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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빛을 상상한 ‘런 아저씨’[논설] 송필경 논설위원
송필경 | 승인 2016.03.30 12:55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이나 글에서 그의 기풍이나 격조를 느낄 수 있다. 현란한 학식이나 교묘한 삶으로 위장한 경우에 우리는 일시적으로 깜빡 속아 넘어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삶이 관념에 빠지면 최고의 문장가라 할지라도 고작 하는 일이란 아름다운 언어의 유희뿐이다. 서정주 따위처럼...

그럴 능력조차 없는 시인들은 세상에서 소외돼 비틀린 의식으로 삶에 대한 불평을 쏟거나, 화려하고 멋진 겉모습을 추구하며 허세를 부리거나, 빛 가운데서 어둠을 부자연스럽게 상상하는 경박한 소시민적 의식을 뽐낼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요즘 자기 연민에 빠진 김지하처럼, 말과 글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자들의 병든 넋두리로 주절대는 것이다.

나는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가 없이 평범해 보이는 베트남 사람들 가운데 그 말이나 글에서 놀라울 정도로 삶의 깊이가 느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런 아저씨’는 1966년 15세 때 학살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누이동생과 어머니가 참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바로 곁에서 목격했다.

2015년 4월, 베트남에서 학살 피해자 증언하러 한국에 온 런 아저씨는 가스통 노인들이 증언을 방해하려고 득실거리자 “전쟁도 치열했지만, 평화도 치열하구나”라는 감상을 남겼다. 70세를 바라보는 런 아저씨는 올해 초 가해자인 한국 사회에 과거 반성 아래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원하는 장문의 편지에서 이렇게 끝맺었다.

“저는 이제 인생의 황혼녘을 걷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의 봄이 더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용서로써 과거의 짐을 벗고 가벼워지는 날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의 웬만한 먹물들보다 말과 글의 내면에 훨씬 더 기품이 서려 있다. 일반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과학적 기질보다 문학적 기질이 더 발달했다고 한다. 특히 말과 글을 압축한 시나 운문이 무척 발달했고, 지식층의 시보다 일반 서민의 시가 엄청나게 더 많다고 한다. 베트남인의 문학, 특히 시에 대한 사랑은 “옛날부터 조상들은 시 짓고, 적과 싸우는 것밖에 몰랐다네”란 표현에 잘 담겨 있다.

런 아저씨의 말과 글에 나타난 격조는 비극적인 삶에서 비롯한 다양한 경험을 심오하게 내면화 한 모습이다. 그가 겪은 비극을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이 저지른 야만적 학살과 분리해 생각한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오류에 빠진다.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베트남전쟁의 근원적인 시대정신, 즉 베트남 인민의 저항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3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은 인류 역사상 어느 전쟁에서도 볼 수 없는 유형의 전쟁이었다. 모든 인민이 왜 싸워야 하는 가를 자각한 전쟁, 다시 말해 인민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저항전쟁이었다.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른 채 끌려간 삼국지 속 유비의 병사나, 적진으로 비행기를 몰고 돌진하면서 ‘천황만세’를 강요당하며 자살한 일본 병사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차원이었다.

이제까지 인류의 모든 전쟁은 한 줌도 안 되는 지배자의 이익에 따른 명령을 맹목적으로 수행한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 역시 미국 국방성과 군수산업체가 결합한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따른, 이른바 명백한 침략 전쟁이었다. 한국은 미국에 빌붙어 돈벌이 하러 참가한 전쟁이었으니, 우리는 이런 비윤리적인 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해 뼈 속까지 반성해야 한다.

베트남 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 폭력 앞에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말살 당하는 것을 보았고, 미국 제국주의 십자군이 누이와 어머니를 능멸하는 것을 생생히 보았다. 그래서 인민은 가족의 존엄과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지독한 폭력에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저항했다.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숭고한 전쟁’이었다.

큰 산일수록 골짜기도 깊은 법이다. 베트남인들이 겪은 고통은 정신을 깊게 만들었다. 그들의 말과 글은 슬픔의 크기만큼 정신을 드러냈다. 슬픔은 자유에 대한 열망과 한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였다. 죽음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가치 때문에 당한 고통 속에서 정신의 크기를 길러냈다.

거대한 고통에 정신적 상처를 크게 입었음에도, 슬픔을 통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베트남인들의 탁월함이고 고귀함이다. 그들은 쏟아지는 피눈물 속에서 가해자를 응시했다. 고통의 그런 감수성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길렀다.

아무런 정당성 없는 폭력 앞에 무릎 꿇고 고통 받는 것은 노예의 비극이다. 강요당한 비굴함에는 어떠한 정신적 깊이도 없다.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스파르타쿠스의 자유를 향한 정신은 결국 그를 땡볕 아래 십자기에 매달려 굶어 죽는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제도의 폭력에 저항함으로써 보복 당한 스파르타쿠스 같은 저항 정신은 베트남인의 귀중한 본보기(典範)였다. 아직도 위선적인 이념의 탈을 쓰고 서로 겨누는 총부리에 증오심만 가득한 우리 민족은 이런 정신을 소중한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한다.

삶의 깊이는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자기반성’에서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빛의 고귀함을 알 수 있다. 정신의 밝음은 고통의 깊이에서 두드러진다.

“달빛마저 없는 깊은 밤일수록 별은 더욱 또렷하리라.”

 

 

(연세범어치과 원장, 본지 논설위원)
 

송필경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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