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78]‘시간의 향기’와 ‘우연한 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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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78]‘시간의 향기’와 ‘우연한 산보’
  • 전민용
  • 승인 2013.05.0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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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시간이 위기를 맞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늘 바쁘고 시간이 없다. 잠은 부족하고 달콤한 잠을 자기도 어렵다. 시간은 쏜 살 같이 날아가 사라져 버린다. 그 시간동안 무엇을 했고 지금 무엇이 남아 있는지 생각하면 불안하고 허망하다. 한번 뿐인 내 인생의 시간이 이렇듯 덧없이 흘러가버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2012년을 강타한 ‘피로사회’(건치신문 북카페에 2012년 5월에 소개)의 저자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를 가지고 다시 왔다. ‘피로사회’와  내용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책이다. ‘피로사회’가 규율사회와 성과사회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이후의 노동의 성격과 삶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다루고 있다면 ‘시간의 향기’는 이것과 시간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의 피로사회가 시간을 인질로 잡고 있다고 말한다. 시간을 일에 묶어두고, 일의 시간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휴식도 재충전의 시간이고 결국 일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휴일이나 휴가가 유급 휴일과 유급 휴가가 된 것은 이런 현실을 잘 드러내주는 사례일 것이다. 저자는 심지어 잠잘 때도 일의 시간을 데리고 간다고 한다. 우리의 잠자리가 편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일의 시간에는 향기가 없다. 저자는 일의 시간이 아닌 새로운 시간을 생성하는 시간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시간에 향기를 되돌려주는 시간 혁명이.

저자는 근대 이전의 신(화)적 세계나 근대의 세계는 이야기가 있는 시대라고 규정한다. 신학적 세계관은 신과 구원의 세계관을 통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를 만들었고, 근대는 자유와 행복이라는 현세의 희망을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야기의 시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후기 근대,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사라져버렸다. 신, 이념, 인류의 목표 같은 모두를 포괄하는 공통의 지향점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목적과 의미를 잃은 인간은 세계나 사물도 덧없게 느끼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무상해진다. 인간은 급격하게 공간과 시간을, 세계를, 공동의 삶을 상실해 간다. 남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인간은 그 작은 육체라도 건강하게 지키려고 악착같이 애쓰게 된다. 그것밖에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육체의 건강이 세계와 신을 대신한다. 죽음을 넘어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은 그토록 죽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이만 먹을 뿐 늙지는 않는다.”(16쪽)

그렇다고 이야기의 시간이 사라진 것을 애석해 할 이유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야기의 종언, 역사의 종언은 신학과 목적론이 없는,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는 삶의 시간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려면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사색적 삶을 복원하기 위해 사색과 노동에 대한 사유들을 돌아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을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 한가로움이 아닌 영역(아스콜리아, 노동의 영역)과 한가로움(스콜레)의 영역, 쉼 없음과 쉼으로 삶을 구분한 것이다. 노동은 꼭 해결되어야 할 삶의 욕구에 묶여 있지만 한가로움은 강요도 걱정도 없는 자유의 공간을 열어준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실존의 본질은 노동이 아니라 한가로움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로운 인간이 사는 삶의 양식(비오이)을 세 가지로 구별했다. 쾌락(헤도네)을 추구하는 삶, 폴리스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업적을 이룩하는 삶(비오스 폴리티쿠스, 영예와 미덕을 추구했다.), 진리의 사색적 고찰에 헌신하는 삶(비오스 테오레티코스) 이다. 이 세 가지의 삶은 모두 삶의 불가피한 필요와 강제인 노동에서 자유롭다. 이 중에 최고의 행복은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이라고 했다.(139쪽)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 등 중세까지는 사색적 삶이 활동적 삶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이어졌다. 중세 후기의 토마스 무어는 ‘유토피아’에서 “누구나 하루에 6시간씩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한가로움과 사색에 몰두한다.”고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노동에 삶의 필요성을 넘어서는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다. 루터는 직업으로서의 일을 신의 부름과 연결시켰고, 캘빈은 노동에 구원의 의미를 부여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과 구원을 결합했다. 일은 신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삶의 목표가 되고 ‘한가로움’ 같은 시간 낭비는 무거운 죄악이 된다.

근면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는 산업화는 기계화만이 아니라 근면한 인간으로의 훈육의 과정이기도 했다. 저자는 여가사회, 소비사회라는 것도 노동사회의 이면일 뿐이라고 한다. 점점 증가하는 생산성은 점점 더 많은 여가시간을 만들어내지만 여가시간은 더 고차적인 활동이나 한가로움이 아닌 일에서의 회복이나 소비에 사용될 뿐이다.

저자는 이렇게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되어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라고 한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열린다는 것이다. “행동 없는 사색적 삶은 공허하고 사색 없는 행동적 삶은 맹목이다.” 저자는  ‘노동의 민주화’와 ‘한가로움의 민주화’의 결합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한다.(182쪽)

저자가 강조하는 한가로움과 사색적 삶,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저자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많이 인용하는데 그 중에 마르셀이 보리수 꽃잎차에 담근 마들렌의 향과 맛을 보며 완전히 독자적인 전대미문의 행복감을 느끼는 장면을 향기로운 시간의 최고의 예로 든다. 또한 “섬세한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 보잘것없는 것, 사소한 것, 떠도는 것, 뒤로 물러서는 것 등, 폭력적인 손길에서 빠져나가는 모든 것.”(126쪽)을 인용하기도 한다.

저자는 (시간의) 향기가 지배하는 사회는 추억과 기억을 자양분으로 하는 사회, 느린 것과 긴 것을 먹고사는 사회일 것이라고 한다. 그는 조급성의 시대인 영화적 사회, 즉 시각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대와 대비시키기도 한다. 즉각적인 향락이나 욕망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생겨난다고도 한다.

이런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전달할까 생각하다 우연히 발견한 책이 ‘우연한 산보’(쿠스미 마사유키 원작, 타니구치 지로 작화)라는 만화이다. 이 만화는 작가가 사전 조사하지 않고, 옆길로 새고, 계획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며 무조건 걷고 본 경험을 그린 만화다. 주인공은 ‘목적 같은 거 없이 자기 마음대로 느긋하게 걷는데서 오는 기쁨’을 말한다. 같은 작가들의 ‘고독한 미식가’라는 음식 만화도 있다.

사색은 언어로 하는 것이고 언어는 생각뿐 아니라 대화의 도구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어원상으로 ‘친구나 연인에 속해있는’이라는 뜻이며 인간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62쪽)고 말하고 있다. 나의 사색과 너의 사색이 만나고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가 섞여 우리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향기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과 함께라면 금상첨화겠다.

자기만의 고유한 향기는 결국 자기만의 방식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가로운 시간을 만들고 자기 자신과 인생과 세상에 대한 깊은 사색을 즐기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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