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정책 논설•시론
전태일 이후[시론]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송필경 전 공동대표
송필경 | 승인 2013.11.15 12:04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폭발적인 힘을 서서히 비축해온 쪽은 매우 다른 재야운동이었다. 1982년 미국 망명이 허용된 김대중이 나라 밖에 머물고 야당정치인들이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이제 대학과 유망한 장래를 뒤로하고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크나큰 개인적 희생을 무릅쓰고 산업노동의 현장에 취업하여 한창 성장하는 한국의 도시노동계급과 융합하고자 했는데, 그 결과 국가는 그...들은 ‘위장취업자’라고 불렀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까지 착한 심성으로 이상을 실천하려고 한 대학생이었다면 그들은 ‘위장취업자’이었다. 그들에게 전태일의 ‘자각적 외침’은 삶의 위대한 모범이었다. 대학생으로써 출세나 돈벌이 같은 공명에 집착하지 하지 않고 노동에서 싱싱한 삶을 배우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고난을 택했다.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가혹한 탄압 이외 달리 어떤 정책을 가지지 못한 전두환 체제가 양산한 급진주의자들이다. 이 급진주의자들은 ‘독재타도’와 ‘반미’의 강력한 해결책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찾았다. 급진주의는 정치적으로 언제나 사회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해왔다.

급진적이라는 것은 역사가 사회주의로 가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해 갖는 확신이다. 급진주의는 과거의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 버리고 역사를 단순하게 변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진전하도록 조절하는 진보주의 성향도 갖고 있다.

   
 

이들은 남한 사회에서 마르크스를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한 학생들은 곳곳에서 미국문화원을 불태웠다. 더 나아가 ‘강철 서신’의 주인공인 김영환은 북한의 ‘주체사상’의 전도사가 되어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퍼트렸다.

대표적인 두 부류인 ‘위장취업자’와 ‘강철 서신’의 추종자가 딱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었다. 위장취업하면서 사회주의를 배우고 드물게 ‘주체사상’까지 나아갔다. 또는 ‘주체사상’으로 무장하여 노동현장에 스며들어 육체노동을 진지하게 경험했다. 어쨌든 유토피아적인 열정을 가지고 이론과 실천을 서로 만나게 하려고 애썼다. 이들의 영향으로 순수한 노동자들도 이제 '자유와 평등‘이라는 급진적 사상에 대해 눈을 떴다.

인간은 자기행위의 정당성을 인식하기 위해 이론을 만든다. 이론이 현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진보적이거나 현실에 애착하는 보수적이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드는 토대가 되고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을 기대한다면 어떤 이론이든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인간은 시대에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똑같은 해답 즉 이론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였다. 묵자는 공자를 따르던 유학자지만 공자가 부담스러운 의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보수에 반발하여 급진적인 이론을 펼쳤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지만 스승의 급진적이고 이상론적인 공산주의 철학을 계승하지 않고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철학을 펼쳤다. 퇴계 이황이 이상주의적인 이론을 펼치자 고봉 기대승은 현실적 이론으로 퇴계를 반박하는 편지를 8년간 주고받으며 진지하고 격조 높은 토론을 벌였다.

 

이처럼 인류의 위대한 스승조차 동일한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식 서로 달랐다. 전두환의 파쇼를 묵인 내지 지원한 미국의 태도는 남한의 지식인에게 심한 굴종과 배반감을 느끼게 만들었다.『중국과 한국의 조공체제는 대수롭지 않은 서열의 체제, 평등을 아닐지라도 진정한 독립의 체제였다.

하지만 한국이 마주친 미국의 체제는 이와 반대로 허구적 평등과 실질적 예속의 체제였다.』(한국현대사에서) 지식인들은 미국이 가벼운 기침만 해도 우리가 심한 감기에 몸살을 앓는 체계를 극복할 해결 방안을 서로 다르게 모색했다.

‘남한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젊은이들은 피를 끓는 사투(사상투쟁)가 전개했다. 대표적인 이념 그룹을 굳이 따지자면 NL과 PD 였다. NL(Ntional Liberty)은 민족해방을 뜻하고 ‘자주파’라 했고, PD(People's Democratic)는 민중민주를 뜻하고 ‘평등파’라 했다.

NL은 남한 사회를 사실상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봉건적이고 ‘괴뢰’적이라고 규정했다. 남한의 모순은 분단모순에서 비롯한 것임으로 남한의 점령군인 미군이 철수하고 남북통일을 하루 속히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평등도 추구했지만 그보다 민족을 더 중요시했다. 민족이 우선이기에 북한을 많이 옹호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PD는 남한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남한의 모순은 계급모순에서 비롯한 것으로 파악했다. 남한에서도 생산수단을 사회화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자부했다. 때문에 주체사상과 북한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노동자 시인 박노해가 몸담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은 주체사상을 사회주의를 벗어난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 편향이라고 폄하했다.

이처럼 80년대 중반부터 남한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사회구성체(사구체) 논쟁이 불붙었다.
사회를 보는 관점에 따라 실천의 방향도 달랐다. 한 부류는 시위 만능주의를 지양하고 장기적 운동 역량의 강화를 주장했고, 다른 부류는 강력한 정치 투쟁을 지향했다.

이런 이론과 사상투쟁은 탁상공론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엘리트층 특유의 시시한 언쟁으로 볼썽사나운 모습을 띠기도 했다. 그러나 난해하거나 하잖게 보이는 이런 저런 논쟁은 사회가 고비에 처할수록 더욱 활기를 띠었고 이런 연후에만 사회의 실질적 문제들이 질서가 잡힌 것이 역사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논쟁(붕당지쟁朋黨之爭; 줄여서 당쟁)의 한 예가 송시열의 서인과 윤휴의 남인이 벌인 “예송禮訟(예절에 관한 논란)”이다.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服喪(상중에 상복을 입음)’을 송시열은 1년을, 윤휴는 3년을 주장하고 피터지게 싸웠다. 지금 시점으로 보면 ‘그까지 것’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한심하고 소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관점에서는 계모가 친아들이 아닌 왕의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는 지 그런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논쟁의 본질은 이런 자질구레한 예법을 빌미로 현실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치열한 물밑싸움 이었다.

당시 양반(사대부)들은 맏아들이 죽으면 그 어머니는 3년 상을 치르고 그 밖의 아들이 죽으면 1년 상을 치렀다. 왕이 죽으면 그 어머니는 3년 상을 치러야했다. 효종은 둘째 아들이었다. 서인의 송시열은 효종은 둘째 아들이므로 계모인 대비의 복은 양반들처럼 1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왕의 지위와 권능을 어느 정도 제한하고 양반들(사대부)이 더 많은 권한을 가지려고 한 것이다.

남인의 윤휴는 효종이 왕통을 이었으니 맏아들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대비의 복은 3년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양반보다 왕이 더 많은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년 설이 채택이 되어 서인이 득세하고 남인이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는다. 15년 뒤 다시 ‘예송’ 문제가 불거져 이때는 남인의 이론이 채택되어 서인 정권이 붕괴하였다. 조선시대 이념논쟁은 정치세력간의 주도권 문제로 귀결하는 붕당정치였다.

자주파(NL)과 평등파(PD)가 모여 민노당(민주노동당)을 만들어 진보정치의 싹을 틔웠지만 북한을 보는 관점의 문제(주사파와 종북문제)로 평등파가 민노당에서 분당하여 진보신당을 만든 것은 조선시대 붕당정치와 본질적으로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인간이 서로 자신의 행위를 자신의 눈으로 보아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논쟁이라 한다. 1980년대 사구체 논쟁에서 헛다리짚거나 헛소리거나 말다툼일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때 일어난 논쟁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약 7백년 간 거대한 동아시아를 지배한 세계사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주자의 이념을 중국보다 더 주자스럽게 조선은 의미 있게 완성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500년간 조선 사회를 지배한 이념이 송두리째 붕괴했다.

해방이 되자 남한 사회는 어떠한 사회적 이념도 없는 황무지였다. 그나마 주로 미국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소화하려는 아무런 노력도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에서 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반공만 고래고래 고함쳤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파쇼의 억압은 억압에 대한 반발로 미국의 가치가 아닌 사회주의 가치인 ‘평등’을 자라게 할 환경을 조성했다. 거칠고 조잡한 황무지에서 이념의 자생적 씨앗이 발아해 성장하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나 청소년이 갑자기 성장할 때 통증을 느낀다고 한다.

1980년대 사투(사상투쟁)는 창조적 고통이었나? 아니면 그들이 부르짖은 이론이 먹물들의 ‘허위의식’이었나?

사투를 한 지 30년이 지난 우리 사회는 그때보다 더 뻔뻔하게 진화한 수구기득권층이 진보의 흔적을 아예 지우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위대한 분신으로 산화한 지 43년 되는 날이다.
어디로 갈 건가, 우리 사회가?

   
 

 

송필경(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전 공동대표, 범어연세치과)

송필경  spk55@hanmail.net

<저작권자 © 건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송필경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상호명: (주)건치신문사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54길 21, 제1호 3층  |  대표전화 : 02)588-6946  |  팩스 : 02)588-6943
대표자: 전민용  |  청소년관리책임자: 윤은미  |  정보관리책임자 : 김철신  |  사업자등록번호 : 214-86-74634  |  발행인 : 전민용  |  편집인 : 김철신
Copyright © 2019 건치신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