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얼굴을 갖지 못한 정부는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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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얼굴을 갖지 못한 정부는 필요없다
  • 김랑희
  • 승인 2014.04.29 11:5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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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랑희 인권활동가, '불온하고 위험한 인권이야기'

 

때때로 가까운 이들이 내게 나의 표정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너 또 이마에 주름 잡혔어.” 이 말은 내가 지금 못마땅한 감정이 얼굴로 드러나고 있다는 말이다. 팔자 눈썹의 표정을 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내가 억울해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내 얼굴이지만 표정은 나보다 남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얼굴로 드러나는지 남들이 얘기해줘야만 알 수 있다.

특히 표정을 잘 감추지 못하는 나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화끈거릴 때가 많다. 표정은 대부분 타인과 관계와 대화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표정이야 별문제가 없지만 안 좋은 표정은 설사 상대방 때문에 생긴 감정이라 할지라도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미안해진다.

한편 대화상대의 표정에 따라 내 표정이 닮아가기도 한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감정의 교류를 나누면 그의 표정이 나의 표정이 되기도 한다. 내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고 교감하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파악하기도 한다.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을 통해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챈다. 지난주 두 장의 사진,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의 얼굴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사진으로부터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감하지 못하는 얼굴은 남만 탓한다

첫 번째 사진은 대통령에 세월호 사고현장을 방문한 모습을 담은 것이다. 대통령의 수많은 사진 중에 한참을 쳐다보게 만든 사진은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실종된 학생의 엄마가 대통령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단상에 선 대통령이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사진은 내게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감정과 의문을 갖게 했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엄마의 호소가 내 귀에 들릴 것만 같은데 왜 대통령은 그녀의 모습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 느낌을 주는 것일까? 대통령은 그녀의 간절한 호소가 다 끝날 때까지 그렇게 듣고만 있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사진이 더 나왔을 테니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 앞에 같이 무릎을 꿇고 손이라도 잡아줬을 것 같은데 대통령은 왜 그렇게 내려다보고만 있을까? 대통령은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는 않는 걸까? 무릎까지 꿇고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한 엄마는 단상 위 대통령의 표정을 보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데 당시 언론은 대통령이 피해가족들을 위로해줬다고 보도했다. 무엇으로 어떻게 위로를 한 걸까? 위로란 진심으로 들으려는 자세와 공감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사람이 뉴스를 보면서 울었다. 신문기사만 읽어도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미안했다. 수많은 생명을 구해내지 못한 것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게 한 것이 우리의 책임처럼 느껴져서 미안했다. 참혹한 사고에 속수무책인 그런 세상을 만든 것 같아 이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죄스러웠다.

그런데 사고 현장에서 진심 어린 사과와 슬픔을 나누는 표정을 보여주지 않은 그 날 대통령은 ‘엄명’만을 내리고 갔다.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은 "대통령께서 현장으로 오셔서 엄명을 내리셨으니 오늘 오후 중으로 상황판을 설치해 가족들이 즉각적으로 정보를 알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장관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대통령의 엄명만을 기다렸나 보다. 대통령이 그랬듯이 장관도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애가 끓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것 같다.

윗사람의 엄명으로만 움직이는 정부이다 보니 당연히 구조활동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비판이 일자 대통령은 다시 말한다. "헌신적으로 근무하는 공무원들까지 불신하게 만드는, 자리보전을 위해 눈치만 보는 공무원들은 우리 정부에서는 반드시 퇴출시킬 것"이라며 "단계 단계별로 철저하게 규명해 무책임과 부조리, 잘못된 부분에 대해선 강력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리보전을 위핸 눈치만 보는’ 공무원은 왜 생겨났는지 대통령은 정녕 모른단 말인가? 아픔에 공감하는 태도로 책임지겠다는 대통령이 없는데, 명령과 눈치 보기에 익숙한 공무원들만 비난한다고 대통령의 책임을 다했다 할 것인가?

억울한 마음을 안고 청와대로 가겠다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대신 경찰을 동원하는 정부는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한 노력보다는 통제와 회피에 급급한 통치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4월 16일 이후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사람들에게 대통령은 어떤 표정을 보여줄 것인가?

외면하는 얼굴은 방패막을 동원한다

 

▲ ▲지난 20일, 고속버스를 타겠다는 장애인 활동가들을 향해 경찰이 최루액을 쏘려고 겨누고 있다. 출처 비마이너

두 번째 사진은 4월 20일을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고 선포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의 '희망 고속버스타기'를 진압하는 모습이다. 이날 경찰은 고속버스터미널에 참가자들이 들어서자 최루액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경찰이 우뚝 솟아올라서 장애인활동가를 향해 최루액을 정조준하고 있는 사진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그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때의 느낌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작년 5월 29일 대한문 앞에서 ‘꽃보다 집회’라는 이름의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집회 현수막을 채 걸기도 전에 경찰이 현수막을 탈취하면서 집회장소에 난입해 집회는 시작도 못하고 아수라장이 됐다. 그날 집회 사회를 맡았던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항의집회로 변한 집회를 진행해야 했다. 항의하는 사람들을 향해 경찰이 최루액을 쏘며 연행하기 시작했고 한 참가자가 경찰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진행을 하다말고 그를 놔주라고 외치는 순간 나를 조준하고 있는 경찰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를 조준하고 있는 그 모습이 섬뜩해 얼어붙었다. 그리고 바로 그 경찰은 정확히 내 얼굴을 향해 최루액을 쐈다. 최루액을 맞은 일이 처음도 아니었지만, 그 순간에 최루액을 맞으면서 내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굴욕적이고 비참했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정확히 나를 향해 발사된 최루액은 마치 내가 총구를 겨냥당하고 있는 적, 혹은 먹잇감처럼 느껴지게 했다.

4월 20일 이 사진 속의 경찰이 겨냥했던 그 누군가도 이 경찰과 눈이 마주쳤다면 나와 같은 감정이었을 것이다.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묵살되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된 그런 기분. 아니 어쩌면 그런 목소리 자체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저항하거나 방어하기도 쉽지 않은 장애인들이라는 것은 경찰의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그들이 왜 4월 20일에 고속버스를 타려 했는지는 더더욱 이해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경찰만이 아니라 경찰을 동원해 통제하고 제지하라고 명령을 내린 정부이다. 삶의 순간순간 장애물을 만나고 때때로 죽음의 위협이 닥치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에 최루액으로 대답하는 정부는 장애인의 삶을 외면하는 것이다.

 

▲ ▲고 송국현 씨의 영정 앞에서 복지부 장관에 대한 면담요청서가 불타고 있다. 출처 비마이너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며칠 앞두고 송국현씨가 화재를 피하지 못해 사망했다. 자립생활을 준비하며 미래를 설계하던 송국현씨에게 정부는 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는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 만큼 중증장애인이었지만 ‘장애 3급’이라는 이유로 활동보조서비스 신청 자격조차 없었다. 2012년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사이 화재로 사망한 고 김주영씨를 떠나보내며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고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지금까지 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또 한 명의 친구를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원통하고 분노스럽겠는가? 제도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다면 책임자는 응당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해야만 한다. 그러나 문형표 복지부 장관은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4월 20일 최루액을 맞은 장애인들은 사과를 받기 위해 찾아간 문형표 장관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다시 경찰에 의해 제지당했다. 문형표 장관은 대체 언제쯤 송국현씨의 영정 앞에 사과의 얼굴로 나타날 것인가?

두 얼굴은 닮았다

시민을 대하는 정부는 태도는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한결같았다. 자신의 자리에 부여된 책임에 대해서 외면하려 했다. ‘자리를 보전’하려는 것은 말단 공무원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자리를 보전’하려는 책임자는 사과의 말 대신 경찰을 동원하고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만 찾고 있다.

그 자리는 권세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보살피라고 있는 자리다. 사람에게 공감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는 얼굴이 있어야 하는 자리다. 사회구성원들의 고통과 아픔에 다가가지 않은 채 어떤 정책과 시스템이 사람의 삶을 돌보는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정책과 시스템 나아가 정부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의 삶은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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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양호 2014-04-30 10:38:39
세상에 마음 아픈일들이 너무 많습니다..그래서 요며칠 세상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습니다..반성해야 할 것 같습니다...세월호 희생자들과 고 송국현씨의 명복을 빕니다

전민용 2014-05-01 11:31:59
최루액을 사람에게 정조준하고 발사한 경찰은 증거 확보해서 고발해야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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