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힘들고, 가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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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힘들고, 가끔 즐겁다"
  • 정준오
  • 승인 2014.12.1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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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part 2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 여행기 다섯 번째 이야기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여행에세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 중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정준오 astonut@naver.com

안나푸르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포카라’라는 도시로 가야 한다. 카트만두에서 버스를 타고 포카라까지 가는 길은 일곱 시간의 장정. 바퀴가 굴러가는 곳마다 스쳐가는 모든 풍경이 운치가 있었다.

문화재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닦아내어 만든 문화재가 아니라, 곳곳에 숨어있는 진귀한 풍경들과 다양한 네팔리들의 모습을 만나며 살아있는 네팔을 만나는 듯 한 느낌. 비행기 대신 버스 타길 잘했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하지만 일곱 시간 동안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 것은 네팔의 속살 같은 풍경들이 아니라 좁은 도로에서 평균시속 100km을 자랑하던 박진감 넘치는 총알 미니버스. 마치 청룡열차 같던 이 낡은 봉고차에 마주 오는 차들도 풍경을 가로막고는 불과 몇cm 거리를 두고 질주했다. 거의 모든 길에 중앙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데, 왜 굽은 길에서 자꾸 추월을 하는지. 내가 할 수 있던 일은 손잡이를 계속 부여잡는 것 뿐.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에는 포터와 가이드를 대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포터와 가이드들은 그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트레커는 짐을 조금 덜어 행복을 크게 만드는 것이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에도 짐을 들어주는 포터와 안내를 도맡는 가이드 제도가 있어서, 그들을 고용해야만 입산이 허락된다지만 히말라야 입산에는 포터나 가이드 동행이 의무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빠듯한 일정에 길을 헤매지 않기 위해서라도 포터를 고용하기로 했다. 실은 짐을 드는 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가이드가 더 필요했지만 포터 비용이 조금 더 저렴했다. 말이 없는 포터라도 적어도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여행사로부터 소개 받은 ‘밀란’은 영어를 잘 했다. 그는 가이드를 해 왔고, 포터로는 내가 첫 게스트라고 한다. 알고 보니 여행사 형제의 조카. 아담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체구의 스무살 청년이다. 내 배낭이 여느 트레커보다는 무겁지 않은 것을 안 그의 삼촌이 그에게 추천해 주었으리라. 가족이라니 신뢰는 갔는데, 안쓰러운 마음도 생겼다.

포카라에서 트레킹이 시작되는 나야풀(해발 1070m)까지는 45km. 한 시간 걸린다는 택시는 덜 포장된 산길이어서 카트만두에서 포카라로 달리던 청룡버스처럼 신나게 달리지는 못했다. 나야풀에서부터 나는 밀란의 작은 가방을, 그는 나의 훨씬 무거운 배낭을 지고 걷기로 했다. 적어도 열흘은 그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이니까, 산속에서는 그의 코스선택, 로지 결정 등 모든 판단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걷기를 시작하면서 밀란이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며 “우리는 친구”라고 말을 붙였다. 나는 그에게 “우리는 이미 가족이야.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거야”라고 말했다.

트레킹하며 머물던 로지(lodge)마다 포터나 가이드들이 서빙을 하고 일도 돕기에 그들이 식사를 얻어먹는 대신 일하는 건가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오로지 각자 맡은 트레커를 위한 것이었다. 항상 외국인 여행자들이 식사를 마친 후에서야 포터와 가이드들이 모여 식사를 하곤 했다. 사회생활 경험이 적은 나는 갑을 관계도 생소한데, 이런 신분의 차이를 오감으로 느끼게 하는 체험은 이상야릇했다.

여행 나온 나와 히말라야에 여행 온 외국인을 돕는 이 친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지갑에 든 것들을 제외하면 그와 이러한 계약으로 관계를 규정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과 일을 존중하기 위해서. 인간적으로 과도한 짐은 맡기지 않되, 적어도 그와 나를 만나게 한 관계의 중요한 의미를 흐리지 않기로 한 거다. 미안함과 불편함 때문에 그와 내가 만난 이유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첫 TIMS 체크 포인트를 지나고 한참 걸으면서도 내가 10살 가까이 어린 동생을 고용해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는 더 많은 것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서, 저 친구와는 다르다고 나를 세뇌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덜 미안하게.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저 같은 길을 걷는 동행이라는 생각과, 내 배경을 채워주는 내 가족과 나라가 참 고맙다는 감상이 공존했다.

 
 

산속의 풍경은 애쓰지 않아도 쉽게 그 자리에 어울리도록 젖어 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이어진 멋진 풍경들을 지나 첫날 묵게 된 쉼터, 티게둥가의 로지에서 주인과 친하다며 밀란이 커피와 밀크티를 몰래 떠다 준다.

내일 머물 곳도 아는 곳인데, 무엇보다 그 로지 여주인이 자신의 지인을 짝사랑하기 때문에 디스카운트가 더 쉽다고 알려 준다. 돈이 곧 힘인데, 그 돈을 좌지우지 하는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힘이 아닌가!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산에 뭐가 더 필요한 게 있냐고, 심플한 것이 썩 마음에 든다고 말했더니 그 말 좋다고 했다.

로지는 자주 정전이 되었고, 그럴 때면 맥주병을 이용한 촛불이 금방 만들어져 나온다. 식사하려 모인 레스토랑에는 프랑스, 독일 등에서 단체로 온 어르신들이 많았다. 한결 같이 밝고, 감사 표현도 적극적이다. 식사는 우리 돈 4,000원에 배 터지도록 먹을 수 있다. 유럽에서 온 어르신들도 수프와 피자 라이스를 시키고는 그 양에 감탄했다.

‘닛삼 삐리리’라는 노래와 함께 댄스파티도 벌어졌다. ‘사람들이 아직 덜 힘든 게지’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흥겹게 이 밤의 끝을 잡던 사람들은 이제 하산하는 길. 눈을 붙이려 방으로 들어왔을 때는 커다란 검은 개가 빨간 눈을 반짝이며 아주 편안한 자세로 방에 들어앉아 있어서 놀랐다. 제 집인 양.

하긴, 내가 잠시 빌려 쓰는 것인지도 모르지.

깊은 산속 멋진 공간, 여유로운 사람들 틈에서 밤이 지나가는 동안, 온통 에베레스트만 생각하느라 거들떠보지도 않던 안나푸르나 지도가 점점 머릿속에도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나푸르나는 ‘풍요의 여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름이 어땠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저 들이마시는 공기조차 좋았다.

칼라파타르에 올라 에베레스트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을 실감했던 순간부터, ‘세계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것, 8000m에서 조금 더 높은 것, 그거 사람이 정하고 잰 거라 굳이 의미 붙이기 좋아하는 누군가가 만든 환상 속에 있는 대상은 아닐까? 그 이름과 명예가 전부인 곳은 아닐까?’라며 그 의미를 깎아내리려 했던 나를 깨달았다.

그리고 소름이 돋았다. 가지지 못하고 가보지 않았다고 그곳에 의미를 얕잡아 보는 비열함이란! 순전히 내 의지로 가지 않았으면서도. 사람이 정했든 어쨌든 가슴 속에 그것은 여전히 로망이고 꿈이었는데도. 소름 돋은 순간부터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대단하고 위대한 것을 인정하면서 내 길을 사랑하는 것, 그게 더 편한 방법이라는 것을 산이 나를 가만 품고 있던 순간에 깨달았다.

다시는 이런 여행도 이런 길도 없을 것이다. 다음엔 다시 어떻게 해 보아야지 해도 꼭 그럴 수는 없다. 같은 길을 오더라도 나는 다른 시간의 다른 나일 것이고 주변의 많은 것도 달라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걷는 길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

간밤엔 역시 별이 쏟아졌고, 내가 흔들리는 것인지 별이 흔들리는 것인지 여하간 별들은 분명히 춤추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둘째 날, 안나푸르나 남봉과 생선의 꼬리를 닮아 마차푸차레라는 이름을 가진 설산이 보이기 시작하는 감동! 오르는 길이 많았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걸음마다 ‘fantastic’, ‘very nice’, ‘good’ 말하는 횟수가 늘어간다. 걸음을 내딛는 곳마다 절경이었다. 걷다보니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을 느꼈다.

어깨가 저리고 발목이 힘겨워하는 순간에도 정신은 맑다. 나무의 향기도 구름을 맞는 느낌도 그대로 선물이었다. 지나는 길목마다, 땀 흘리는 많은 순간마다 이렇게 살아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그래서 짐을 덜어주는 밀란이 더 고마웠다. 조금 더 가벼운 몸으로 조금 더 이곳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돈으로만 살 수 없는 거니까.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하며 수많은 트레커들과 ‘나마스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동물모자와 함께 대학 때 활동했던 MTB 동아리 저지를 입고 다닌 덕분에 알아보는 한국 사람들이 늘어갔다. 혼자여서 작은 관심이 더 감사하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 있을 때 가장 사람다운 법. 가족끼리, 친구들끼리, 연인 둘이, 가이드를 대동하고 혼자 온 사람들, 여행사나 산악회 등을 통해 단체로 온 한국 여행자들도 많이 보였다. 혼자 트레킹 온 것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함께 걷는 사람들도 부러웠다. 저마다의 페이스를 존중하며 발걸음 맞추어 걷거나. 로지에서 만나자 약속하고 자신의 속도로 걷거나 등반이 금지되어 있는 신성한 산 마차푸차레.

 

6993M, 7M가 모자라 7000m급 고봉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이 안쓰럽다. 그래서 처음부터 왠지 정이 갔다. 나도 진짜 멋진 산인데, 사람들은 나를 최고로 부르지 않는다고, 그래도 나는 내 자리에서 우뚝 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처음 본 설산은 안나푸르나 남봉이었지만, 그보다 가슴에 먼저 들어온 친구.

이튿날 밤을 묵을 곳은 창밖으로 마차푸차레가 보여, 설산을 처음 만난 하루의 감동을 길게 늘려 주었던 전망이 좋은 고레파니(2874m)의 로지. 고레파니에서만 머물다가 새벽 푼힐 전망대(3210m)에 올라 일출을 감상하고 하산하는 3박4일 코스도 있다. 물론 난방이 안 되어 있고 밤이 되면 저기 보이는 설산으로부터 눈바람이 창문 틈 사이로 휘몰아쳐 들어올 것 같았지만, 베리 나이스 게스트하우스.

 
 

따뜻한 통난로가 있는 다이닝룸에서 에그 누들 수프와 살살 녹는 양파 피자를 시켰다. 저녁 로지에는 독일남 폴란드녀 커플, 미국에서 온 두 여자, 일본인 아키와 나, 그리고 우리의 가이드들이 쉬었다. 아늑하고 조용하던 다이닝룸을 일본인과 한국인이 조금 시끄럽게 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케터이자 사진을 좋아하는 광고 감독인 아키와 의기투합, 깊은 밤에 별사진을 찍기 위해 로지 앞마당으로 나섰다.

흐드러지다 못해 쏟아지던 별빛 아래서 정말 멋지다고 감탄하는 아키에게 그것이 바로 내가 천문학을 공부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25초 노출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는 별자리 이야기를 했고, 그는 내게 별 사진을 찍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별빛이 가득 내리는 하늘에 렌즈를 대고, 별 사진을 수십 장 찍었다. 처음으로 까만 밤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들이 설산의 실루엣과 함께 그려지는 사진을 얻었을 때 “이것은 내가 찍은 최고의 사진이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근처 로지에 묵던, 디자이너라는 중국처자들도 카메라를 가지고 와 우리에게 배워 곧 멋진 사진을 찍어냈다. 넷이 각자의 카메라로 별 사진을 찍고는 서로 ‘awesome, nice, beautiful’ 감탄을 연발하다가, ‘이걸 내가 찍었다고!’ 하는 지금 이 흥분과는 별개로, 집으로 돌아가 친구들에게 보여주면 ‘어 그래 응’, 뭐 그런 반응일거라며 웃다가, 그래도 우린 좋다며 한 시간에 걸친 미니 천문 관측회와 별 사진 촬영을 마쳤다.

푼힐 일출을 보러 가는 새벽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 만나 새벽별을 찍자고 약속하면서, 흐드러진 별빛들을 가슴에 잔뜩 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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