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정책 논설•시론
[시론] 불소, 아말감 그리고 색깔론
송필경 논설위원 | 승인 2004.02.05 00:00


워프의 가설

미국의 언어학자 워프(Benjamin Lee Whorf: 1897~1941)가 보험회사 조사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공장 화재의 원인을 조사하면서 교양 있는 노동자들이 아주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테면 빈 가스 드럼통은 가득 찬 가스통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빈 가스 드럼통은 더 폭발하기 쉬운 가스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빈 가스 드럼통 주위에서는 조심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면서 가득 찬 가스 드럼통 주위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워프는 그들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노동자들은 “비었다”라는 단어를 “안전하다”, “위험하지 않다”, “무해하다”, “진공이다”, “활성이 없다”라는 단어와 연관짓기 때문이고, “가득 찼다”라는 단어는 “위험한 물질이 있다”라는 개념과 연관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단 한 가지 방식으로(in a single way) 세상을 보게 만든다”는 가설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불소는 독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제조하기 위한 우라늄의 동위원소 분리를 목적으로 불소화 우라늄을 대량으로 다루게 되자 불소 화학이 급격히 발전하였다. 이걸 가지고 ‘음모론’이 가십거리로 된 적이 있었다.

이에 명망 있는 어느 인문학자가 ‘수돗물 불소는 독이다’라는 언어를 퍼뜨리자 수십 년 간 검증되었고 그동안 의학적 위해가 전혀 발견된 적이 없는 우리나라 수돗물불소화 사업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어설픈 생태주의자들은 모든 불소를 오직 ‘독’이라 단정짓고, 수돗물불소화를 ‘미국의 음모’라는 단 한가지 방식으로만 보고 있다. 불소농도를 조절한 수돗물불소화는 “인류에게 소아마비 예방접종 다음가는 효과적인 예방치료”라는 WHO 권고를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다.
 
색깔론

올 4월 총선에서 구태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가운데서도 한나라당 홍사덕 원내총무가 공식석 상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 호감을 가진 세력이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 세력”이라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선거가 임박하면 수구세력의 무기는 의례 색깔공세와 지역감정 자극이었다. 그들은 개혁 또는 진보를 부르짖는 사람에게는 오직 ‘빨갱이’라는 하나의 언어로 덧칠하였다.
 
언어는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다.

미국인들은 내리는 눈(falling snow), 땅 위에 쌓인 눈(snow on the ground), 얼음처럼 단단하게 뭉쳐진 눈(snow packed hard like ice), 찌꺼기 같은 눈(slushy snow), 바람에 날리는 눈(wind-driven flying snow) 같은 상황이야 어떻든 이런 모든 눈들에 한 단어만 사용한다.

그러나 눈에 관한 한 전문가인 에스키모인들은 이처럼 모든 눈을 포괄하는 단어는 생각할 수 없다. 에스키모인들에게 내리는 눈, 찌꺼기 같은 눈 등등은 서로 함유하고 있는 요소들이 감각적으로 다르고 조작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에스키모인들은 각각의 눈들에 서로 다른 단어들을 쓴다고 한다.

워프의 말대로 아무리 순수하게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보는 세계는 어쩌면 우리가 쓰는 언어에 결박될 수 있다. 언어에 결박당하면 우리가 보는 것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쓰는 언어로 판단하는 주관적인 세계가 되어 버린다.
화학공장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불소와 수돗물에 농도를 조절한 불소는 엄밀한 의미에서 같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수구세력이 툭하면 내던지는 ‘색깔론’이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호소력을 갖지 않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그만큼 우리 의식이 ‘진보·개혁’과 ‘빨갱이’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구별할 줄 아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소에 이어 아말감도 색깔론 논쟁에 휘말릴 조짐이 보이고 있다. 논쟁이 더 확산되지 않도록 지혜를 짜내어야 할 때이다.

송필경

송필경 논설위원  spk1008@yahoo.com

<저작권자 © 건치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송필경 논설위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상호명: (주)건치신문사  |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54길 21, 제1호 3층  |  대표전화 : 02)588-6946  |  팩스 : 02)588-6943
대표자: 전민용  |  청소년관리책임자: 윤은미  |  정보관리책임자 : 김철신  |  사업자등록번호 : 214-86-74634  |  발행인 : 전민용  |  편집인 : 김철신
Copyright © 2019 건치신문.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