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항쟁에서 나타난 세 가지 양상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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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항쟁에서 나타난 세 가지 양상의 저항
  • 송필경
  • 승인 2015.05.18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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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상봉 교수의 북콘서트 ‘철학의 헌정(부제 : 5.18을 생각함)’을 듣고서

 

▲ (왼쪽) 5/17 북 콘서트에서 김상봉 교수 (ⓒ 송필경)

국가 권력이나 지배 권력은 정당성이 없을수록 더 많은 폭력을 사용한다.

민중이 국가 또는 지배자의 폭력에 수동적으로 응답하면 낙오자나 도망자가 된다. 유리걸식(流離乞食), 즉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남에게 밥 빌어먹고 살게 된다. 이들이 몇몇이 모이면 도둑이 되고, 좀 더 힘이 세어지면 난을 일으키는 무리로 발전한다. 혼란한 시대의 역사에서 흔한 반란군이다. 홍경래 난이 최근세사 일이다. 이들의 행위는 미래를 설계할 의식이 없기 때문에 역사에서 사건이나 사태로 끝나버린다.

지배 권력의 폭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거나 저항하는 양상은 크게 3가지다.

1. 비폭력 저항이다. 3.1운동이 대표적이다.

2. 무장폭력 저항이다. 지도부가 확고한 이념을 가질 때 따르는 자들이 거대한 무리를 짓는다. 지도자가 정당한 의식을 가졌기에 따르는 무리들은 무기를 들고서도 도덕적 지향을 잃지 않는다. 이 저항이 우리 근대사에서 찬란한 빛이었던 갑오동학혁명이었다. 비루한 집권자들은 외세의 폭력을 끌어들여 동학혁명을 진압했다.

3. 특이한 양상의 저항이 하나 있다. 저항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외쳐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칠 때다. 이럴 때는 폭력이 자신에게 향한다.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발자국을 남긴 ‘전태일 열사 분신’이 대표적이다.

35년 전인 1980년, 눈부시게 푸르렀던 5월 18일에 일어났던 5.18은 앞서 우리 역사에서 나타났던 3가지 양상의 저항을 모두 함축한 항쟁이었다.

민주화의 열망을 계엄 확대로 짓밟으려는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대해 광주의 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총검을 든 계엄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맨손인 학생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이에 평화적인 항의하는 일반시민에게마저 죽음에 이르는 잔인한 폭력을 사용했다. 1948년 제주 4.3사건의 되풀이였다.

그러자 모든 시민이 자연발생적으로 무장투쟁하기에 이르렀다. 무기고를 탈취해서 총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부상자가 속출하여 피가 턱없이 모자라자 학생, 일반 시민, 여인들이 다투어 헌혈했다. 여인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 제공하여 봉기를 함께 나누었다. 합심한 시민의 힘이 계엄군을 광주에서 철수하게 하여, 광주는 단 며칠이었지만 국가 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대동세상의 공동체를 맛본 너무나 짧은 단꿈이었다.

5월 26일 낮 계엄군은 도청에서 소총을 든 시민군을 공격하기 위해 탱크를 몰고 광주 시내에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도청에서 도망을 갔다면 시민군은 27일 새벽에 계엄군에 사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자는 도망가지 않는다. 역사의 현장을 지킴으로써 정의를 드러내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소총 수 십 자루로 수 십대의 탱크에 도전하겠다는 결의는 자신이 선택한 자신에게 향하는 폭력이었다. 시민군은 여성과 고등학생을 돌려보내면서 ‘여러분은 살아남아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5월 27일 새벽 5시 10분, 도청을 완전 점령한 계엄군에게 시민군은 죽었다. 국가에 폭력을 당하는 민중의 고통을 알리려고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여명이 움튼 그 새벽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이었다.

광주의 영령들은 1980년 5월의 광주는 단순한 사태가 아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역사의 의무임을 생명을 바쳐 역사에 아로새겼다.
 

 

 

송필경 (본지 논설위원, 범어연세치과 원장)

 

*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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