다. 하지만 잠시 후 두 소년은 채 몇 발짝 가지 못해 참혹한 주검이 돼 한 종군기자의 필름에 남겨진다.(사진2)의 모습)

호찌민시의 미국 정보부 건물이 있던 곳에 세워진 베트남 전쟁증적박물관. 그곳에 전시된 두 소년의 사진 앞에 평연 14기 진료단원들이 멈춰 섰다.

▲ 사진2)
이곳 전쟁박물관에는 미국이 베트남전쟁 당시 사용했던 잔혹한 무기 및 고문도구와 함께 종군기자들이 남긴 백여 점의 사진이 소장돼 있다. 아맙 구수정 본부장의 생생한 소개로 돌아본 이곳 박물관에는 작은 소품 하나 사진 한 점마다 서글픈 한이 서려있다. 구수정 본부장은 이 두 소년의 사진 앞에서 “밀라이로 가는 길은 우리 조선 땅을 닮았다”고 말했다.

전쟁박물관에서는 평연 송필경 대표가 집필한 ‘지평꿈(지난밤 나는 평화를 꿈꾸었네)’에 소개됐던 대다수의 사진을 실제로 볼 수 있다. 세계의 전쟁역사상 가장 많은 종군기자가 전사했다는 베트남 전쟁. 그들이 목숨을 걸고 남긴 유작들 속에서 우리는 늘 피해자였다고 생각해 온 우리 역사의 새로운 아픔을 마주했다.

‘인간 살상무기 시험전’…1만일의 전쟁 기록

박물관 옥외에는 전쟁 당시 동원됐던 탱크와 전차, 폭탄 등이 전시돼 있고, 실내에는 사진은 물론,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태어난 기형아의 시체가 포르말린병에 전시돼 있어 충격을 더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사용한 화학무기는 약 7천 200만리터. 그 중 4천 400만리터가 고엽제였으며, 이 안에는 170kg의 다이옥신이 포함됐다. 베트남전쟁이 ‘인간 살상무기 시험전’이라 일컬어지는 단편적 근거이다. 참고로 다이옥신 80g이면 인구 800만 도시를 전멸시킬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베트남전쟁의 가장 끔찍한 화학무기인 고엽제의 후유증은 전쟁 후 2,3세대까지 대물림돼 수많은 베트남의 어머니들을 울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그러했듯이 베트남전이 마무리되자 이곳 베트남에서도 ‘베이비붐’이 일었고, 고엽제로 인해 수많은 사산아와 기형아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이 때 베트남의 어머니들은 계속해서 사산아가 태어나자 이에 저항하는 의미로 호찌민시의 가장 큰 산부인과에 죽은 아이들의 사체를 보냈고, 베트남사람들은 이를 전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사진3)
위 두 형제의 비극적인 사진에서 몇 발 더 옮기면 낯익은 사진3)이 보인다. 베트남의 한 소녀가 ‘네이팜탄’이라는 살상무기에 의해 온몸에 불이 붙자 입고 있던 옷을 찢어 던지고, 벌거벗은 채 울며 뛰쳐나오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훗날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고, 사진 속 소녀는 39번의 수술 끝에 살아나 현재 UN 평화대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소년과 소녀의 사진 반대편 벽면에는 척추뼈가 그대로 드러날 만큼 앙상해진 한 군인의 뒷모습 사진이 전시돼 있다. 바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한 한국군의 모습이다. 'Who am I'라는 제목으로 전시된 이 사진 아래에는 ‘고엽제 살포로 인한 한국군 피해자’라는 주석이 달려있다. 미군의 지휘 아래 베트남 곳곳에서 학살을 자행했던 한국군을, 지금까지도 “가해자는 없다”며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을 베트남은 ‘피해자’라 부르고 있었다.

이외에도 이곳 박물관 출구로 이어지는 감옥에서는 천장을 창살로 만들어 윗층에서 감시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감방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감옥 바로 앞에는 포로 대여섯명을 한꺼번에 가두는 가시철조망으로 엮인 관구(棺柩)가 놓여 있고, 감옥과 이어지는 골방에는 단두대가 서 있다.

“내 육신을 가둘 순 있어도 내 정신만은 지배할 수 없다.” 감옥 벽면의 한 귀퉁이에 새겨진 글귀가 눈에 띄었다.

▲ 구수정 본부장과 함께 박물관을 방문한 14기 진료단
민족 통일의 ‘베트남전쟁’도 기념될 수 없는 이유

이날 구수정 본부장은 이곳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두 개의 명칭에 대해 지적했다. 하나는 용산에 위치한 ‘전쟁기념관’, 하나는 ‘베트남전쟁’이다.

베트남전쟁을 또 다른 말로 30년전쟁,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월남전이라고도 하지만, 베트남전쟁을 베트남전쟁이라 칭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구 본부장은 말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에 의한 미국이 발발한 전쟁이며, 더 엄밀히 말하자면 베트남에서의 미국전쟁이라 해야 맞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베트남전쟁’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쟁의 주체 ‘미국’이 빠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이 전쟁은 'American Vietnam War'로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 박물관에서는 ‘American War in Vietnam’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앞으로 베트남전쟁을 뭐라 칭할지 한참을 고민했고, 좀 길고 거추장스럽더라도 ‘베트남에서의 미국전쟁’(이하 베미전쟁)이라는 가장 사실에 가까운 명칭을 택하기로 했다.

▲ 박물관 외관의 모습
3년전쟁이었던 한국전쟁 직후의 처참했던 시기를 안다면, 흔히 ‘30년전쟁’이라 하는 베미전쟁이 막을 내렸을 때의 참혹함에 대해 가히 상상이 될 것이다. 그 참혹했던 전쟁의 끝에 베트남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이곳 전쟁증적박물관(War Remnants Museum)을 세워 전쟁의 비극을 기록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트남은 베미전쟁을 통해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쟁취한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를 가졌지만, 결코 전쟁을 기념하지는 않았다.

“이 세상 어떤 전쟁도 기념될 수 없다”는 구수정 본부장의 두 번째 한 마디. 바로 우리 용산의 ‘전쟁기념관’을 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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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2013-04-29 16:11:48
전쟁기념관을 많이 지나치긴 했지만 한번도 방문해 본 적은 없어서 ...도대체 무얼 기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비행기 탱크, 무기들 전시만으로도 별로 발길이 안 가지더라구요. '민족의 해방과 통일 쟁취한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를 가졌지만, 결코 전쟁을 기념하지는 않았다' ... 새겨야 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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