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성에 젖은 진료를 오랫동안 하다보니 환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만사를 제치고 공부 한번 하기로 했다. 요즘 열풍이 부는 임플란트에 빠져볼까 했지만, 치과에서 가장 많이 접하고 기본인 엔도에 관심을 돌렸다.
엔도를 전공한 십 수년 후배의 병원을 찾아가 진료 모습을 옵져베이션하고 웬만한 강연회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대구에서 서울을 오르내리데 KTX라는 효율성 좋은 운송 수단의 덕을 단단히 보았다.
그러다 보니 엔도의 중요성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재료와 기구 그리고 진료 테크닉의 혁신을 실감했고 무엇보다 학문의 진보가 못난 충치를 어떻게든 살리려는 엔도 학자들의 헌신적 노력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됐다. 한편으로 강연회 때마다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을 감지하였는데 그것은 "자연치를 살리자"라는 엔도 학자들의 구호에 감추어진 분노였다.
우리사회에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는 치과에도 정글의 법칙을 강요하고 있다. 치열한 경쟁은 진료실을 대형화 고급화하는 과도한 투자를 불렀고, 따라서 채산성을 맞추기 위해 보험진료를 기피하는 추세를 낳았다. 더욱이 중산층이 붕괴한 불황으로 개원의의 어깨가 더 무거워 지니, 임플란트 시술이야말로 이런 짐들을 들어주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자연치를 삭제하는 크라운 브릿지나 불편하기 짝이 없는 덴처를 대체하는 임플란트는 현대 치의학의 총아로 불러도 손색이 없는 효율적인 시술임은 틀림없다. 게다가 임플란트가 지니는 높은 부가가치 때문에 너도나도 임플란트 시술에 뛰어 들게 만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애써 엔도하기보다는 임플란트를 위해 웬만한 발치는 찬미되고 있다. 다시 말해 발치는 마지막 선택이 아니라 우선 고려하는 술식이 된 것이다.
사람이란 경제적 이익에 만족하면 돈 안 되는 헌신을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은 법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보험 수가에 얽매인 엔도보다 돈 되는 임플란트를 선택하는 것을 마냥 나무랄 수는 없다. 임플란트를 대중화할수록 자연치를 되도록 살리려는 엔도의 원칙이 외면당하는 것이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현실적 모순이 엔도 학자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이리라.
'자연 치아를 살리자'라는 엔도 학자들의 매우 단순해 보이는 구호는 발치를 쉽게 생각하는 임플란트 만능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외침이 아닐까? 자연치를 근사한 숙녀로 애지중지하는 엔도 학자들은 고민없는 발치를 바라보면서 사랑스러운 그 여성이 마냥 능욕 당하는데, 그저 팔짱만 끼고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심정처럼 처절함을 느끼는 것이다.
'효율성'이라는 경제 논리가 우리 사회에서 최우선 가치가 되면서 그 '효율성'이라는 미명 앞에 원칙이 능욕 당하기 일쑤였다. 원칙에 대한 존중과 헌신이 없는 사회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기대가 컸던 참여정부가 민주화의 숙원인 4대 개혁입법(국보법폐지, 과거사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개혁법)에 대해서는 머뭇거리면서도 '대연정'이라는 효율성에만 매달린 것은 원칙을 강 건너 불구경 하는 듯한 인상을 줬다.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폐습을 원칙적으로 치유하기보다 기업의 CEO처럼 '대연정'을 통해 정치의 효율성만 높이려는 대통령에 실망을 느낀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은 여론 지지가 곤두박질치는 것을 우리 사회의 보수를 탓하기 전에 원칙을 지키지 않은 스스로의 탓에 돌려야 한다. 탄핵사건 후 하늘 찌를 듯 기세등등하던 열린우리당이 밑바닥까지 추락한 까닭은 이제는 삼척동자도 다 알 정도로 자명하다.
강연 중 "제발 러브댐을 꼭 쓰고 진료를 했으면"하고 어느 교수가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쉬듯 내뱉는 처절한 독백은 치과의사로서 기본 원칙을 지켜달라는 지친 호소였다.
임플란트가 획기적 시술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임플란트 역시 자연치를 존중하는 원칙을 져버린다면 원칙을 등한시하여 쇠락해 버린 열린우리당과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이다. 원칙만이 아름답고 오로지 원칙에만 향기가 베어 있는 것을 러브댐을 걸고 진료해 보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임플란트와 정치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송필경(논설위원. 대구범어연세치과)
건치가 이런 문제의 해결에 적극 나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