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생의 영화한편] 실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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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생의 영화한편] 실미도
  • 강재선
  • 승인 2004.02.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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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를 좋아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은 70, 80년대를 회상하는 무수한 자전적 소설들이 쏟아져 나왔던 때다. 제도교육을 충실히 수행해 낸 나에게 그 회고록들은, 때로는 충격으로 때로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유행이었다.

처음에는 힘겹게 꺼냈을 것이 분명한 ‘옛이야기’는 피를 토할만한 뼈아픈 자기고백에서 그저 간략한 소재나 지나가는 넋두리로 퇴색되었고, 아무데서나 편하게 불려지는 고유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뭔 일이 있었다더라”고 희미한 윤곽만 밝혀진 것 이외에는 사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는 사회 속에서 이 땅의 상처를 보듬기는커녕 냉소를 퍼부었던 어린 시절….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는 대박영화의 기막힌 소재가 될 만한 것들 투성이라, 새로운 흥행보증수표로 떠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흥행을 쫓는 한국영화는 소심하고 자기 안위적이어서, 왜곡되거나 감추어진 역사적 진실이 현실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다거나, 한국영화가 가지는 영향력만큼 사회와 역사에 기여한다는 기대는 접어야 할 듯하다.

영화 ‘실미도’는 거칠다. 구태의연하기도 하고, 감정과잉이 되어 힘이 잔뜩 들어가는가 하면, 심각한 장면에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하고, 어쩔 때는 등급을 고려한 때문인지 뭔가 힘이 빠지고 덜하다는 느낌. 성의 있게 잘 짜여진 세련된 명작이라기보다는, 불행한 파시즘의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얻고자 죽음을 넘나들었던 실미도의 이름 없는 영혼들을 위한 고발장이랄까(극중에서 윤간당한 여선생의 영혼 역시). 개인적으로, 지난 시대를 기억하고 분노하는 법을 잊지 않도록 나태해진 나를 환기시켰다는 것에 영화의 가치를 둔다.

‘진실’과 ‘사실’의 경계가 그렇듯이, ‘실화’와 ‘드라마를 위한 극적 구성’간의 차이는 때론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으나, 어찌 되었건, 역사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영화가 나온 셈이다.

영화의 사회적 기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듯이, 팝콘처럼 가볍게 웃고 즐길 영화와, 진지하게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영화, 그 외에 많은 다양한 영화들이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그런 흐름들이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진정성과 대중적 힘을 가진 대작을 탄생시키리라 믿는다.

강재선(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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