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을 대신해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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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을 대신해 짓다
  • 송학선
  • 승인 2016.05.02 18: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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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밝 송학선의 한시산책 15] 대인작代人作 여인을 대신해 짓다 /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명종4~1587선조20)
(ⓒ 송학선)

이별의 사연은 천만 겹이지만, 한마디로 ‘늘 그리움’이지요.

대인작代人作 여인을 대신해 짓다 /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명종4~1587선조20)

유금불가탄有琴不可彈 거문고가 있어도 탈 수 없어요

고조문이비苦調聞易悲 괴로운 곡조 들으면 쉬 슬퍼지니까요

유주불가음有酒不可飮 술이 있어도 마실 수 없어요

취별증처기醉別增凄其 취하면 이별이 그 쓸쓸함을 더하니까요

만반결불해萬般結不解 모든 게 맺혀 풀리지 않으니

심여춘견사心如春繭絲 마음이 마치 봄날 누에고치 같아요

남아경원별男兒輕遠別 사내들은 먼 길 떠나길 가볍게 여기니

천첩장하위賤妾將何爲 이 몸은 장차 어찌해야 하나요

처처출강곽凄凄出江郭 쓸쓸히 강 밭재에 나가

수절양류지手折楊柳枝 손으로 버들가지를 꺾어봅니다

이사천만중離辭千萬重 이별의 사연은 천만 겹이지만

총시장상사摠是長相思 한마디로 ‘늘 그리움’이지요

유연비고리幽燕非故里 유연은 고향마을도 아닌데

부자거하지夫子去何之 님이여, 무엇하러 그리 가셨나요

하교일모우河橋日暮雨 강다리에 날 저물어 비 내리는데

저립청루자佇立淸淚滋 우두커니 서서 맑은 눈물만 보탠답니다

원위산상석願爲山上石 원컨대 산위에 돌이 되어

일일망군귀日日望君歸 날이면 날마다 임 오시나 바라 봤으면

원위천변월願爲天邊月 원컨대 하늘 위에 달이 되어서

처처조군의處處照君衣 곳곳에 님의 옷 비춰 봤으면

종연독불견終然獨不見 그래도 끝끝내 보지 못하면

편옥쇄수위片玉鎖愁圍 조각 구슬로 시름 닫아 에우고

혜질약가보蕙質若可保 연약한 몸이지만 살아 있으면

기지강설비期之江雪飛 강가에 눈 오는 날 기다리리다

만반萬般은 여러 가지, 빠짐없이 전부라는 뜻입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할 때 그 만반입니다. 견사繭絲는 누에고치를 말합니다. 강곽江郭은 수곽水郭, 수향水鄕, 즉 강가에 있는 마을이구요. 총摠은 모두라는 뜻입니다.

중국 드라마에 악기 이름으로 가끔 등장하는 장상사長相思는 늘 서로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이겠지요. 유연幽燕은 중국 하북성의 옛 이름이라, 변방을 가리킵니다. 부자夫子는 덕행이 높아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이에 대한 경칭이구요. 저립佇立은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자滋는 더하다, 보태다, 붇다 라는 뜻입니다. 편옥片玉은 값진 보배나 귀중한 몸이라 푸는 사람도 있는데, 사랑의 징표로 나눠가진 반쪽 낸 구슬 아닐까요? 위圍는 두르다, 둘러싸다, 에우다. 혜질蕙質은 좋은 성질性質, 미질美質입니다. 보保는 지키다라는 뜻입니다.

임제林悌(1549명종4~1587선조20)는 조선의 문신입니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痴, 겸재謙齋 등을 썼구요. 본관은 나주羅州. 남인南人의 당수黨首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스무 살에 속리산에 있던 대곡선생大谷先生 성운成運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576년(선조9)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했으며 다음해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합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한 뒤 제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뵈러 제주도로 가면서 꾸렸던 보따리 속에는 세 가지 물건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어사화御史花 두 송이와 거문고 한 장張 그리고 칼 한 자루였다고 합니다.

그 후 예조정랑禮曹正郞까지 지냈으나,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백호가 평소에 가까이 사귀던 벗들은 허균許筠의 형인 허봉許篈(1551~1588)과 삼당시인三唐詩人 고죽孤竹최경창崔慶昌(1539∼1583) 옥봉玉峰백광훈白光勳(1537∼1582) 손곡蓀谷이달李達(1539∼1618) 그리고 사명당四溟堂을 비롯한 스님들이었다고 합니다. 백호는 그 잘났다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803~852)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았기에 ‘미친 두목지杜牧之’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39세로 요절하면서 그의 가족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칭제稱帝치 못한 자가 없는데 홀로 우리나라만이 종고불능終古不能하여 칭제稱帝치 못하니.... 이러한 누방陋邦에 났다가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하고, 죽은 후에 곡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는 그의 기개를 잘 말해줍니다.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에 들려 시조를 짓고 술을 따르고 제사 지냈다는 이유로 부임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파직되어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그 풍류남아가 바로 백호 임제입니다.

저서로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시조 3수와 《백호집白湖集》이 있습니다.

찬비라는 기생을 만나 즐기며 노는 모습 한 번 보시겠습니까?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업씨 길을 난이

산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맛잣시니 얼어 잘까 하노라

作家<임제林悌> 出典<校注海東歌謠 95>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맛자신이 녹아 잘까 하노라

作家<한우寒雨> 出典<校注海東歌謠 141>

찬비라는 기생인들 이런 풍류남아를 만나기가 어디 그리 쉬웠겠습니까?

황진이의 무덤에서 지었다는 시조도 읽어 보시지요.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紅顔은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는이

잔盞자바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作家<林悌> 出典<珍本靑丘永言 107>

백호白湖야 말로 요즘 시쳇말로 물찬 제비였겠습니다.

방초芳草 욱어진 골에 시내는 우러녠다

가대歌臺 무전舞殿이 어듸어듸 어듸메오

석양夕陽에 물 차는 졔비야 네 다 알ㄱ가 하노라

作家<임제林悌> 出典<花源樂譜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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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선 2017-06-16 12:36:20
교정본능..... 홀로 우리나라만이 종고불능終古不能하여 칭제稱帝치 못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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