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순(耳順)을 맞은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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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순(耳順)을 맞은 해방
  •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5.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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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과 한국 해방을 알리는 히로히또 일본 왕의 목소리를 듣기 전인 8월10일에 미국무부는 두 젊은 대령에게 한국을 분할할 지점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두 대령은 주어진 30분만에 지도를 보고 38도선을 선택했다. 맥아더 장군은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38선 분할을 포함한 일반명령 제1호를 발표했다.

소련은 한국 분할을 아무말없이 받아들이는 한편 일본 홋까이도 분할을 요구했으나 맥아더는 이를 거절했다. 미국은 이런 결정을 한국은 물론 영국이나 중국 같은 어떤 동맹국하고도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서둘러 내렸다.

미국은 남한에 민족애국주의자가 아닌 친일 보수주의자들을 내세운 정권을 급조해 오로지 공산주의 확산을 막을 방안을 세웠다.

소련은 아버지 세대의 실패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찬 젊은 혁명적 민족주의자를 내세워 공산주의 동맹을 꾀했다. 미국과 소련은 한국문제를 오직 냉전적 관점으로만 다루었다. 냉전에서 연상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분단들이야말로 한국분단의 이유였다.

이처럼 해방 그 순간부터 한국 현대사는 모든 경험, 모든 사건, 모든 사실, 모든 낱말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개의 렌즈를 통해 굴절된 채 세계의 다른 어떤 국가에서보다 더 가혹하고 더 오래 동안 이데올로기적 분열을 지속하게 된다.

즉각적인 독립과 일제를 청산하지 못한 한국은 불꽃만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 같았다. 식민지배가 초래한 무기력과 상대적 후진성을 극복해야 할 애국심은 미·소 제국주의 등쌀에 낀 새우 신세가 되었다.

한국은 부끄러운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민족분단과 정치적 소요를 겪은 뒤 수백만 인구의 죽음과 이동을 가져온 민족상잔을 피할 수 없었다. 1953년에 끝난 전쟁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현상유지만 회복하였을 뿐이었다.

10년 후 남한은 산업화하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민주적인 정치를 이룩했지만, 그것은 두 번의 군사쿠데타와 네 번의 민중저항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북한은 전후 남한보다 더 빠르게 발전했으나, 당면의 문제가 아닌 1940년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정치 체계 탓에 경제는 수렁에 빠졌다.

이제 한국은 중요하고 선진적이며 의미심장한 나라이다. 전쟁을 치르고 가난하고 분단된 나라였으나 이제는 세계 속에서 적절한 위상을 다시 차지한 나라인 것이다.

단순 조립작업만 하는 나라에서 실리콘 박편에 극소의 선을 새겨 넣어 10억 단위의 소수점 연산을 하는 마이크로프로세스를 생산해내고, 생명체를 복제하는 생명공학에선 혁명적 수준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근대적인 한국을 상상하거나 예측한 서구인은 하나도 없었다. 현기증나게 밀어붙이는 정력적인 발걸음으로 서구 못지 않은 분주한 상업과 혁신적인 기술을 지니게 됐다.

그럼에도 전지구적 냉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일찍 한국에 찾아온 냉전은 다른 모든 곳에서 끝난 오늘날에도 계속 남아 있다.

해방의 열정은 두 개의 전혀 다른 한국을 낳았고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해방 60년, 인간의 나이로 치면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부담이 없는 이순(耳順)을 말한다.

60년의 경륜이면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순리대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서로 '빨갱이'니 '제국주의 주구'와 같은 악의를 품은 해석이나 가시돋힌 독설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말자. '빨갱이의 강변'과 '제국주의 주구의 변명'을 시대착오적인 망상과 수구 골통의 억지로만 일축하지 말고 나름대로의 논리에 대해 정확히 들어주는 귀를 열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서로에 무지했고 서로를 묵살했던 역사를 지양하고 분단의 장기화보다 더 바람직한 역사의 발전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 정치학자 또끄빌은 '자유는 일반적으로 격변 속에서 확립하고 내란 속에서 완성한다'라고 말했다.

이제 내란을 겪으며 완성한 '자유'를 지닌 통일하고 당당한 한반도를 그려보는 성숙한 이순이 되자.

송필경(대구 범어연세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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