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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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교정
  • 김광수
  • 승인 2015.03.02 12: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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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런 단어 써 본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단어를 잘 안 쓴다. 시각이 잘 교정되어서일까? 그토록 시각교정을 외쳤건만 우리의 시각은 과연 얼마나 교정된 것일까. 그보다는 내 식으로 안 되면 시각교정이 아니고, 시각교정이란 어떤 일정한 형태가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올바른 시각교정을 망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시각교정을 운위할 주제는 아니지만, 내게 일어난 시각교정이 하나 있다.

나는 오랫동안 도시 생활이 싫고 자연이 좋았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사람들은 왜 이른바 천석고황(자연을 좋아하여, 병이 되어 깊어감)이란 병에 걸리는 것일까’도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문명이 싫고 원시가 좋았다. 그래서 문명을 버리고 타히티 섬으로 간 고갱과, 그를 그린 소설 ‘달과 육펜스’도 탐독했었다.

그런데 이런 성향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랬다. 왜 그럴까. 이에 관해 많은 사상가들이 현대문명의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기술문명, 물질문명이 도래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요즘 책을 좀 읽어 보았더니, 이러한 기술문명은 이른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물질 숭배도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이건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인데,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그걸 요즘에서야 알았다.

자본이 있었기에 그것에 의해서 생산이 가능해 지고, 기술도 가능해 졌다. 생산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필요했고, 농업 부문이 파괴되어 사람들은 도시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을 떠나고 가족을 떠난 도시는 삭막했다.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돈이 필요하다. 도시에는 온통 모르는 사람들이고, 거래와 계약과 의무와 규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도시에서 사람이 살기는 힘들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고 가족을 떠나서 도시에서 살게 된 근본 원인은 자본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신문에서는, 학자들은, 사상서적에서는) ‘자본’이라는 단어를 쓰기를 두려워한다. 그 대신, 기술문명이니 뭐니 그런 식으로 둘러댄다. 내가 그 눈가림을 알기까지는 삼십년이 걸린 것이다.

요즘 지구생태 파괴가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환경문제, 산업공해 문제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도 수십 년이 넘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지구 전체의 존립 위기까지 거론되게 되었다. 오일피크를 지나면서 에너지 위기가 현실화되고, 자원고갈이 구체화되고, 쓰레기와 폐기물, 온실가스와 메탄가스, 프레온 등이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할만한 상황까지 되었다. 그럼에도 문제는 점점 심화되었으며 조금도 완화되지 아니하였다.

그 결과, 이제 환경 생태 문제를 다루지 않는 분야는 거의 없게 되었고,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환경교육을 받는다. “나는야 환경 어린이” 따위의 교육이 시작된 지도 어언 20년이 넘는 듯한데, 그래서 과연 얼마나 환경문제가 좋아졌는가?

종이 아끼기 운동하고, 일회용 컵 안 쓰고, 일회용 생리대 안 쓰고, 전기 절약해서 얼마나 환경이 좋아졌는가? 캐나다의 울창한 삼림을 무참하게 황폐화시키는 클리넥스 회사가 인도네시아 태국에서 나무 몇 그루 심는다고 그들이 저지른 죄악이 회복되는가? 우리가 전등 한시간 끄고 전기를 절약하면 전국의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그래서 환경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환경파괴는 왜 일어나는가? 물론 자본이 무한생산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생산행위를 계속하는 한 자원고갈은 막을 길이 없다. 백화점이 창문을 없애고 중앙냉방을 하고, 대낮같은 조명을 계속하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소비생활을 즐기면서 원자력 발전소를 없애기는 불가능하다. 미국의 무기자본이 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서 내전이 그치기를 바라기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성장과 높은 GNP를 바라면서 동시에 친기업적인 재벌 정권의 집권을 막기도 불가능하다.

문제는 자본이다. 자본의 죄악을 말하지 않고, 자본의 죄악을 막지 않으면서 환경을 이야기 하고, 녹색성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간악한 사기이다. 나무를 만 그루 베어내고 백 그루를 심으면서도 환경을 위하는 기업이라고 버젓이 홍보하는 것이 사기인 것처럼, 그와 같이, 성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환경을 보호한다는 것은 사기이다.

레토릭이라고 하던가? 우리가 이런 레토릭에 속지 않고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과연 어찌해야 하는가. 노동자 문제를 기업 편에서 해결해 주고 노동운동을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이 바로 노동부라고 한다. 이제는 한술 더 떠서 고용노동부라고 한다지. 아예 기업을 위한 곳임을 당당히 내세우는 거지. 마찬가지로 자본의 환경파괴에 면죄부를 주는 곳이 바로 환경부라고 한다. 환경에 문제가 되는 사건을 기업 편에서 무마해 주고 문제를 온존시켜주는 곳이라는 거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정치가 문제를 다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큰 영향력을 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업의 편에 서서,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나라를 망치고, 국가기관을 이용해서 민주질서를 훼손시키는 나쁜 사람들이 집권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광수(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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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필경 2015-03-06 12:20:57
근원적인 물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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