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간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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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
  • 김랑희
  • 승인 2013.04.1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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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랑희, 인권활동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

내가 인권운동을 시작한 이후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장애인, 이주노동자, 성소수자...나와 정체성이 다른 이들이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들이 나와 이웃해있다는 사실은 체감하지 못했다.

이들을 만나기 전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장애인은 5살 때쯤 윗집에 살던 소아마비를 앓던 언니뿐이었고, 이주노동자는 길거리에서 스쳐지나간 이주노동자일 것 같은 사람들이 전부였으며, 성소수자는 텔레비전에서 본 홍석천과 하리수가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학교를 다닐 때도, 직장을 다닐 때도, 동네에서도 그들을 가까이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들이 너무 소수여서 단지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일까?

인권운동을 하면서 이들이 사회적 소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별과 편견, 시혜와 동정, 통제와 격리로 뒤범벅이라는 것을, 그런 시선이 이들에게 폭력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지식과 인식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인권적으로 이들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어떻게 함께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이들과 처음 만났던 순간, 그리고 점점 만남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한동안 나는 부끄러운 나, 당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낯선 긴장감이 나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그 긴장감은 나에게만 있었던 것 같다. 장애인과 식사를 하면서 어떻게 식사 활동보조를 해야하는지 전혀 알지 못해 허둥대던 나, 이주노동자에게 당신의 ‘착취당하는 노동현실을 말해줘’라며 안달하던 나, 성소수자들과 어떻게 대화를 나눠야할 지 고민하다 꿀먹은 벙어리처럼 있던 나. 결국 머릿속의 지식과 인식만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서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서툴음과 긴장감은 나를 반성하게 했다.

무조건 도와줘야할 것 같은 장애인에게 도움은 당사자가 원해야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고, 이주노동자들이 착취받는 노동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민이자 청춘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게이는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만큼 과장된 여성스러움도 없었고 꽃미남도 아니었고 오히려 평범해보였다. 이들과 함께 내가 성장했다면, 그들이 지난 내 삶속에 내 친구로 지내왔다면 이런 낯설음과 당황스러움은 없었으리라. 이 낯설음때문에 나와 다르지 않은 이들이 왜 나와 다른 세상에 살게 된 것은 아닐까?

여전히 차별금지법 제정이 힘겨운 사회

차별금지법제정을 앞두고 다시 지독한 혐오가 사회를 뒤덮고 있다. 2007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했던 당시에도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이 차별사유에 포함되는 것에 대해 결사항전의 자세로 막아냈던 그 혐오는 2010년 SBS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두 남성의 사랑에 대해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라는 광고를 게재하면서 방송중단을 촉구하기도 했고, 2011년 서울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둘러싸고 "청소년에게 동성애를 허용하면 안 된다", "애들에게 항문성교를 가르칠거냐", "초등학생 엄마에 중학생 아빠가 생길 것"이라며,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임신 및 출산 차별금지를 문제 삼고 나섰다.

차별금지법제정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단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홍재철 회장은 동성애가 혐오스럽다며 나라를 망치는 일이고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고 한다. 동성애는 정신적인 질병이기 때문에 교회 나와서 영성을 바꿔야하고 교육과정에 동성애비판의 내용을 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혐오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왜 동성애가 그리 혐오스러운가? 동성애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남성간의, 여성간의 섹스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 같다. 성소수자인 ‘사람’은 사라지고 ‘동성섹스’만 보니 동성애는 짐승과 같은 것이라고 비난하고 동성애자는 문란한 사람으로 둔갑하고, 정신질환자로 강제 치료를 받아야하는 대상이 되며 에이즈의 원흉이 된다.

과거 의학계가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분류한 것은 편견에 의한 근거없는 것이라며 현재는 동성애를 치료하는 행위가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발표해도, 에이즈는 이성간의 성 관계로 인한 감염이 훨씬 더 많다는 통계에도, 동성애는 배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변할 수 없다는 것이라는 호소에도, 국제사회가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한다고 요구해도 꿈쩍하지 않는 편견은 혐오를 끊임없이 생산해낸다.

한기총 홍재철 회장은 소수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다수의 인권이 ‘더’ 중요하다며 동성애를 반대한다. 나는 이 말이 너무 무섭다. 홍 회장이 말하는 ‘다수의 인권’이 다수의 보수적인 기독교의 ‘이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는 목사의 역할은 도덕과 윤리, 사상을 다루는 것인데 그 도덕과 윤리, 사상으로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를 하면 차별금지법에 의해 ‘3000만원 이행강제금’을 물게되니 목사를 할 수 없고, 전도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을 부정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지켜야하는 종교는 어떤 의미인가? 그것을 인권이나 사회의 안녕으로 포장하면서 주장할 때 누군가는 삶은 포기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김랑희 인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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