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녀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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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녀의 일기
  • 전양호
  • 승인 2015.08.2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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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 브느아 자코 감독의 『어느 하녀의 일기(2015)』

 

(그리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볼 것 같지도 않고, 그리 많은 사람이 이 글을 읽을 것 같지도 않아 스포일러가 좀 있습니다.)

 

늦은 휴가의 마지막 날. 여름방학 내내 하루 있는 오프날을 아이들과 함께 흘려보내고, 휴가라곤 하지만 아이들의 지치지 않는 물놀이에 지친 나에게 힐링이 필요했다.

 

‘세상 가장 발칙한 하녀가 온다’

‘우리가 아는 모든 하녀의 시작. 비밀스러운 그녀의 일기가 드디어 공개된다’

 

난 오두리 토투의 아멜리에를 상상했다. 사랑스럽고 귀여운데다가 엽기발랄하기까지 한 여자 주인공이 기성세대를 조롱하고 뒤집어엎는 그런 영화를 상상했다. 게다가 레아 세이두가 나오는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라니. 이 영화만 보면 모든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한방에 날아가고, 새로운 두근거림을 안고 일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았다!!

 

영화사의 홍보와는 다르게 상영시간 내내 졸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했고, 감독은 불친절의 최고봉을 보여주었으며, 말초신경이 아닌 중추신경을 동원해 집중해야 하는 영화였다. 그리고 레아 세이두는 자신의 매력을 100% 발산했지만, 내가 바랬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영화의 객관적인 평가를 떠나 영화를 본 이후에도 ‘왜 그랬을까? 감독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등의 질문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영화를 난 정말 그 순간만큼은 원하지 않았다.

 

하녀답지 않는 뛰어난 미모와 세련된 패션 감각을 가진 파리 출신의 셀레스틴이 조용한 시골 마을 농가의 하녀로 찾아온다. 주인집의 마담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그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듯했고, 주인남편은 첫 날부터 노골적으로 그녀에게 찝적대는 찌질남이었다. 그리고 그 속을 알 수 없지만 주인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는 하인 조제프는 유대인을 극도로 혐오하긴 하지만,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남자다.

 

셀레스틴은 착한(?) 하녀가 아니다. 주인여자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뚱한 얼굴과 비꼼 가득한 혼잣말로 자존감을 지켜가고, ‘갖고 놀기 쉽다’ 거나 ‘음식에 약간의 독약만 타면 주인을 죽일 수 있다’ 등의 독백 속에 지배층의 무능함을 은연중에 내비친다.

 

현실에서의 권력관계는 모순이다.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 노동자, 농민이다. 지배층은 이들이 없으면 일상을 살아내기 힘든 인간들이다. 셀레스틴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착한 하녀가 될 수 없었다. 착한 하녀가 되길 원하지도 않았지만, 인간적인 삶도 불가능했다. 그녀에게 인간적인 삶은 인간적인 주인을 만날때에만 허락되는 수동적인 삶일 뿐이었다

 

은근히 호감을 가지고 있던 무뚝뚝한 조제프는 셀레스틴에게 은밀한 제안을 한다. 결혼해서 주점을 내고 셀레스틴은 매춘을 하면서 함께 살자는 것이다. 셀레스틴은 그와 함께 주인집의 은식기를 훔치고 성관계를 맺으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가 가자는 대로 갈 것임을 다짐한다. 그녀는 남자와 여자라는 가장 원초적인 권력관계에 자진해서 합류함으로써 드디어 착하고 훌륭한 하녀가 되었다.

 

대중적인 재미는 없지만, 자기 맘대로 풀어놓은 감독의 이야기들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레아 세이두의 팬이라면 한번쯤 시간을 투자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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