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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양호
  • 승인 2015.07.09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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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 김성제 감독의 『소수의견(2015)』

 

불편한 영화들이 있다. 픽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그 현실의 고통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을 바꿀 힘이 부족하고, 희망을 찾기 어려움을 보여줄 때 나는 영화가 불편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현실적인 핑계들로 그들의 고통을 애써 외면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불편함은 더욱 가중된다.

영화는 ‘실화가 아니며 등장인물들은 실존하지 않는다.’는 자막과 함께시작된다.

▲ ⓒ 네이버 영화

대한민국의 어느 재개발 철거지역. 철거용역과 경찰들이 철거민들과 격렬하게 맞붙는 현장에 한 철거민(박재호)의 중학생 아들(박시우)이 찾아온다. 박재호가 아들을 데리고 피신시키는 와중에 경찰을 맞닥뜨리게 되고, 그 경찰과 아들은 아수라장 속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이후 박재호는 경찰의 살인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고, 국선변호인인 윤진원 변호사에게 자신의 아들을 죽인 건 용역이 아니고 경찰이며 자신은 이를 막으려다 경찰을 죽인 것이므로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 ⓒ 네이버 영화
상당 부분 용산 참사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 많이 있지만 처음의 자막대로 용산 참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아니다. 재개발이라는 시공간에서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의 희생위에서 부를 챙겨가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고,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과 진실을 덮으려는 자들 간의 이야기이며,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어느 누구도 이 이야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마르크스는 국가는 부르주아의 통치를 돕고 다수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부르주아의 위원회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계급적 구분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국가가 사회적 약자의 편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최소한의 중립적인 조정자로서의 역할도 하지 않고 있으며, 기득권자들과 지배 권력들의 이해관계에 과도하게 편향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법제도는 이미 그 공정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영화에서 정의감 넘치는 변호사와 기자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좌충우돌한다. 한 야당의원이 재개발의 이권에 얽힌 상층부의 커넥션들이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죽을 각오로 덤벼들어도 그들의 상대는 고작 하수인들일 뿐이고,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거대한 실체의 일부분일 뿐이다.

▲ ⓒ 네이버 영화
▲ ⓒ 네이버 영화

‘국가는 누군가의 희생과 봉사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봉사를 한 것이고 박재호는 희생을 한 것이다.’ 진실을 덮으려 했던 검사의 마지막 말이다. 정말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래야만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면, 그에 대한 보상과 국가의 진심어린 감사와 사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희생들이 늘어나는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설국열차의 부품을 아이들이 영원히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여전히 국가를 앞에 내세우는 쌍팔년도식 말들이 쉽게 내뱉어지고, 과거의 일들로 대충 눙치고 넘어가지지 않아 불쾌하다.

우리의 현실을 연상하지 않는다면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과 덮으려는 자들 간의 치열한 다툼을 다룬 법정영화로도 손색이 없다. 단지 책임감만이 아닌 영화적 재미를 기대하고 관람해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수준이다. 여전히 볼 생각이 없긴 하지만, 최소한 연평해전보다는 낫지 않을까싶다.

▲ ⓒ 네이버 영화
▲ ⓒ 네이버 영화
▲ ⓒ 네이버 영화
▲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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