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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소름끼치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전민용이 만난 사람들]⑨연세대학교 치과대학 구강병리학교실 김진 교수…“참선‧땡시험‧건치 좋아해”
윤은미 기자 | 승인 2014.11.24 01:46

 

치과계의 이색인물을 만나고 있는 본지의 기획인터뷰 ‘전민용이 만난 사람들’이 이번엔 여치들의 우상, 김진 교수(연세대 치과대학)를 만났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구강병리학자로, 1978년 연세 치대를 졸업한 그는 모교에 구강병리학교실을 세우고 구강종양연구소 소장으로서 동남아시아 지역 구강암 발병 예방을 위해 힘써왔다. 10여 년 전에는 건치 최초 여성 공동대표로 선출돼 활약하기도 했다.

‘소름끼치게 좋아하는 일’이 아니면 잘 하지 않는다는 김 교수. 그는 병리학 ‘땡시험’을 눈물 날 정도로 좋아했고, 참선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스스로를 ‘자칭 왕따’라 했지만, 소름끼치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줄곧 함께해 왔다. 기초치의학 발전을 위해 연구소를 세울 때도, 스리랑카라는 황무지 진료봉사 현장을 개척할 때도 그를 돕는 사람들이 늘 곁을 따랐기 때문이다.

불강등(佛講燈 부처님 가르침의 등불)이라는 법명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며 살고 싶다는 김 교수님의 학교 밖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 본지 전민용 대표이사가 김진 교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불교는 언어도단…참선이 가장 빠른 해탈의 길
자비는 “우주만물을 생명체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
불교의 땅 ‘스리랑카’와의 인연까지 이어져

- 아까 식전에 불교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불교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뭔가 심오함이 있는 것 같아요.

“난 주변에서 그런 질문도 종종 들었어요. 김 선생 같은 사람이 왜 불교를 믿느냐. 무식한 사람들이나 믿는 걸. 이런 얘기들이요. 뭐라고 답해줘야 할지 몰랐죠. 그런 환경 속에서 수십년을 버텨온 거예요”(웃음)

- 불교가 무식하단 말들이 나오는 건, 기독교가 서구문명을 받았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일 거예요. 또 목사들의 경우엔 신학대학을 거치지만, 우리나라에선 스님들이 대학을 나오거나 한 경우가 많지 않아서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경향도 있어요.

“맞아요. 나도 불교에 대해서는 무식해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불교가 생활화 돼 있을 뿐이지, 체계적으로 지식을 쌓은 적은 없죠. 그리고 불교에서 가르치는 진리가 언어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것도 있어요. 언어도단이란 말도 불교에서 나온 거잖아요. 오죽하면 큰스님들이 돌아가시면서 ‘일생을 거짓말을 했다’고 하시겠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가르치는 거죠. 그래서 불교 언어를 읽는 걸 싫어했고, 또 읽어도 이해가 안 됐어요. 그러다 불교책을 영어로 보니까 그제야 이해가 되더라고요. 우리가 보는 책은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걸 다시 한글로 옮긴 거죠. 하지만 영어는 한 단계를 거쳤으니 훨씬 근본에 가까워요. 이를테면, 고집멸도라는 불교용어가 있잖아요. 삶은 고통이고, 그건 집착으로부터 오고, 그걸 멸해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그 ‘고(苦)’가 영어로 suffering이고, pain이라는 거예요. 웃기지 않아요? 치통도 아픈 거고 생리통도 아픈 건데, 그까짓 게 뭐라고 수십년을 수련해서 그걸 깨달았겠어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고’는 existence, 삶 그 자체예요. 그 ‘고’라는 단어는 철학적인 단어죠. 그걸 영어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니까요. ‘philosophy가 맞구나’라는 걸 알았죠. 그전에는 아무런 학문적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그러다 2010년 안식년을 내고 참선을 하게 됐는데, 책을 못 읽게 하더라고요. 언어에 집착을 하게 되면 참선을 깊이 못 들어간다고요.

- 참선은 어떻게 하세요? 그냥 앉아서 (묵상)하시는 건가요?

“네. 졸면 죽비도 때리고..”

- 그것도 일종의 suffering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게 체질에 맞나 봐요. 해탈에 이르는 길도 다양해요. 독경을 하거나, 삼천배, 만배를 하는 방법도 있죠. 자기를 내려놓는 작업이에요. 자신이 없어질 때까지 하죠. 참선은 나를 내려놓는데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래요. 그런데, 아무나 하면 안 돼요. 참선을 잘못하면 아상이 깊어지거든요. 더 자기 고집이 세지고, 자신을 내세우게 되죠. 진짜는 자신을 내려놓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제가 (참선)하는 동안 가장 궁금했던 건, 자비는 어디서 오냐는 거였어요. 동물이나 식물조차도 생명의 근본은 다 똑같다고 보는 거잖아요. 우주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라고 보는 거죠. 그걸 알게 되면, 정말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자비가 나오게 되는 거 같아요”

- 윤회설을 믿으세요? 윤회에서도 식물은 빼잖아요. 식물은 일종의 혼이 없다고 보는 거 아닌가요?

“윤회를 그렇게 본다면 빠지는 거지만, 생명의 근본에서는 식물도 살아있다고 본다는 거죠”

- 어렸을 때부터 불교가 체화돼있어서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거 같은데요. 살면서 이건 정말 불교의 영향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구강암 연구하는 나라를 선택할 때 스리랑카를 선택한 건 다분히 불교적인 영향이었던 거 같아요. 한 번 갔을 때 너무 좋았고, 돕고 싶었어요. 불교국가가 아니라면 그렇게 지속적으로 끌리진 않았을 거 같아요”

- 언제 거기 구강암 연구소를 만드신거죠?

“2013년 4월이요. 2005년도 12월에 9년짜리 구강암 연구비를 받고, 해마다 국제심포지엄을 했어요. 첫 심포지엄에서 여러 나라를 초청했죠. 치과대학에서 암연구소를 한다는 건 전혀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초기 구강암을 예방하는데 포커스를 맞추겠다는 입장이었어요. 구강암이 많은 지역을 잡아야 했죠. 인도, 스리랑카 여러나라가 다 왔는데, 각 나라와 연결점을 찾다보니 그게 잘 된 것도 스리랑카였고, 마침 그때 참석했던 교수가 교환학생을 보내주면서 교류가 지속되게 됐어요”

- 그게 시작이 돼서 이번이 스리랑카 봉사활동까지 하시게 됐군요.

“우리나라가 그래도 아직 괜찮은 나라인 게, 무턱대고 찾아가면 다들 도와주는 거예요. 무작정 CT를 만드는 회사를 찾아갔는데, 회장이 흔쾌히 기증을 해주는 거예요. 이번에도 건치신문이 나서면서 여러 도움을 받았죠.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도울 수 있었어요. 도와주신 분들이 대단한 거죠”


부모님에 물려받은 예술성과 철학관 접어두고
공부 좋아 선택한 기초학에 무급 1+1년 버텼다
정년 후엔 ‘Slow life-Movement’ 추구할 것

- 성장환경이 좀 남다르셨던 거 같아요. 부모님이 절과 무슨 관계가 있으셨나요?

“아뇨. 고모님이 절에서 지내는 보살님이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땐 절에 맡겨져 거기서 자리기도 했고요”

- 아버님도 예술가이셨던 걸로 알고 있어요.

"추상화를 그리셨어요“

- 어렸을 때부터 불교적인 문화와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환경에서 자라셨겠네요.

“피에 섞여있겠죠. 초등학교 1,2,3학년 때는 그림도 많이 그렸고 상도 타고 그랬어요. 그런데 4학년 때부터 엄마가 그림을 못 그리게 했어요. 아버님이 돈을 안 버셨거든요”(웃음)

- 어렸을 때 그럼 좀 힘드셨겠어요.

“어렸을 땐 그래도 힘든 걸 잘 몰랐어요. 우리 아버진 피카소보단 좀 덜 비도덕적이달까? 그렇지만 다른 예술가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어요. 가정보단 자신의 예술세계가 더 중요한 그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중학생 때부턴 좀 고생을 했죠. 대학 때는 장학금을 안 받으면 대학을 못 다닐 처지였어요. 그래서 더 공부를 열심히 했죠. 그런데 학교에서 장학금을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나도 (장학금이 없으면) 학교 못 다닐 지경이라고 했죠.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어렵게 생활했단 걸 잘 몰라요. 학교 다녀오면 어렸을 때부터 리어카 끌고 배추, 쌀 배달하면서 살았아요”

- 지금이라도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그런데 이제 정년이 4년 정도 남았거든요. 그래서 정년 후의 삶을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우리 학생 때는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비난의 대상이었잖아요. 노동운동도 하고, 감옥도 가고 그래야 정상인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랬지만, 전 너무 공부가 좋았거든요. 그런데 너무 한 곳만 보고 살아온 거예요. 하고 싶은 일들을 다 가지 치면서 살아왔죠. 그래서 정년 후를 더 많이 고민해요. 제 숙제예요”

- 치과대학을 선택한 건 잘 하신 선택이었나요?

“그건 어렸을 때부터 세뇌된 거였어요. 공부 잘하면 의학박사가 되라던 시절이니까요. 고3때 제2지망에 의대 아니면 치대라고 썼어요. 그런데 2지망이 된 거죠”

- 치과로 오면 1차적으로 개원을 생각하지 않나요? 학번이...

“72학번이요”

- 제가 82학번이니까. 딱 10년 차이네요. 저보다 10년 전이면, 개원을 하면 돈을 더 잘 벌 수 있을 시기였는데요.

“돈에 관심이 없었어요. 사고방식이 좀 특이해요. 네 땅, 내 땅 하는 것도 아직도 이해가 안가요. 땅은 그냥 땅일 뿐인데, 이 금 그은 건 뭐지? 하는 거예요. 돈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 뿐더러, 그냥 공부를 실컷 해보는 게 제 소원이었어요”

- 공부를 더 많이 하기 위해서 기초로 들어가신 거군요.

“임상을 하고 싶진 않았고, 뭐가 가장 재밌었나 고민해보니 병리학과 생리학이었는데, 열심히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병리학이었어요. 그 고민은 굉장히 쉬웠어요. 본과 2학년 때 병리학 땡시험을 보고 나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앞으로 더 이상 (병리학)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요. 그만큼 재밌었고, 좋아했어요”

-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라 고생도 좀 하셨죠?

“네. 병리학을 선택하고부턴 고생길이었어요. 돈을 못 벌었거든요. 치과대학에서는 의과로 들어갔으니 월급을 안주고, 의과대학에서는 치과대학 출신이라고 월급을 안 줬죠. 1년 동안 월급 없이 버텼어요. 환자도 못 봤어요. 1년 후에 주임교수님이 의대 졸업생들이랑 똑같이 해주셨어요. 형사도 막아주셨어요. 그 때 당시에 대학생들 감시하는 형사가 있었잖아요.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들과 친하다는 이유로 찍혔거든요. 우리 교수님을 찾아와서 왜 저런 애를 조교로 쓰느냐고 할 때마다 교수님이 막아주셨어요. 그런데 그 담당형사가 나중엔 의료원에 총무부장이 됐어요. 우리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세상에 살았죠”

- 그렇게 의대 병리학 교실에 계시다가, 치대에 병리학 교실을 만드신 거군요.

“처음엔 치대에서 안받아줬죠. 그러니까 의대에서 치대 병리학 수업을 다 보이콧했어요. 저를 받아줄 때까지. 할 수 없이 시간 강사로 받아줬어요. 또 월급 없이, 시간강사 수업료만 받고요. 그러다 교수가 되긴 됐는데, 병리학교실을 안 만들어줘서 그걸 만드는데 10년이 걸렸어요. 남녀불평등에, 임상도 아닌 기초전공까지. 모든 악조건을 다 가지고 있었죠. 제가 1년 동안 월급 못 받고 고생한 걸 아는 동료들이 교실 후원회를 만들어줬죠. 그것도 혜택이었죠”(웃음)

-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길을 꿋꿋이 걸어가면 일이 이뤄진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네요.

“교실이 생겼는데도, 연구소를 또 안 만들어줬어요. 암연구소를 만들려고 했더니, 연세의료원에 암연구소가 있어서 또 걸린 거예요. 소장이 또 의대 총장이었거든요. 반대가 컸죠. 또 싸워서 만들었죠. 나쁜 의미의 싸움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힘이 들었죠”

-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으세요?

“후회되는 건 없어요. 교수들 중에도 연구비도 안타고 강의만 한다고 해서 교수 아니랄 사람은 없었거든요. 어려움이 있을수록 그래 내가 더 잘할 거야라는 마음을 먹게 됐거든요. 쉽게 됐다면, 다른 교실보다 더 훌륭한 교실을 만들겠다는 오기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다보니 읽고 싶은 책도 못 읽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이 포기하고 그런 건 있었죠”

- 정년 후 준비하고 있는 건 있으세요?

“오피스텔을 알아보고 있어요. 거기서 혼자 하는 일이어도 좋고, 마음 맞으면 같이 하는 일이어도 좋죠. ‘Slow life-Movement’로 시작하면 어떨까 해요. 불교 공부 모임을 해도 되고, 스리랑카를 지원하는 일을 해도 좋고, 뭘 갖다 붙여도 Slow life-Movement는 다 통하니까요. 오피스텔을 얻어서 그 활동 장소로 삼고, 뭐든 시작하려 해요”


사랑은 물거품 같은 것…“사람은 믿지만 남자론 아냐”
기초학 선택하는 제자들 늘어…‘창의력 학습’ 큰 과제
학교 생활로 포기한 국악…“우리 것이 좋아”

- 지금 비혼이신 건가요. 미혼이신 건가요?

“미혼이요. 그런데 비혼이랑 미혼이 뭐가 다른가요?”

- 미혼은 혼인 할 수 있는데 안 한 거고, 비혼은 결혼을 안 하려고 한 거고, 그 차이죠.

“글쎄. 그건 어느 쪽인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결혼이 좋은 거란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우리 아버질 보면, 결혼은 정말 이기적인 거란 생각을 했거든요. 사랑도 믿지 않았어요. 바다가 있고, 파도가 있으면 사랑은 물거품 같은 거라 생각했어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있는데, 사랑은 일종의 환상 같은 거라는 생각이죠. 그 느낌 때문에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을 해야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인간에 대한 신뢰는 있지만 남자에 대한 신뢰는 없는 거예요. 우리 아버질 보면서 그런 생각이 생긴 것 같아요”

   
▲ 김진 교수
- 그럼 남자를 한 번도 사랑해보신 적이 없으세요?

“연애감정을 느껴본 적은 많죠. 그런데 죽을 듯이 사랑해보거나 그런 적은 없어요. 연애도 해봤죠. 쫓아다니는 남자들도 있었고요. 그렇다고 뭔갈 무릅쓰고 결혼까지 갈 만큼 그런 상황은 없었어요”

- 그럼 교수님은 뭘 할 때 가장 행복하세요?

“참선할 때. 너무나 행복해요. 집에서도 참선해요. 따로 방이 있을 정도에요”

- 혼자 놀기를 굉장히 잘 하시는 군요.(웃음)

“좋아해요. 옛날부터 혼자놀기를 좋아했어요. 사람 만나는 것을 피곤해 해요”

-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밥 먹고 대화하고 이런 걸 통해서 행복을 느끼잖아요.

“전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게 즐겁지가 않아요. 사람들과 안 어울리죠. 너무 행복해 눈물이 날 지경이다 하는 건 참선할 때죠”

- 참선이랑 병리학 땡시를 보실 때가 가장 행복한 거네요.(웃음)

“그러니까요. 너무 이상한 사람이죠.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요. 남들이랑 노는 게 피곤해요. 그래서 들어가서 자는 거예요. 재밌으면 자지 않죠”

- 그런데, 사람들은 싫어도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고 싫은 자리에 가서 앉아 있고, 그래서 불행한 거잖아요.

"난 그걸 안 해요. 내가 원해서 하는 왕따놀이를 많이 하죠“

- 그런데도 선생님을 좋아하는 여선생님들이 아주 많아요. 건치에서만 봐도 그렇잖아요.

“나 같이 이상한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 만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그런 사람인데”

- 개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후배들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으세요? 요즘 기초 전공자도 많이 줄고 있죠?

“다시 좀 늘어나는 것 같아요. 치과계 경기가 하향세로 접어드니까 다시 기초하는 사람이 늘더라고요. 일단 치과대학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요즘은 부모님이나 본인의 생활권도 안정돼 있고 하다 보니 부모님도 기초 전공에 대해 반대를 하지 않고, 본인도 리스크를 느끼지 않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또 한계가 되기도 해요. 기초를 하려면 창의력이 있어야 하거든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여기까지 온 애들은 창의력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 연구를 할 수가 없죠. 그냥 시키는 일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학생들 창의력을 개발시켜주는 게 가장 큰 과제예요. 누구나 창의력은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잠재력을 어떻게 개발하느냐가 문제거든요. 원천적으로 그게 차단된 애들은 일깨워주기가 어렵지만, 창의력도 일종의 훈련이라 키울 순 있어요. 단, 스스로 잘 판단해서 들어와야 해요. 그래야 자신한테 맞으니까 행복하기도 하고요”

- 취미로 판소리나 국악 같은 것도 하지 않으셨어요?

“연구를 많이 맡으면서 다 접게 됐어요. 요즘 다시 시작하려고 하죠. 단소와 판소리를 했었어요.

- 어떻게 국악을 시작하셨어요?

“처음 유학을 다녀와서, 우리가 한국적인 걸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전에 한국 ‘가면극의 미학’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굉장히 감동을 받았거든요. 우리가 음악시간에 국악이나 우리예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하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잖아요. 서양음악 산타루치아나 배웠지 언제 국악을 배운 적이 있나요. 어느 나라의 문화든 그게 높낮이는 없지만, 우리나라 춤과 서양 춤이 가지는 차이점 같은데서 감동을 받았어요. 처음엔 판소리를 배우고 싶었는데, 어렵다고 해서 시작한 게 단소였죠. 단소를 3년을 배우고 나니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관악단에 들어가란 제의를 받았는데,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시간을 더 뺄 순 없어서 단소를 접고 이제 판소리를 시작했어요. 판소리도 3년을 하고 나니 스승님과 같이 폭포에 가자고 하는 단계가 온 거예요. 그건 또 일주일씩 시간을 내야 하는데, 그렇게는 학교 생활을 할 수 없으니 우선순위인 학교를 위해서 포기했죠”

- 예술적인 재능이 있으신가 봐요.

“재능이 아니라 좋아하는 거예요. 판소리나 단소 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아요. 선생님도 내 귀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 소름이 끼칠 정도로 좋기가 힘든데요. 병리땡 시험 전에 그 소름이 돋았다면, 치대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네요. 뭔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건 부럽네요. 아주 잘 타고 나셨어요. 아버지한테 예술적인 감성을 많이 받으신 것 같은데요. 그런데 남성에 대한 불신 같은 건 스스로 극복하길 바라셨을 것 같아요.

“인간으론 다 신뢰하지만, 개인적인 남성으로 본다면 신뢰하지 않는 거죠”

- 물론 정신과 육체가 같이 가는 것이 좋겠지만, 서양에서 보면 육체적인 사랑만도 하잖아요.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으로 보기도 하고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요. 도덕적으로 넘어서지 못하는 것도 있겠죠”

- 정년 후 계획에 그걸 넘어서는 것도 한 번 넣어보시는 게 어떨까요.(웃음) 내가 넘어서지 못하는 걸 버킷리스트에 넣는 거죠.

“(웃음) 맞아요. 그렇겠네요”


가장 소외된 여성 돕고 싶어 ‘위안부 사업’ 시작
‘힐링센터 설립’ 목표…“정년 후 대중 위해 살고파”
‘건치’ 있어 치과계 위상 제고…“미안하고 고마웠다”

- 성평등이나 여성인권에 대해서도 의식이 있으시잖아요. 관련 활동도 하셨는데, 위안부 관련 이야기는 이따 하고, 서여치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대학에 있으면서 회무 활동은 잘 안했어요. 위안부 사업도 서여치 활동을 하면서 같이 시작하게 된 거죠. 치과의사협회에서도 여성이사라는 자리가 있었는데,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그 때 난 여성이사로는 일을 안 한다고 했었죠. 정식 이사 명칭을 주고, 예산이 주어지는 자리라면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뭘로 하겠냐고 다시 묻길래, 내가 문화복지이사 자리를 달라고 했어요. 서여치를 맡게 된 것도 이번 차례가 연대가 할 순번인데, 내 주변 여성동기들이 마침 다 자녀가 고3이고 그래서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또 맡게 됐죠.

- 위안부 사업은요?

“그 때 당시에도 서여치라 하면,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혜택을 받은 여성들이 모인 곳이잖아요. 이왕 내가 서여치를 맡는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일 하고 싶단 생각에서 위안부 사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게 한 15년? 20년쯤 이어지다가 다행히 잘 끝났어요. 여성부에서 위안부 사업을 이관해가면서 우리 모임은 잘 끝났어요. 이제 6개월에 한 번씩 그 멤버가 만나서 인문학 강의를 들으면서 모임은 이어오고 있어요. 건치 신순희, 곽정민, 송화수 등이 함께 해왔어요. 대단한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 아니었으면, 전 못했을 거예요.

- 영화나 책은 좋아하세요? 최근엔 ‘나를 찾아서’라는 영화가 꽤 재밌던데, 흔히 요즘 싸이코패스가 등장하는 영화였어요. 결말이 좀 찝찝하게 끝났어요.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게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가는 게 있어요. 내가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가능만 하다면 정년퇴임 후엔 힐링센터를 하나 만들고 싶어요. 정년이 되면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이것도 Slow life-Movement 안에 담을 수 있죠. 그동안은 학생들을 위해서, 학교를 위해서 일을 했다면, 앞으론 좀 더 대중을 위해서 살고 싶어요”

- 들으면 들을수록 김진 교수님은 결혼을 했더라면, 이 많은 일들을 다 못했을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넌 결혼을 했다면 애를 잡았을 거라고요. 네 학생들도 네 밑에서 공부를 하자니 너무 불쌍하다고 하셨어요”(웃음)

- 학생들이 실제로 힘들어 하나요? 공부를 많이 시키시는 편인가 봐요.

“거의 대학원생들은 내 앞에서 안 울고 졸업한 애들이 없을 정도에요”

- 제가 아까 그런 질문을 드린 건, 결혼을 하셨더라면 어쩌면 육아로 쏟아졌을지 모를 에너지가 다양하게 분출된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였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이를 키우고 살았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곤 말 할 순 없는 것 같아요. 예전에 우연히 내 동생이 자기 아들한테 쓴 편지를 봤는데, 그 내용 중에 내 동생이 자기 아들을 보면 가슴이 꽉 찬다는 거예요. 우리 엄마도 나를 봤을 때 가슴이 가득 찼겠구나 싶었어요. 그 편지를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봤더라면, 좀 더 잘 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했죠. 그러고나니 나는 한 부분이 불완전한 존재구나 하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아무리 좋은 논문을 쓰고, 훌륭한 일을 한다한들 가슴이 가득 차는 일은 없을 것 같거든요”

- 그건 동생분의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어요. 부모, 자식간이 꼭 다 그렇진 않거든요. 일단 저부터도 꽉찬 느낌은 아직 모르겠어요.(웃음) 일반화시킬 얘기는 아닌 것 같다고요. 참, 건치 대표를 맡으셨을 때 소감도 한 번 여쭤보고 싶어요.

“미안했죠. 건치 활동할 때 건치 회원으로서 열심히 한 게 없어요. 회장으로서 정말 중요한 일만 했죠. 오히려 회원으로서 내가 듣고 싶은 강연이나 들으러 가고 그랬는데, 갑자기 공동대표를 시켜서 굉장히 미안했어요. 그래도 치과계에 건치가 있어서 대한민국에서 치과의사의 위상을 세우는데 한몫 했다고 생각해요”

- 네. 여러 가지로 감사합니다.

“나도 감사해요. 재밌는 자리에 초대해주셔서요. 옛날 얘기도 하고 즐거웠어요. 결혼 얘기도 하고, 이제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보는 사람도 없거든요.(웃음) 생전 안 해본 얘기까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재밌었어요”

윤은미 기자  yem@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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