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용의 북카페 -80]소설 ‘파이 이야기’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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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의 북카페 -80]소설 ‘파이 이야기’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 전민용
  • 승인 2013.06.1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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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 작가정신 라이프 오브 파이, 이안 감독

 

파이(파이 파텔)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파리 최고의 수영장 ‘피신 몰리토’를 딴 이름이다. ‘피신’을 ‘피싱’으로 발음하면 오줌 싸는 중이라는 뜻이 되므로 학교에서 집중적인 놀림감이 된다. 상급 학교에 진학한 피신은 고심 끝에 파이(그리스 문자, 원주율)라는 별명을 만들고 첫 수업 시간부터 자신을 파이 파텔로 적극 홍보한다. 파이의 전략은 성공하고 학생들 사이에 별명 만들기 열풍까지 분다. 이렇듯 파이는 능동적이고 매력적인 아이다. 

“아이들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대단한 철학적 깊이가 있는 영화입니다. 강추 합니다. 꼭 보세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본 누군가의 이야기다. 통신회사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소설 ‘파이 이야기(원제 ‘라이프 오브 파이’)를 핸드폰에 다운로드 받아 읽었다. 2002년 맨부커상 수상작이다. 소설 후에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도 보았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흥미진진하면서도 깊이 있고 어린이나 어른이나 자신의 눈높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소설과 영화는 같은 듯 다른 이야기다. 당연하겠지만 소설에 있는 이야기들 중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영화적 재미를 위해 새롭게 창조한 이야기나 화면들도 많다. 파이가 원주율을 칠판 세 개에 걸쳐 외워 쓰는 장면이나 여자 친구 아마디를 만나는 이야기는 소설에는 없다. 파이가 말하는 두 가지 버전의 조난 이야기에 대한 작가와 감독의 강조도 다르다. 영화는 아름답고 소설은 진지하다. 그리고 둘 다 재미있고 여운이 깊다.

파이 아버지 소유의 동물원은 파이에게 지상낙원이다. 파이는 누구보다 동물을 사랑한 소년이다. 파이는 훗날 토론토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한다. 동물은 원래 보수적이다. 아주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다. 또한 가차 없는 서열의 지배를 받는다. 동물원 사자 굴에 떨어진 사람을 사자가 죽이는 것은 허기 때문이나 피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수 조련사들은 늘 자신이 일인자이고 그곳이 자기의 영역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생각과 달리 야생이 곧 자유이고 자유가 곧 행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물에게는 자유보다는 생존의 조건이 더 중요하다. 동물원에 가두는 것이 야생으로 사는 것보다 객관적으로 더 나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동물은 동물일 뿐이라는 교훈을 파이는 두 번 배운다. 한 번은 아버지, 또 한 번은 리처드 파커로 부터다.

파이는 누구보다 신을 사랑한 소년이다. 파이의 놀라운 점은 모든 종교를 향한 열린 마음이다. 독실한 힌두교 신자로 살던 파이는 열네 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열다섯 살에 이슬람교를 만난다. 파이는 상식을 뛰어넘어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모두 받아들여 기도를 하고 세례를 받고 정성껏 예배드린다. 작가가 어른이 된 파이 집을 방문했을 때도 여러 힌두신들, 성모상,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 이슬람 기도 카펫과 성경을 볼 수 있었다.

파이는 여러 종교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무신론도 받아들인다. 파이의 중학교 생물교사이자  실천적 공산주의자인 쿠마르 선생님은 “과학과 경험이 전부이고, 신은 없다.”고 설명한다. 파이는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무신론자들이 다른 신앙을 가진 형제자매임을 깨닫고 진정한 형제애를 느낀다. 파이의 소년 시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이 생물선생님과 이슬람 지도자다. 두 사람의 이름이 쿠마르로 같다. 파이는 이들의 영향으로 나중에 대학에서 동물학과 종교학을 전공한다.

이 이야기의 백미는 1977년 7월 2일부터 1978년 2월 14일까지 227일간의 태평양 조난기다. 캐나다로 이민을 가게 된 파이의 가족은 1977년 6월 21일 파나마 선적의 일본 화물선 ‘침춤 호’에 탄다. 얼마 후 배는 침몰하고 16세 소년 파이와 몇몇 동물만 살아남는다. 결국 깊이 1미터, 폭 2.4미터, 길이 8미터의 구명보트에 파이와 뱅골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 둘만 남게 된다. 강가에서 물을 먹다 사냥꾼에게 발견되어 생포된 호랑이는 써스티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서류상 실수로 사냥꾼의 이름과 바뀌는 바람에 리처드 파커라 불리게 되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동물을 적 아니면 친구로만 묘사하는 흔한 공식과 달리 사실적인 호랑이의 모습이 생생하다. 물과 먹을 것을 만들고, 호랑이를 피하다 서서히 공존하는 과정과 조난에 따른 죽음 같은 절망과 고통 등이 매우 사실적이고 개연성이 있다. 소설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구명보트와 파이가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만든 뗏목의 모습, 리처드 파커와의 숨가뿐 대결과 동거 장면을 영화를 통해 흥미 있게 지켜보았다. 영화는 아름답다 못해 몽환적이기도 했다.

파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동물과 신에 대한 그의 원초적인 사랑일 것이다. 이성적으로 보면 해박한 동물의 습성에 대한 지식과 극심한 고통과 절망을 신과 인간과 리처드 파커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킨 그의 열린 마음일 것이다. 그는 극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미사를 올리고, 힌두교식 제사를 올리고, 알라신께 예배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멕시코 토마틀란의 베니토 후아레스 병원에 입원 중인 파이를 찾아 온 사고조사원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파이를 추궁한다. ‘뱅골 호랑이나 조난 중 만난 프랑스 요리사나 미어캣의 식충섬’ 같은 황당한 얘기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파이는 다른 버전의 살인과 식인이 얽힌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묻는다.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이야기가 더 나은가요?”

이 질문은 ‘파이 이야기’와 ‘라이프 오브 파이’가 우리에게 하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동물은 동물이다.” 인간도 극한 상황에서는 조금 다른 동물일 뿐이다. 이 통찰을 이해한다면 누구나 파이처럼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종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는 파이의 생각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사랑, 명예, 재물 같은 가치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것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 이야기는 끔찍한 버전이 될 수도 아름다운 버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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