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설(飛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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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설(飛雪)
  • 송필경
  • 승인 2015.10.12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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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 속 제주도에서 만난 역사의 상처…시대의 양심에 따라 민중과 함께 할 것을 '다짐'
▲ 제주 4·3 사건을 기리기 위한 예술작품

올해는 건치 25주년이다. 10월 3일과 4일에 건치 가족 70여 명이 제주도에서 있었던 모임은 그래서 특별했다.

행사 현수막 표어는 <건치와 함께 한 25년, 민중과 함께할 50년>. 그렇다. ‘건치와 함께한 25년’은 내 인생에 뚜렷이 할 일을 마련해 줬다. 건치는 내게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하고 올바른 역사의 길을 걸으며, 소외당한 이웃과 함께하기를 요구했다. 건치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하지는 못했지만, 탈 사회적인 의식을 지닌 많은 의료인의 삶과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었다는 게 건치가 내게 준 축복이었다.

이제 내 나이 딱 60세. 내가 얼마나 건치인으로 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제주에서의 건치 워크숍이 남은 내 인생에서 양심에 따라 민중과 함께 살도록 다시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10월 3일은 강정마을 방문 팀, 올레길 체험 팀, 한라산 등반 팀으로 나누었지만 4일에는 모든 팀을 합쳤다. 한라산 동쪽 자락에 있는 ‘제주 4·3평화공원’을 찾았다. 약 66,257평의 넓은 터에  ‘제주4·3평화기념관’을 비롯해 위령탑, 유해봉안관,  위패봉안소,  상징 조형물들이 깔끔하게 조성돼 있었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땅 제주, 한라산의 넉넉한 품안에 온갖 자연 신비를 간직한 제주에서 70여 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었다.

이 땅에서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미군정의 지시와 비호 아래 반민족친일 세력이 단순 소요 사태를 빌미로 제주도민 전체를 『빨갱이』로 몰아 무참히 학살한 이른바 ‘4.3 사건’이 있었다.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10월에야 비로소 ‘4.3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고, 2003년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무고한 양민의 원혼을 그나마 달래줄 ‘제주4.3평화공원’울 한라산 동쪽 자락에 2008년에 완공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때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넓은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는 마지막 길목에 수많은 역사 증거 가운데, 차디찬 눈발보다 더 차갑게 슬픈 기념 조형물이 있다.

‘비설(飛雪)’이라고 이름 붙인 변병생 모녀상이다.

봉개동 지역에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졌던 1949년 1월 6일, 두 살배기 딸을 안은 변병생(당시 25세)은 거친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토벌대에 쫓겨 피신 도중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았고 아이를 가슴에 꼭 파묻은 상태로 찬 눈바람 속에서 얼어 숨졌다. 뒤에 한 행인이 하얀 눈 더미 속에서 이 모녀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형상은 눈밭에 얼어 죽은 어린 엄마와 젖먹이 딸을 묘사한 작품이다.

66년 전의 사건이었지만,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제주의 비극을 ‘비설’이 한 치도 남김없이 모조리 함축하고 있었다. 두 살배기 아이를 업은 아녀자에게 총질하는 백색 테러의 잔인함이란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학살 증오비에 쓰여 있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란 말을 연상하게 했다. 이 죄악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베트남 전쟁 주민 학살, 광주 민중학살까지 이어온 것을 생각하면 우리 역사에 대한 심한 모멸감이 생겼다.

나는 ‘제주4.3평화공원’에서 『빨갱이』를 확실히 정의할 수 있는 체험을 했다. 반민족친일 권력에 아무런 불만 없이 순응하는 자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고, 백색 테러 집단의 후손에게 티끌만한 불만이라도 가슴에 품고 있는 자는 『빨갱이』다. 이게 대한민국에서는 확고한 이분법적 진리다. 지금 이 정부가 만들고자 하는 국정교과서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건치스럽게 살고자 하는 나 자신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었다.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빨갱이』로 살 것인가?

 

**이번 행사를 주관하신 박성표, 정달현 공동대표, 워크샵에서 건치 미래에 대해 발제하신 김인섭 선생,  이희원,  송학선,  박길용 선배님들,  동료 조기종 원장,  강신익 교수,  그리고 참여하신 모든 후배님들,  건치 간사님과 건치신문사 기자님들,  좋은 자리에 같이 호흡할 수 있었다는 데에 정말 고맙습니다.

 

송필경 (범어연세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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