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건치, 대구 시민사회 운동의 등불
상태바
대경건치, 대구 시민사회 운동의 등불
  • 이상미 기자
  • 승인 2015.11.20 18:44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 건치 대경지부 기획 ①] 대경건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한다

보수 성향이 높은 대구에서 건치 회원으로서 ‘최초의’ 움직임을 보인 조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대구경북 지부(이하 대경건치)는 건치 지부 중 가장 먼저 결성돼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보건의료 운동의 싹을 틔웠다. 그 과정에서 여타 시민사회 단체와 폭넓게 연대해 대구의 시민사회 운동을 견인한 바 있다. 

특히 대경건치는 최초의 지방자치 선거에서 무소속 정치인을 배출하는 등 보건의료와 시민사회 활동으로 단련된 지역 일꾼을 배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지역갈등 해결을 위한 영호남 틀니사업을 진행하는 등 한국 현대사의 물결과 괘를 같이 한 모습을 보여 타 지부의 모범이 됐다. 

이에 본지는 울산건치에 이은 지부기획 시리즈로 대경건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망한다. 지난 6일 진행된 간담회에서는 김명섭 회장을 비롯한 12명의 대경건치 회원이 모여 그간 활동에 대한 소회를 풀어놓았다.  - 편집자 -

 

 

대구 시민사회 운동의 활력소 ‘대경건치’

대경건치의 태동기는 호헌 반대를 외치던 여러 회원들의 활약이 돋보이던 시기였다. 특히 초대회장을 지낸 이재용과 송필경, 김세일 회원 세 사람의 결합은 초기의 대경건치을 견인하는 큰 원동력이었다. 민주화 운동은 물론 건치 회원을 모으는 일 또한 순탄치 않았던 시절, 초기 대경건치 멤버들은 동지를 모아 연대의 힘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 송필경 회원

송필경 : 87년 전두환 정권의 호헌 성명이 나오자 대경건치 초대회장인 이재용 선생님이 이에 맞서는 서명운동을 벌이며 호헌 반대 운동을 전개했죠. 그러던 중 6월 항쟁을 맞으면서 각계 각층에  숨어 있던 저항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더불어 민주화를 위한 치과의사 조직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한 데 모인 가운데, 건치가 결성됐어요. 서울대는 이재용 선생님, 연세대는 저, 경희대는 김세일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사람들을 모았죠. 다른 건치지부는 6.10 항쟁 이후에 결성됐는데 저희 지부는 그 이전에 결성됐어요. 

한편, 대구의 보건의료 운동이 태동하고 기반을 닦아가는 과정에서 대경건치 회원들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느 지역보다 타 시민단체와의 연대를 빨리 했지요. 환경운동이나 노동운동 단체들과 발빠르게 연대했어요. 이 과정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이재용 선생님의 인맥은 큰 보탬이 됐죠. 90년대 이후부터는 모든 민주화 단체와 연대하면서 진료를 통한 농촌 운동까지 확대되기에 이릅니다. 민주노총의 전신인 단체들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도 기억납니다. 

▲ 이재용 회원

이재용: 대구가 아무리 보수적이라 해도 그 안에 진보의 목소리가 숨어 있습니다. 계기만 주어지면 뜻을 같이 할 움직임들이 있죠. 그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사회운동에서 선도적인 역할들을 해낼 수 있었어요.

물론 그 과정이 쉽진 않았습니다. 신문에 개인 이름으로 호헌철폐 성명을 냈다가 진료하러 가던 도중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고요(웃음). 제가 극단 처용의 대표를 지냈을 때, 대구 연극인들이 호헌철폐 서명을 내자 그것 때문에 저희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어요. 연극인들이 공연장에서 시위를 한 결과 가까스로 1회 공연을 할 수 있었지만 말이죠. 엄혹한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건치 회원가입을 권유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대구치과의사협회 측에서는 건치를 ‘빨갱이’로 간주했죠. 친구한테 건치 가입을 권유했다가 절교선언이 나올 정도로 싸운 적도 있어요. 개인적, 공식적인 부분에서 그런 부분에 대한 고충이 엄청났습니다. 같은 치과의사들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고요. 그 와중에 건치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들을 만나 건치 회원들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대경건치와 함께 한 ‘청춘’

대경건치 활동을 하면서 즐거웠던 순간을 묻자, 대학 시절 회원들끼리 어울리던 에피소드부터 영호남 틀니사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대경건치 회원들에게 건치는 가장 즐거운 시절을 함께 해준 친구인 셈이다.

▲ 박준철 회원

박준철: 초창기에는 서울에 있는 건치 중앙 행사에 자주 참여했습니다. 서울에서 1박 2일 행사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오는데, 새마을호에서 한 숨도 안 자고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기차에 들어가자 마자 식당 칸 안에 있는 맥주를 다 마시고 대전역에서 술을 공수(!)해 계속 마셨죠. 만취 상태에서 오후 4시쯤 동대구역에 내렸는데 바깥이 너무 환한 거에요.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어린 마음에 “아, 너무 부끄럽다”란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어요(웃음). 

송필경: 사업 부문에 있어서는 영호남 틀니 사업을 재미있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남과 호남이 서로 왔다갔다 하며 10년 가까이 사업이 진행됐어요. 호남지방 쪽으로 틀니사업을 하러 갔을 때는 사람들이 동네 잔치를 열어주고, 경찰들이 와서 감사하다며 금일봉을 주고 가기도 했죠. 서로 격려하며 고맙다고 말해주는 정이 있었어요. 

이재용: 틀니사업단 버스에 붙인 플랜카드에 “‘호영남’ 화합을 위한 무료 틀니 시설단”이라는 이름을 붙였죠. 주로 ‘영호남’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우리는 글자를 반대로 썼거든요. 지금도 생각나는 게, 틀니사업 하러 같이 가자고 겨우 설득해 따라왔던 친구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오기 싫다던 그 친구가 1박 2일 봉사를 마치고 버스를 탈 때는 떠나기 싫다며 울더군요. 마을 사람들이 차려줬던 음식 하나하나에도 정을 느꼈던, 그런 감동적인 관계들이 떠오릅니다. 

김세일: 1995년도 최초의 지방자치 선거 때 이재용 선생이 남구청장으로 무소속 당선됐던 것도 큰 성과였어요. 우리나라 전체로 그 당시 매우 큰 화제였으니까요. 건치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운동 단체의 과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립된 ‘시민사회 운동’, 고립된 ‘대경건치’

“대구의 보수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면서 우리가 설 땅이 좁아졌다. 점차, 이제는 완전히 고립된 섬이 됐다.”

현재의 대경건치 상황에 대해 묻자, 송필경 회원은 대경건치가 ‘고립된 섬’이 됐다며 우려를 표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대구의 사회단체들은 조직 역량저하와 더불어 회원 재생산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추세는 대경건치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87년 양김 분열 이후 대구 지역 분위기가 급격히 보수로 돌아서자 대경건치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건치 내부에서 나눴던 진보적 담론을 건치 바깥에서 얘기할 때의 주변 반응은 차가웠다. 대경건치 회원들은 이주 노동자 진료사업 등의 사업을 지속하고 있지만, 건치 안팎에 직면한 여러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을 토로했다. 

▲ 김명섭 회장

김명섭: 노인 틀니 자체가 대상자 선정 및 사후 관리가 어려워지고, 보험화가 적용돼 일반 진료소에서도 적절한 가격의 진료가 가능해지면서 점점 틀니사업에 대한 수요가 사라졌어요. 자연스럽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됐는데, 그게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년 째 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 치과 진료소입니다. 1주일에 한 번씩 일요일에만 진료를 하는데요. 대구뿐만 아니라 부산, 창원, 울산, 김천 등 다른 도시에서도 꽤 많은 환자가 방문합니다. 지금은 저를 포함해 두 명의 건치 회원과 타 단체 회원들이 모여 이주노동자 진료소를 운영 중이죠. 진료소 초기 설립 과정에서 대경건치 회원들이 주축이 돼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단체 활동들이 대구의 보수화가 굳어지면서 조직 역량의 축소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구성원 재생산의 문제도 대두됐고요. 건치뿐만 아니라 대구의 거의 모든 시민단체가 겪는 어려움입니다. 기존에 활동했던 회원들을 모아 이야기기를 나누면서 조직 재정비를 시도하려 했으나 쉽지 않더군요. 그들에게는 이미 건치가 주된 관심사에서 벗어난 상황인 거죠.

박준철: 저희가 한참 민주화 운동을 했던 당시와는 상황이 달라요. 이제는 민주화 이슈가 사람들의 삶에서 비껴나 있다고 해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주화를 자기 삶의 문제로 볼 기회가 거의 없어요.

예전에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치과의사로 개업해도 생업에 지장이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요즘 학생들은 학과 공부에 치여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리지 못해요. 앞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지 않으면 뒤쳐질 수 있다, 그런 불안감이 가득한 사회로 변한 거에요. 

차라리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명확했던 시절에는 동기들이 민주화 운동을 두고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니 말이 맞기는 한데, 나는 용기가 없어”라는 반응이었지만, 지금 그 친구들 앞에서 제 의견을 말하면 ‘종북’ ‘빨갱이’라고 합니다. 나와 시위를 함께 나갔던 친구가 “세월호는 그만 말해야 한다”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죠. 

 

대경건치가 수행할 미래의 역할

시대는 변했고, 혹자는 시대적 흐름 속에 옛 조직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대경건치가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역할은 아직까지 건재하다. 때문의 대경건치의 미래는 계속 현재 진행형이며 그에 대한 청사진 또한 그려져야 할 터. 과연 대경건치 회원들은 스스로 수행해야 할 미래의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김명섭: 의료영리화 등 의료계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에서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을 잘 설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있겠지요. 더불어 전문의제처럼 치과의사로써 명운을 결정할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고요. 그런 부분에 대해 건치가 발언을 해야 할 텐데, 그 말을 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전선이 분명해져야겠지요. 그게 우리에게 유리할 지는 모르겠지만요. 

박준철: 저는 전선이 명확해져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마 전선은 앞으로 더 불명확해지고 모호해질 겁니다. 또한, 사람을 모을 때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분명하게 이야기한 다음 사람들을 모아 설득시켜야 할텐데, 우리 내부에서의 지향점도 불명확하다고 봐요. 

어쨌건 뭐라도 지향했을 때 모여들 사람이 지금만큼 있을까 싶어요. 치과의사 자체가 보수화된 집단이자 기득권 집단입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치과의사들 사이에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 보수화될 수도 없는 거고요. 심지어 저희 안에서도 진보에 대한 다양한 결이 있는데, 이에 대한 합의점이 잘 찾아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 백경수 회원

백경수: 선배들은 지금 상태에 대경건치의 결집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하십니다만, 후배인 제 입장에서 봤을 때는 지금 정도의 추진력이 있는 것도 신기합니다. 요즘 친구들의 분위기는 완전 다르거든요. 제가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에 건치에서 했던 이야기를 올렸다가 큰일 날 뻔 했습니다(웃음).

예를 들어 의료봉사 활동을 하더라도 남을 돕는 코스프레 하냐는 반응인 거죠.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가난하니까 사회를 바꾸겠다는 마음보다는 돈을 벌겠다는 마음이 더 큰 거에요. 그 친구들에게는 이명박이 롤모델이죠. 실제로 국정 교과서에 찬성하는 치과의사들도 상당히 많고요. 

이런 상황에서 건치가 추구하는 이타성이 제게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제 관점이 받아들여질 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건치는 숨구멍이자 샘물같은 조직이에요.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kygdc 2015-11-21 10:00:32
대경건치 회원선생님들 존경합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