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계 넘어 사회적 조력자로 남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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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계 넘어 사회적 조력자로 남을 터"
  • 윤은미 기자
  • 승인 2016.02.23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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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⑫대전시치과위생사회 송은주 회장…신념과 열정으로 보낸 지역보건활동 30년
치과계의 이색인물을 만나고 있는 본지의 기획인터뷰 ‘전민용이 만난 사람들’이 오랜만에 인터뷰이를 섭외했다. 초등학교 내 양치교실 운영으로 대전시를 구강보건예방사업 모범도시로 거듭나게 하는데 앞장 섰던 송은주 선생이 바로 열두번째 주인공이다.
 
1986년부터 그가 치과위생사로서 보건소에서 일해온 지 어느덧 30년. 국가보건사업에서 워낙 치과위생사의 비중이 적다보니 30년 외길을 걸어온 송 선생은 공무원 6급에 아직 보직도 받지 못하고 어린이집, 유치원, 보육원 등 현장을 누비고 있다. 그나마도 보건소 입사 당시 비정규직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보건회가 조직되면서 초기 멤버들과 힘을 모아 1992년 정규직화를 이뤄낸 덕분이다. 그만큼 치위생계에서도 그는 다소 직설적이지만 강단있는 선배 중에 한 명으로 통한다. 지금은 대전시치과위생사회 회장으로, 대한치과위생사협회 전국시도회장협의회 초대회장으로 회무 활동에 임하고 있다.
 
소속이 소속인지라 지역에서 구강보건사업에 매진해오다보니 지역치과의사회와의 관계도 자연 돈독한 편인데, 그것이 비단 '일' 때문만은 아니다. '오지랖이 배냇병'일 만큼 그는 '일' 보다 '사람'을 좋아한다. 그 때문에 한 때 빚더미에 올라앉을 만큼 일을 벌리기도 했지만, 그에겐 '사람'이 남았다.
 
"'구강족(?)'이 취급을 못받아도 내 몫은 다 한다"고 힘 줘 말하는 그에게서 30년 열정을 쏟은 공공구강보건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편집자
 
▲(좌) 송은주 선생 / (우) 전민용 대표

- 우선 근황을 좀 전해주세요.
 
"올해가 보건소에서 일한 지 30주년이에요. 이제 똑같이 6급이 됐는데, 아직 보직도 못받았어요. 구강족이 취급을 못 받잖아요.(웃음) 어쨌든 아직 현장에서 일해요. 현장에서 일 하는데 나이 핑계를 대고 싶지 않거든요. 어린이집, 유치원, 보육원으로 구강보건사업을 나가는데, 요즘 들어서야 조금 줄였어요. 이전에 100% 정도를 했다면, 요즘은 70% 정도? 그래도 여전히 유치원 칫솔질교육엔 100% 쏟으려고 해요. 그때가 구강건강에선 가장 중요한 시기니까요"
 
- 초창기 보건소에 근무하는 치과위생사들의 근무환경이 굉장히 열악했잖아요. 급여도 너무 적고, 언제부터 좀 현실화됐나요.
 
"1989년 지나면서 좀 나아졌어요. 1990년대 접어들면서 공무원들 월급을 기업의 몇프로로 정하면서 올라갔죠. 그전엔 진짜 적었어요"
 
- 당시 보건소에서 일하는 치과위생사들의 여건은 어땠나요?
 
"농어촌특례법에 의해서 전국에 1200여명이 동시에 들어갈 때가 있었어요. 그때 치과위생사 배출인력에 3분의 1 정도였어요. 공무원의 매력이 그거잖아요. 직업을 보장해주는 것. 저도 1986년에 전국에 1200명을 뽑을 때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당시 우리도 노력을 많이 했어요. 1989년에 민주화의 열망을 함께 한 시기에 우리도 치과위생사의 처우개선을 위해서 대전시치과의사회에서 점거 농성을 벌였어요. 열악한 환경과 직종에 대한 이해부족을 개선하기 위해서 임상에서는 각 근무처에 출근하지 않고 대전시치과의사회 사무실로 집결했고, '우린 숨쉬고 있다. 우리도 소중한 병원의 구성원이다' 목이 터져라 외쳤죠. 그때 보건회 조직도 만들어지고, 그러면서 모금도 했는데, 납부율이 60~70%나 됐죠. 그걸로 대정부 활동도 하고 그러면서 1989년에 문경숙 회장 시절에 우리가 다 정규직이 됐죠"
 

보건소에서 예방사업을 해야한다는 신념으로
무작정 지원없이 벌였던 구강보건사업
복지부가 벤치마킹 하는 전국 모범 사업으로
 

- 시작할 땐 주로 보조를 했을텐데, 언제부터 지역 구강보건 정책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1989년에 대전이 광역시가 되고 보건소에서도 치과의사 모집 공고를 냈는데, 그때만해도 보건소에 치과의사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어요. 광역시가 되면서 공보의 배정도 안 되니까, 그 때부터 5급 치과의사를 뽑은 건데 어쩌다 들어와도 계속 나가더라고요. 그때 보건소 의사 자리가 전부 예진(예방진료의사) 자리로 넘어갔어요. 2000년도에 잠깐 치과의사 자리가 공백이었을 때, 그때 본격적으로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 확고해졌죠. 보건소는 진료기능을 하면 안 된다. 이제 예방사업을 해야한다는 생각이요"
 
- 치위생과를 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본의아니게 갔어요.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 절친이 대전보건대 치위생과 초대 학과장이었거든요. 학과장님 병원에서 방학 때마다 반강제로 알바를 했는데, 실습 2년을 꼬박 그 병원에서 보내고 햇수로 4년을 또 다른 임상에서 일했죠. 서울대 출신에 그때 당시 몇 안 되는 수련을 받은 분이라 꽤 체계도 있고 괜찮은 병원이었어요. 그러다 보건소로 가서 공보의들이 진료하는 걸 봤으니 처음엔 불만도 있고 놀랐죠"
 
- 그러다 예방사업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기 시작한 건가요?
 
"2000년에 치과의사 자리가 또 공석이었어요. 그때 구강보건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게만 해달라고 담당 계장한테 얘길했어요. 초등학교에 가서 교육을 하고 싶다고요. 가게만 해달라고, 아무 지원도 필요없다고 윗분들에게 얘길했죠. 그렇게 허가를 받고 대전보건대 모교에 협조를 청해서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로 가서 교육을 시작했어요. 약속대로 지원을 안 받았으니 제가 후배들 밥 사먹여가며 일을 했지요. 그런데 계장님이 법인카드를 내주시더라고요. 밥값 쓰라고요. 그러고 200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복지부 구강보건사업이 시작됐고, 그때부턴 제가 조금만 움직이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 또 보건직 소장님이 대전에 처음으로 왔어요. 원래 의사 소장님이 하던 자리였거든요. 대전 최초의 보건직 소장이다 보니 새롭게 일을 벌이고 싶었겠죠. 그렇게 계장님과 소장님 그리고 저까지 삼박자가 맞아지면서 복지부에서 새로운 사업이 내려올 때마다 계속 일을 벌이기 시작했죠. 그때 이미 제가 대전지회 회장을 하고 있었으니 저를 따라 보건소로 들어오는 친구들도 생기기 시작했고, 처음엔 정식 TO도 없어서 공공근로직으로 뽑아서 함께 일했어요"
 
- 2012년엔 대전지역이 학교 구강보건사업 모범사례로 알려지기도 했어요. 사업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학교 구강보건실에 예산을 지원해주는 거에요. 관내 초등학교가 23곳인데, 5곳까지 확대를 했어요. 그 안에서 치면열구색, 불소도포, 양치사업을 했죠. 거기서 또 아이디어를 짜고 그러다 지역치과의사회와 함께 전국 지자체 최초로 양치교실을 만들었어요. 그때가 2007년인데, 이걸 보고 복지부가 역으로 우릴 벤치마킹 하게 됐죠. 2009년에는 복지부가 이걸 공식 사업으로 채택하더라고요. 정부 사업을 받으려면 사업 효과도 입증을 해야 하니까, 그때 지역치과의사회가 용역비도 제공하고, 지역대학 교수님이 논문을 작성하셨죠. 또 그걸 학회지나 복지부 주관 포럼에서도 잘표하구요"
 
- 시기도 잘 맞았네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초등학교 5곳까지 확대를 했지만 문제는 인력이었어요. 공무원 정규인력이 딸리다보니,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두 곳 학교는 거의 방치상태였어요. 그래서 5개 학교에 3명의 비정규직 치과위생사를 돌려가며 운영을 했죠. 2002년에 비정규직법이 논란이 되면서 기업들이 공무원이 먼저 모범을 보이라고 하면서 2007년 공무원 정원 TO가 내려왔어요. 전국 보건소에 치과위생사 TO가 3명이 내려왔는데, 우리가 2명을 받아왔죠. 지금은 모두 무기계약직으로 일도 잘 하고 있어요"
 

'비겁하게 살진 말자' 했을 뿐인데…
사람 덕분에 빚도 지고 갚고
망하고 또 망해도 '다시 서는 봄'
 

- 이쯤되니 성장과정도 궁금하네요. 유년시절 이야기라던지.
 
"저희 아버지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6.25 월남전을 겪으신 군인으로 보수 성향이셨어요. 그런데 제가 아버지와 정치적 성향은 달라도 누군가와 더불어 사는 삶은 또 아버지에게 배웠어요. 그 생각이 다른 건 아니고 그저 '비겁하게 살진 말자' 이런 거였죠. 사회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소위 운동권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 친구들을 만나면서 생각도 더 넓어지고 책도 찾아보게 되고, 토론하고 그랬죠. 그게 좋았어요"
 
- 지금도 그 친구들과 계속해서 만나고 있는 모임이 있나요?
 
"지금은 거의 많이들 끊겼지만, 알음알음 알고 지내죠. 아직까지 회비 내가며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은 하나밖에 없어요. '다시서는봄' 멤버들이죠. 저는 일요일엔 약속을 잘 안 잡는데, 이번 주엔 그 친구들이 일요일에 모이재요. 이제 나이도 있고 일주일을 버티려면 일요일은 쉬어야 하거든요.(웃음) 그런데 그 모임 만큼은 나가요.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안 피곤하죠? 그 친구들만 만나면 새벽 1시까지도 있다오는데도 월요일이 피곤한지를 모르겠더라고요"
 
- 모임 결성하게 된 이야기 좀 해주세요.
 
"과거에 대전에서 운동하던 친구들이 모이고 놀았던 공간이 있어요.왜 그런 거 많았잖아요. '일일찻집' 같은 주점이요. 제가 79학번인데 주점 만들 때가 80년대 후반이었어요. 처음엔 비정기적인 모임으로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가장 유쾌한 모임이에요. 여자친구들을 만나면 정치에 좀 무심한 모임이 많잖아요. 또 소속이 공무원이다보니 어딜가나 맘 놓고 정치 얘기 할 곳이 없거든요. 공무원 생활하면서 계급사회엔 한계가 있으니까, 외적으로 개별활동 했던 게 대전여민회(여성민우회 대전지부), 그리고 그 모임(다시 서는 봄)이었어요. 여민회에서는 단국대 성폭행 사건이 있을 때 서울까지 올라와서 많이 도와주기도 했어요.
 
주점에는 거기 절친이 있었어서 제가 투자를 하게 됐는데, 거의 오천만원 빚을 내서 돈을 냈어요. 그 주점이 운동권 친구들의 사랑방이였고 전교조, 병원 노조 등이 일일찻집을 등 으로 인해 기관의 도청과 사찰이 있었던 곳이죠 가진 것 없는 활동하는 친구들과 노조 분들이 드나들고 하니 제대로 된 운영이 되겠어요. 그러면서 빛이 됐죠“
 
- 5천만원이면 당시에 큰 돈인데요. 투자를 하신 건가요?
 
"투자는 이익이 있어야 투자인데, 저는 그저 돈을 꿔주고 운영에 조금 관여를 하게 된 거죠. 주방일도 하고 그랬어요. 어느 날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전에 물난리가 나서 가게가 물에 잠겨 거의 망했어요. 어느정도 재건을 했다가, 옆 건물로 이사를 해서 상호를 새로 달았는데, 그때 상호를 '다시 서는 봄'이라고 했어요. 대전에서 하는 큰 문화행사의 이름에서 따왔죠"
 
- 이름이 멋있네요. 술집이 근거지였고, 문화패 활동도 하신 것 같고, 그 공간은 몇년도까지 계속 유지하신 건가요?
 
"그렇게 몇년을 더 해서 1990년대 중후반까지는 했었어요. 그러다 결국 쫄딱 망해서 빚이 8천만원 가까이 쌓였어요. 그런데 그 빚을 어떻게 갚은 줄 아세요? 그게 기가 막혀요. 제가 또 한가지 단점이 돈을 잘 몰라요. 보험 같은 건 좋아하지도 않죠. 그런데 왜 주변에 꼭 한 명씩 보험을 하는 지인이 있잖아요. 민주청년연합 활동을 하던 후배가 활동비를 벌겠다고 생명보험회사에 들어갔는데, 그 친구한테 내용도 모르고 보험을 가입했다가 2005년에 감상선암으로 보험료를 1억 가까이 타면서 그 빚을 모두 청산했죠. 당시에 빚으로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지역치과계의 오작교로 맺은 인연 '돈독'
조력자로서 등대같은 선배 되테니
선배들 했듯이 '한계의 벽'을 넘기를…
 
- 치과의사회와도 사이가 돈독하시죠?
 
"1989년부터 지회 회장을 맡아서 십수년 해오다보니 대전지역 웬만한 원장들은 알고 지내죠. 특히 제가 대전시치과의사회와의 일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었던 건 제가 동구에 있는데 동구에서 또 대전시치과의사회 회장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또 노인의치나 치아홈메우기 같은 국가사업을 하면서 지자체와 치과의사회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많이 했죠. 대전시치과의사회도 열심히 하는 지부다보니 가끔 시에다 정책 건의를 해요. 시에서는 구강보건사업에 대한 인력이 없다보니 또 제가 중간 역할을 하게 되죠. 안 친해질 수가 없어요"
 
- 취미는요? 치위생계에서도 회무를 오래하셨으니 친한 분들이 많겠네요.
 
"제가 거의 30여년을 치위생계에 종사하다보니 출신학교를 떠나 서로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요 특히 문경숙회장님과 배수명 교수나 한양금 교수, 김민정 선생 등과는 자주 만나요.
취미는 또 음주라서(웃음), 지역에서는 토요일마다 가는 볼링모임도 있어요"
 
- 기억에 남는 책도 한 두권 소개해주세요.
 
"태백산맥과 아리랑이요. 누구나 각자의 역할이 있잖아요. 그게 문화혁명이든 뭐든이요. 어떤 사건에서도 지도자가 있으면 그 밑에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옆에 또 조력자들이 있잖아요. 그 책을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 꼭 어디 한군데 서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그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거죠. 때때로 술도 사주고 밥도 사면서 재정을 모아주고 하는 활동들이요. 치위생계에서도, 우리 지역에서도 그런 등대 같은 선배로 남고 싶어요"
 
- 치위생계 후배들에게도 한 말씀 해주세요.
 
"저는 '치과위생사'라는 직업을 타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했지만 기꺼이 그 직업에 만족하면서 최선을 다해 최고가 되고자 했어요. 그때 당시엔 열악한 환경에 오로지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가야 했던 시기였는데, 돌이켜보니 악몽이 아니라 다시 잠들어 돌아가고픈 꿈이네요.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지만 선배들이 그랬듯이 우리 스스로가 벽을 넘고 발전해나갈 수 있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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