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어찌 그리 갑자기 갑니까? 사람 놀래키는 일 같은 건 평생 안 하고 백살까지 허허실실 살 것 같던 양반이, 그것도 만인이 행복해야 할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우리 삶의 태도가 점점 각박해지고, 주변에 무심해져가는 데 경고라도 하고 싶었던 겁니까? 남은 우린 이제 대답 없는 물음만 삼켜야 하겠군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누님들 사이에서 자라서인지 형은 누구보다 자상했지요. 80년대 험한 세상을 함께 헤쳐오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을 터인데 형은 항상 웃었고 주변 구석구석을 배려했어요. 영등포에서 공단지역 진료를 할 때도 선배 누나 형들에게 귀염둥이였고, 지역의원 운영위원회를 할 때도 기발한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타나서는 힘들어하는 지역의원 실무자들에게 가장 의지가 되는 운영위원이기도 했습니다.
의료보험 통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일을 하면서는 겸손한 태도 속에 날카로운 논리가 정연했고, 안중에 개원하고 있으면서도 새벽까지 서울에서 온갖 궂은 회의들을 도맡아 다니곤 했지요. 건치 서경지부 회장 뿐만 아니라 보건의료운동에서의 연대사업, 평택지역에서 활동하는 많은 활동가들과 농민회 등 단체들에게는 형이 항상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어요.
특히 에바다 싸움의 말미에는 온갖 협박과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음에도 힘겹게 승리한 이후 재단정상화를 위해서 정말 무수히 많은 일들을 도맡아 했어요. 헤아려 보니 무려 13년 동안이나 에바다 이사장으로 새로운 에바다를 다시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을 했지요.
치과의사로서 누구보다도 실력과 인간미가 있었고, 원장으로서도 직원들에게 정말 좋은 분이었어요. 좋은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했고, 생각을 실천하는 데 게으른 적이 없었어요. 쉴새없이 진료하고 저녁마다 지역활동 등에 바빴지만 틈틈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동서고금을 넘나들면서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과 만나는 걸 너무도 행복해하였지요.
우리에게 좋기만 했던 당신의 덕행들이 본인에게는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는 삶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해 봅니다. 좀 쉬엄쉬엄 살지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하였는데, 노년에 같이 옛이야기 하면서 지낼 기약도 없이 이렇게 급작스레 가버리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구요?
하느님께서 급하게 당신이 필요하셨나 봅니다. 세상에 다시 보낼 아기예수를 예비하고자 형을 데려가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형의 많았던 꿈들, 천상에서 만들어지리라 믿습니다. 남은 우리도 사는 날까지 우리 함께 했던 일들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영정사진에서 너무도 해맑고 젊은 우리 바오로 형, 안녕히 가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