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건치, 참의료 실현을 통해 이룬 결속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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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건치, 참의료 실현을 통해 이룬 결속력
  • 이상미 기자
  • 승인 2015.09.0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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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건치 인천 지부 기획 ①] 인천건치의 태동기…소수정예가 보여준 힘

1987년 6월항쟁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중 보건의료 분야에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려는 치과의사들을 중심으로 1989년 4월 26일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가 설립됐다. 건치는 ‘참 의료정의 실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여러 사회단체와 연대하는 과정에서 참의료 정의를 실현해왔다.

본지는 건치 창립 26주년을 맞아 건치 각 지부별 활동을 돌아보는 지부기획을 진행한다. 태동과 성장을 거쳐 시민사회 분야의 중요 단체로 발돋움한 건치의 궤적을 살펴보고 앞으로 건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진단한다.

치과계를 넘어 의료계와 시민사회에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해온 건치 지부들. 과연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을까? 광전건치에 이어 이번에는 지역연대 및 강한 지부 결속력, 나아가 중앙 집행부 참여에 중추적 역할을 해온 인천건치를 소개한다.

 

태동기 인천건치의 ‘남다른 활동력’

인천건치는 지역연대 주도, 건치 중앙에서의 역할수행 등 중요 활약상을 보여준 지부로 손꼽힌다. 이 같은 성장에는 1990년 지역 치과의사들의 친목모임 시절부터 보여준 특유의 결속력과 실행력이 큰 몫을 차지했다.

운동권 활동이라는 공통의 경험을 공유한 치과의사들인 만큼 참의료에 대한 생각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잘 맞았을 터. 이들은 모임을 거듭하면서 의료인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외부 활동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지회 직전 모임 단계서부터 인천건치는 대규모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을 찾아가 무료 구강검진을 진행했다. 소수정예로 보여준 남다른 행보였다. 이 때를 계기로 인천 지역에 있는 노동자들, 여기에 비영리 어린이집에 있는 노동자 자녀 및 기타 소외계층들이 인천건치 회원들의 의료 활동에 있어 주 대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당시 외래진료 도구가 마땅치 않았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시도 자체로 매우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구강상태를 점검하고 치료방안을 제시한 것만으로 노동자들의 구강건강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됐다. 이후 노동자 구강 진료는 이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확대돼 ‘건강센터 희망세상’ 진료사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같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이 성장하던 차, 1994년에는 10여 명의 회원이 모여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인천지회’가 설립됐다. 이때 초대 지회장으로 김유성 회원이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됐으며, 이후 지속적으로 인천건치 활동을 눈여겨보던 건치중앙의 심사를 거쳐 ‘인천지회’에서 ‘인천지부’로 승격됐다. 초대 지부장으로는 직전 지회장이었던 이원준 회원이 선출됐다.

산업구강보건연구원과 인천 산업사회 보건 연구회, 산업보건 연구회 등 인천의 다양한 사회단체와 연대하며 구강보건 및 사회활동을 지속한 끝에 맺어진 결실이었다.

 

지역 소외계층 및 사회단체와의 연대

인천건치와 인천 지역민들은 인천건치 태동기 때부터 강하게 결합했다. 특히 태동기 인천건치의 주요 활동이 노동자 문제나 저소득층 아동 등 지역 소외계층의 구강건강 문제에 집중했던 터라 더욱 그러했다.

공장지대가 많은 인천 지역의 특성상 맞벌이 부부나 노동운동 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의 비영리 공부방이 여기저기 많이 생겼다. 인천건치 회원들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구강상식 및 구강건강 교육을 실시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구강 예방교육에 주력했다.

현장 진료 외에 데이터에 수집 밑 분석 등 자료해석에 뛰어난 치과의사로서의 역량을 발휘한 사업도 있었다. 산업구강보건협의회와 협력해 노동계층의 치과 쪽 산재 인정을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해 검찰 측에 통계 데이터를 넘겨주기도 했다. 이처럼 인천건치는 구강보건 분야의 복지 수립을 위한 활동을 다각도로 진행했다.

 

인천 시민들과 함께 한 '수불사업'

▲ 인천시의회청사 앞에서 '인천불소시민모임' 소속 단체 회원들과 농성 중인 인천건치 회원들

지역민과 함께 한 인천건치의 연대는 인천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여러 시민단체로까지 확대됐다. 특히 시민단체와의 연대는 수돗불 불소화 사업(이하 수불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활발히 이뤄졌다. 인천건치를 중심으로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현, 인천평화복지연대), 인천사회복지보건연대(현, 인천평화복지연대) 등이 모여 인천 시민들의 서명운동을 진행하는 등 사회단체와 연계해 보다 조직적인 시민활동을 전개해나갔다.

현 시점에서 수불사업은 지방 행정부와 갈등을 끝에 다시 지역민 투표를 실시하는 등 난항을 겪는 중이다. 하지만 수불사업 진행 과정에서 인천건치가 보여준 행정력 및 조직력은 인천 시민사회에서 값진 성과로 기억되고 있다.

 

건치 중앙의 ‘킹메이커’

역대 건치 공동대표 이름을 언급할 때 인천건치 회원들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공형찬, 고승석, 이원준, 박성표 회원에 이르기까지 건치의 공동대표 중 상당수가 인천건치 출신이니, 이쯤 되면 명실공히 ‘킹메이커’라 부를 만 하다.

또한 중앙 집행부 중 주력사업을 총괄하는 사업국장에 인천건치 고영훈 회원이 선출돼 활약하는 등 건치 중앙 집행부에서 인천건치의 역할이 컸다. 서울 경기 지부 외 타 지부에서 사업국장을 선출하는 것은 이례적이었기에, 이는 활동가로써의 인천건치 역량을 건치 중앙 집행부에서 인정했음을 뜻하기도 했다.

중앙 집행부 일을 맡았을 때의 인천지부 회원들은 열정적인 자세로 일에 임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인천지부 회원들로 구성된 중앙 집행부가 회의를 진행하면 밤 11시 이전에는 끝나지 않는다는 말도 나왔다. 건치 중앙 집행부에서 인천건치 회원들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로 통했다.

 

친목도모라면 ‘인천건치’

영화관람, 인문학 강의, 운동, 임상강의, 기타 동아리 등, 인천건치의 소모임 리스트를 꼽자면 그 면면이 다양하다. 회의에서조차 각 회원들의 관심사를 정리 및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앞풀이’ 등의 재미난 문화가 정착돼 있다. 놀듯이 공부하고, 공부하듯 열심히 놀이하는 과정에서 인천건치 내 소모임 문화가 활성화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각 지부 중 매주 1회 얼굴을 마주하는 경우가 드문 상황에서, 인천지부는 매주 화요일 저녁에 모임을 갖고 회의 및 임상포럼 등을 진행해왔다. 서로 자주 보면 그만큼 끈끈함 또한 생기는 법. 인천건치 회원들이 일할 때 보여준 실행력과 결속력의 원천은 바로 서로 얼굴을 자주 보며 맺어진 끈끈한 정이 아닐까.

 

미니 인터뷰: ‘치과의사의 울타리를 넘어 민주시민으로’

▲ 6.15 공동선언 발표 4돌기념 '우리민족대회 환영식' 및 만찬에서. 오른쪽 맨 끝이 김유성 초대 지회장,

왼쪽 맨 끝이 이원준 초대 지부장이다.

Q. 초창기 인천건치의 분위기는 어땠나?

이원준 초대 지부장(이하 이) 회원 수가 적었지만, 덕분에 구성원들끼리 많이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외부사업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많은 부분을 함께 했다. 어떤 사업을 하든지 일이라고 하면 다 같이 해나갔다.

김유성 초대 지회장(이하 김) 사회활동, 치과 학술 세미나, 취미 동호회 등 많은 활동을 함께했다. 이 과정에서 회원끼리 만나 결혼하는 일도 있었다. 인천건치 조남억 회원은 인천 건치에서 활동하다가 반려자를 만났다. 또한 인천건치 회원들의 반려자 모임이 결성되기도 했다.

Q. 지부로 설립된 시기는 언제인가?

김: 1994년 3월에 서경지부 인천지회로 시작했다. 그 전에는 소모임 형태로 모여 활동했다. 화요일마다 모여 노는 모임이었다. 전라도 쪽에서 올라온 선생님들이 많았다. 지부로 승격된 시점은 1997년 1월부터인데, 이원준 초대 지부장은 지회 시절 지회장을 맡은 상태에서 연임했다.

Q. 타 지역과 다른 인천건치 구성원들의 특징이 있다면?

▲ 인천건치 이원준 초대 지부장

이: 대학병원의 치과의사들은 근무지 변동이 있어 긴 호흡으로 함께 하기가 쉽지 않은데, 인천에는 치과대학이 없다. 때문에 인천건치 회원들은 100% 개원의다. 회원들이 지역 이탈 없이 오랜 세월 함께한 것이 인천건치만의 끈끈함을 지켜준 비결이었다.

김: 인천건치 회원들 중에 전라도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다. 회원들이 모였을 때 광전지부와 비슷한 분위기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Q. 인천건치 태동기 회원들의 주요 관심사는 어떤 것들이었나?

이: 노동자 건강, 사회 민주화에 대한 회원들의 관심이 굉장히 많았다. 해당 주제와 관련해 지역 혹은 전국 현황이 생길 때 현장과 결합했다.

김: 환경문제 같은 주제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Q. 지역연계 관련 초창기 사업 중 인상에 남는 사업이 있다면?

김: 비영리 공부방 아이들의 부모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구강 교육이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보모를 상대로 구상 상식이나 구강건강 관련 교육을 진행했다.

Q. 인천건치 초창기 성장을 이끈 원동력을 꼽자면 무엇일까?

김: 한쪽 발은 건치에 담그고, 다른 한쪽은 자신이 관심 있는 단체에 담근다. 인천건치 회원들은 건치를 기반으로 다른 시민단체에서도 활동하는 것이다. 그래야 본인 스스로 배우는 게 생기고 지역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 인천건치에서는 이를 ‘1인 2단체’ 운동이라 불렀다.

이: 1인 2단체 운동을 전개했던 건 인천건치 회원들이 치과의사라는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지역에서 민주 시민으로서 지역활동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시민단체에서 활동했던 초창기 인천건치 회원들이 그곳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오늘날 이 모든 게 인천건치의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Q. 치과의사의 울타리를 넘어 민주시민으로써 인천건치가 했던 일 중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하다.

▲ 인천건치 김유성 초대 지회장

김: 5.18 특별법 서명운동 때 일이다. 전 국민적 관심사였던 만큼 치과의사들도 이 서명에 참여했는데, 이때 인천지역 치과의사들을 대상으로 한 서명운동을 인천건치에서 주도했다. 치과의사들은 보수 성향과 진보 성향이 다양하게 섞여 있는 집단인데, 서명운동을 하던 당시는 진보적인 치과의사들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때 상당히 많은 수의 치과의사들이 서명했다. 국정원에서 인천치과의사회에 전화해 항의한 적도 있다. “인천치과의사회에서 서명을 진행한 게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수의 치과의사들이 서명할 리 없지 않냐”고 했다더라(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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