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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이야기]1975년 4월 30일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5.04.28 00:00

위대한 민족해방통일

   
▲ 사이공에 진입한 북베트남 정규군. 군화도 제대로 없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질끈 묶은 신을 신고 있다
1975년 4월 26일, 마침내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을 향한 마지막 걸음을 내딛었다. 그것은 해방세력의 '호치민 작전'이다. 길고 긴 '전쟁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것이다. 밀고 밀리는 전투가 사이공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고, 사이공 바깥에서 남베트남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은 무려 4일이나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힘을 다했으나 그들을 북돋아줄 지휘관인 육군참모총장은 벌써 미국으로 도망갔다.

미국인은 4월 19일부터 탄선넛 공항을 거쳐 거의 빠져나갔다.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굴뚝에서는 기밀문서를 태우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4월 21일 대통령 티우는 대만으로 도망갔다. 며칠 후 두옹 반 민이 대통령을 이어 받았다. 4월 29일 수백 대의 헬기가 미 대사관 옥상과 미해군 항공모함 사이로 매우 바쁘게 오갔다.

수많은 남베트남인들이 최후의 헬기에 타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대사관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담장 밖은 지옥이고 담장 안은 구원의 세상인 만큼, 어떻게든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미 해병대원들은 가차없이 곤봉을 휘두르고 최루탄을 던져댔다. 이것이 미국과 남베트남의 30년 혈맹 사이의 냉정한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4월 30일 새벽 3시 45분, 미국대사관의 마틴 대사는 성조기를 접어들고 헬기를 타고 대사관 건물을 떠났다. 5시 30분 북베트남 전차 여단은 사이공 교외의 다리를 건너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사이공 거리에 해방군 전차의 긴 행렬이 있었다. 아침 9시, 미국 대사관 내의 주요시설을 파괴한 폭파반과 미해병대의 경비병력까지 모두 실은 헬기가 대사관에서 날아오르면서 30년에 걸친 미국의 베트남개입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한편 민 남베트남 대통령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라디오 선언을 했다. "본인은 베트남군 총사령관으로 전군에게 현 위치에서 정지하고 발포를 중지할 것을 명령한다."

   
▲ 1975년 4월 30일 11시 39분, 해방전선기를 단 전차가 대통령궁 철문을 밀어붙이고 있다
곧이어 해방전선기를 매단 전차 한대가 대통령궁 철문을 밀어붙이고 들어선 것이 11시 30분이었다. 2층의 집무실에서 민 대통령과 각료들은 정장을 하고 북베트남측과 정권인계 절차를 논의하기 위해 항복문서를 들고 깍듯이 기다렸다.

민 대통령이 말했다 "그대를 기다렸다. 항복하노라." 북베트남 탱크중대의 응우옌 중위에게 "당신들은 항복할 자격이 없다. 이미 항복할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전쟁 포로일 뿐이고, 포로와 뭘 의논하지 않는다"는 답을 듣는다. 30분 후 관저 옥상에는 해방전선기가 바람에 나부끼며 높게 펄럭였다. 이로써 베트남전쟁은 끝났다.

1858년 프랑스군이 베트남의 다낭을 무력으로 점령한 지 약 100년 만에 베트남인민은 프랑스와 일본과 미국의 지배를 자신의 힘으로 끝맺음했다. 그것은 세계의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들과 벌였던 100년 동안의 길고 고통스러운 무력투쟁에서 베트남 혁명가들과 인민이 거둔 마지막 승리였다. 이리하여 베트남은 북부 중국과 접경지대에서 메콩 하류까지 지배하는 하나의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날 오후부터 사이공 거리에는 북베트남 병사들이 넘쳐흐르기 시작했지만, 사이공 시민들이 북베트남이 어떻게 세계 초강대국을 물리치고 백만 남베트남군을 무찔렀는지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북베트남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

전차부대원을 제외하고는 군화도 없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어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점령군이 흔히 저지르는 살인, 약탈, 강간 사건이 전혀 없었고, 미군 장교들이 숙소로 쓰던 호텔을 배정 받은 병사들은 침대를 두고 바닥에 군용 모포를 깔고 자면서 시설이나 집기 어느 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 전차부대 선도 지휘관이 당신들은 포로일 뿐이고, 포로와는 뭘 의논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남베트남은 몇몇을 제외하고 지휘관이 앞장서 미국으로 도망쳤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입대했는데, 이름만 군적에 올린 채 외국 유학을 떠났다. 지도층 아들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남베트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군율과 기강이 서슬 퍼렇게 살아 있는 북베트남의 승리는 너무나 당연하였다. 다음날 5월 1일 사이공 시는 호치민 시로 바뀌었다.

한국전쟁의 '휴전'과 베트남전쟁 '종전'

프랑스 정치학자 또끄빌(Tocqueville)은 "자유는 일반적으로 격변 속에서 확립하고 내란을 겪으며 완성한다'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한 국가나 개인의 자유는 그저 줍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피를 희생하며 쟁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의 격변은 물론 내란의 비극을 감수하지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0세기에 일어난 대표적 내란을 꼽으라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휴전'과 베트남전쟁 '종전'의 교훈은 무엇인가?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1986년 판) 책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1953년,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남쪽의 부산에서 북쪽의 신의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죽은 자들을 묻고 잃은 것들을 슬퍼하면서, 그들 생애의 남은 것들을 주워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다. 수도 서울에는 콘크리트와 파편이 뒤덤벅이 된 길가에, 텅 빈 건물들이 마치 해골처럼 서 있었다. 수도 주변의 미군 기지에는 수많은 거지들이 외국군인들이 내버리는 찌꺼기를 줍고자 모여들었다.

북쪽에서는 현대식 건물이라고는 거의 다 쑥대밭이 되었다. 평양 등의 도시들은 벽돌과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마을들은 텅 비었으며 거대한 댐들은 더 이상 물을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동굴과 터널 속의 두더지 같은 생활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은 밝은 햇살 속에서 악몽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3대 강국이 한반도에 덤벼들었다. 한반도 충돌은 세계대전의 일보직전까지 다다랐으며 한국인들 앞에 핵파괴의 그림자까지 던져 주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953년에 끝난 이 전쟁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현상유지만이 회복되었을 따름이다. 몇 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전쟁의 휴전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우는 아이도 그치고, 팥으로 메주도 쑬 수 있는 '반공이데올로기'와 '빨갱이 콤플렉스'를 낳았다. 휴전은 전쟁의 긴장을 낳고, 전쟁의 긴장은 끊임없는 군비경쟁을 낳았다. 빨갱이 콤플렉스는 국가보안법을 낳았고, 국가 보안법은 최장기 양심수를 낳았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군사문화가 사회를 지배하게 했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핵전쟁의 그림자가 언제나 한반도 상공에 어른거리고 있다. 이 모든 기형적인 사회의 원죄는 휴전선에 있다.

   
▲ 호치민 작전이 시작되자 지레 겁을 먹은 남베트남군이 벗어 던지고 간 군화
베트남이 민족해방통일을 눈앞에 맞이하자 사이공의 한 아주머니는 이렇게 기쁨에 들떠 있었다.

『해방군이 사이공에 가까워졌을 때 우리는 남모르게 많은 해방깃발을 만들었어요. 티우 정권은 이 깃발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깃발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적·황·청 3종류의 천을 한꺼번에 사기만 해도 체포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깃발을 만드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지요. 우리 집 둘레에 이미 60여 명의 여성들이 각오를 다지고 모여 있었습니다.

4월 28일 탄손넛 공항이 폭격을 받았을 때 나는 라디오로 해방방송을 듣고 이제야말로 깃발을 게양할 때라고 생각해 사진관의 지붕에 해방기를 게양했습니다. 이웃에 있는 가정주부들도 일제히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라는 인류보편가치를 스스로 손으로 거머쥐었다. 이데올로기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휴전'과 '통일'은 사회를 이처럼 현격히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내란을 딛고" 자유를 지닌, 통일하고 당당한 한반도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는 베트남전쟁의 교훈에서 타산지석을 얻어야 할 것이다.

송필경(대구 범어연세치과)

송필경 논설위원  spk1008@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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