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표 불모지에서 차편을 놓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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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 불모지에서 차편을 놓치다
  • 김광수
  • 승인 2016.08.01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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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의 중국기행⑧] 구강에서 남창까지

예전에 비하면 매우 나아진 편임에도 중국여행에서는 피치 못할 교통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깊이 있는 중국불교 사상에 경의를 표하던 김광수 원장도, 이내 중국 교통편의 불편에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여행자인 김 원장은 간발의 차로 기차표를 놓치는 과정에서 중국 현지의 맨얼굴에 보다 가깝게 다가간다.

-편집자-

 

오늘은 소흥에서 출발해서 항주를 거쳐서 남창까지 고속기차를 타고 거기서 다시 구강까지 가서 구강에서 묵는, 상당히 긴 여정이 계획된 날이다.

남창(南昌)은 강서성(江西省)의 성도이고 공산혁명(8.1 봉기)이 일어난 중요한 도시다. 또한 남창은 마조 선사가 세운 종파인 홍주종의 본거지였다. 여기서 언급된 ‘홍주(洪州)’가 바로 지금의 남창이다. 내가 남창에 들리는 것은 마조의 절을 가보는 것도 중요하고, 동시에 여산(廬山)을 가기 위해서는 남창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즉, 내게는 남창보다도 여산을 가 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중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여산과 구강(九江)은 서로 붙어 있다. 양자강 남쪽이 구강인데, 그 배후의 산이 여산이다.

이 구강은 바로 육조단경에 나오는, 5조 홍인스님이 6조 혜능스님을 남방으로 떠나보내기 위해서 노를 저어 건너보낸 나루터이다. 나루터라고 하기에는 지금은(당시에도) 너무 중요한 교통의 요지가 됐지만 말이다.

가이드북에는 남창이 너무나 볼 것 없는 도시라고 단 세 쪽 짜리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냥 재미로 한 말이니까 너무 믿을 것은 못된다. 남창이 공산혁명의 본거지로서 얼마나 유명한 도시인데 말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선종의 역사에 의하면, 지금 선종에서 숭앙하고 있는 6조 혜능 스님은(역사적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남종선의 기치를 세운 하택신회 선사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다. 6조단경도 거의 하택신회 집단에 의해 저작된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하택신회 선사의 스승이 혜능이었고, 당시 6조대사인 대통 신수대사와 그의 제자인 7조 보적 스님과의 종단 권력싸움에서 하택 신회가 승리하고, 하택신회가 세운 하택종이 약 100년 동안 온 당나라에 득세하면서,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7조가 되고, 그의 스승 혜능을 6조로 만들면서 스스로의 법통의 정당성을 이루었다는 것이다(이것은 물론, 내 얘기가 아니라, 학문적으로 정립된, 즉 수많은 학술논문에 의해서 밝혀진 역사이다).

확실한 사실은 보적이 하택과의 싸움에서 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도 활대의 종론에서 이겼다는 그들(하택종)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하여튼, 하택 신회는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어서 한동안 정치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구사했고, 그 결과로 정치적 박해와 귀양도 살았다. 어쩌면 종교라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권력과 가까운 것 일 수도 있다. 하택 신회가 정치적 권력을 누리지 않았다면 혜능도 그저 남방의 한 이름 없는 선사에 불과했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유명한 선사들에게도 이런 잣대를 들이댄다면 아마도 불경하다고 내게 쌍지팽이 들고 나설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구태여 우리나라에 관한 얘기는 안 하겠다. 자,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인데, 권불십년이라지만, 그래도 하택종은 당나라에서 약 100년 동안 세도를 유지했는데, 그러나 장강의 앞 물처럼 밀려나고, 그 뒤를 일어서 장강의 뒷물처럼 하택종을 밀어낸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마조군단, 즉 마조선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홍주종이다. 이들의 본거지가 바로 이 강서성이었던 것이다.

마조는 강서성에서 상당히 여러 군데 절에 머무르셨다. 이제 가볼 강서성 남창 우민사도 그 중의 하나로서, 대표적인 절이다. 그런데, 마조와 그 제자들이 하택신회가 영웅처럼 묘사된 육조단경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육조단경에 보면 뒷부분에 그 영웅적인 하택신회가 한갓 용렬한 “지해종도”라고 지극히 폄하돼 나타나는데, (그것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았거나, 혹은 정말 하택신회가 쫌팽이라고 생각되었거나 그렇게 생각된 근거인데) 그것이 바로 그러한 연유이다.

자기들(하택종)이 육조단경을 제멋대로 주무른 만큼, 자신들이 다시 훗날 마조 문하의 홍주종에 의해서 6조단경을 통해 참살 당했던 것이다.

이제 신발 끈을 매고 길을 나서보자. 우선 소흥에서 항주로.

 

버스는 항주 남부터미널인데, 남창 가는 고속철도 역은 항주 동역이다. 항주도 만만치 않은 동네다(하기야 남송 때부터 전체 중국의 수도 아닌가). 그런데 아침 출근시간에 남역에서 동역으로 간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남부터미널에서 동서울 강변역을 간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도 길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이, 시내버스 타고서? 그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더운 날씨에 무거운 배낭을 지고서. 그게 고민이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소흥 시외터미널로 가서 항주행 버스를 탄다.

항주 시내로 들어오면서 보니, 항주도 아파트 건설이 무척 많다. 중국 어디를 가나 거대한 토목 공사장이고, 도시는 어디나 거대한 아파트의 바다지만, 우리가 느끼는 고전적인 항주가 아니다. 강남 갔다가 제비가 돌아오는 그런 강남이 아니다. 우리는 항주를 송나라(남송)의 수도로만 알고 있지만, 지금의 항주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항주에 있어서 유명한 전당강을 버스로 건넌다.

자 이제 항주에 내렸으니 어쩐다? 어떻게 해야 고속철을 탈 수 있는 항주 동역으로 가는가?

이럴 땐 눈치가 빨라야 한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나가는 곳으로 따라 나가야 한다. 어딘지 몰라도 막 장사치들이 따라 붙는다. 여행사 사람들, 택시 운전수들(여행자라는 걸 아니까). 물건 파는 사람들, 과일 파는 아줌마. 일단 지도를 어디서 파는 지 봐야 한다. 우선 지도부터 얼른 사서 챙긴다. 지하철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어디어디로 가란다(알아듣지는 못했다. 음, 지하철이 있기는 있군. 조금은 안심이 된다).

일단 사람들을 따라 나가는데, 사람들은 이상한 골목으로 가서, 뭐 넝마 고물상 같은 골목으로 나간다. 이거 길 맞아? 그러나, 대개 그런 길이 직통 길이 되는 수가 많다.

고물상을 벗어나니, 순경 아저씨처럼 보이는 사람이 서 있다.

옳다 됐다! “항주 동짠, 쩜머취? (어떻게 가요)?”했거니, 간단히, “여우볜 (오른쪽)”이라고 한다. 너무 쉽게 가르쳐주는 거 아닌가 생각하며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바로 지하철역이 나타난다.

오예!! 요렇게 쉽게 가는 경우도 있구나!!

중국 지하철에도 이런 게 있다(슬라이딩해서 타지 말자)

지하철에서 내려서 본 항주역도 무척 크다. 무슨 피노키오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것 같다. 암튼 그렇게 해서 남창으로 이동했다. 상당히 먼 거리인데, 세 시간 만에 주파했다. 그러니까 서울-부산보다 먼 거리이다.

드디어 남창이다.

남창 한가운데로 무지하게 큰 강이 흐른다. 이름이 간강(아래아 한글에는 해당 한문이 없다)인데 한자가 어렵다. 강서성은 약자로 간을 쓴다. 자동차 번호판에 간자가 써있는 것이 강서성 등록 차량이다. 물론 이 간강을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등왕각(縢王閣)이다.

구강 가는 기차표가 오후 5시 43분이니까, 약 4시간동안에 조주스님이 주석하셨던 우민사와, 그리고 중국 3대 누각의 하나라고 하는 등왕각을 올라가 보아야 한다.

길을 물어물어, 지도를 보고, 우민사를 찾아 나섰다. 버스를 몇 번 타고 시내를 헤메다가 드디어 우민사 가까이 갔다.

저 호수를 돌아 나가면 우민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민사에서 마조스님과 이별하고 나오니까 한국의 까페베네가 문 앞에 있다.

우민사는 남창 시내 한가운데 있다. 그래서 사찰 경내가 그리 크지 않다. 그만큼 절이 마을(성읍)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선종의 절이라고 해도 깊은 산속에 있지 않고, 시내에 있다. 혹은 대개 버스 종점 정도에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종과는 많이 다르다.

등왕각을 찾아 나선다. 날씨가 덥다. 공산군 하룡이 지휘하던 지휘본부이다.

이들은 일본군과 그리고 장개석의 국민당 군과 싸웠다. 물론, 남창은 공산당의 유서 깊은 곳이고, 그래서 8.1 광장, 혁명열사 기념탑, 8.1 공원 등등의 기념소가 많다. 구강으로 이동을 해야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등왕각을 보러 이동한다.

등왕각(滕王閣)은 악양루, 황학루와 함께 ‘강남 3대 누각’으로 불린다. 이 누각은 당나라 때인 653년(영휘 4년) 당시 이 땅에 봉해진 이원영(당 건국자 이연의 제22자)의 도락에 의해서 지어졌다. 그는 처음은 등현(현재의 산둥성 등주시)에 봉토됐기 때문에 ‘등왕’으로 불렸고, 이것 때문에 ‘등왕각’ 로 불린다.

등왕각은 전란 등에 의해 수차례 파괴됐다. 청나라 동치 연간에 28번째의 재건을 했지만 1929년에 군벌들 간의 전쟁으로 부서져 방치돼 있었다. 현재의 것은 1989년에 재건된 것으로 29번째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등왕이 뭐 이리 대단하길래 강남 3대 누각인가? 그것은 규모나 크기가 그래서이기도 하겠지만. 일단 등왕강에 올라가면 너른 간강과 시내가 훤히 다 보이고, 무엇보다도 시원해서 좋다. 여기가 어딘가, 강남의 한복판이다. 여름에는 매일매일 무지하게 덥다. 에어컨이 없을 당시 자연적으로 시원한 곳으로 치자면 여기만큼 시원한 곳은 없다. 아마도 그래서 유명한 건가? 날씨가 더우니까 별생각을 다 하게 된다.

 

 

자, 이제 구강으로 가는 기차를 탈 시간이다.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다. 남창-구강도 과거에는 상당한 거리였겠지만, 지금은 고속철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다. 이 정도면 시간은 넉넉하다. 그러나, 기차역에 가까워올수록,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거 이러다가 기차 또 놓치는 것 아니야?

기차 놓치는 것은 상해에서 한번이면 됐지, 며칠도 되지도 않아서 또 한 번 기차를 놓치기야 하겠나 싶었는데(이야기가 길어진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갈 조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기차역에 당도하니 거의 기차 출발 시간이 다 됐다. 이러다가는 또 한 번 기차 놓치겠다 싶었다. 종종걸음으로 가다가, 나중에는 뛰어 가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 여유가 있었는데, 개찰구까지 가니 시간이 약 1분 전이었다.

야, 탈 수는 있겠구나. 드디어 개찰구에 당도. 그런데, 아가씨가 (복무원이) 딱 막아서서 문을 안 열어준다. 아이쿠야. 아직 시간이 안 됐는데? 하고 우겨 봤지만 통하지 않는다. 또 한 번 허탈해졌다. 기차를 두 번씩이나 놓쳤다.

그래 아가씨한테 사정을 하고, 어쩌면 되겠냐니까, 저기 저쪽으로 가 보시면 “된다고” (분명히 나는 그렇게 들었다. 안 들리는 중국어지만.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들었나).

희망을 갖고 다음차표를 내어 주려나 하고 물어물어 창구를 찾아 갔더니, 거기는 환불 창구였다. 50% 할인해서 18위안 환불 받았다. 그것도 현찰로 안 받고 쪽지로 받았는데, 이게 뭐냐니까 시내 무슨무슨 은행에 가서 내밀면 돈으로 바꾸어 준단다. 헐!! 결국 바꾸지도 못할 종이조각이면서 왜 그걸 버리지도 않는지..

그나저나, 이거 큰일이다. 이 난리 통에 차표를 어디서 구하냐. 중국 여행에서는 기차표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데, 버스를 타고 가야 하려나. 그래도 밑져야 본천 치고, 차표 파는 창구로 갔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두 시간 후, 즉 저녁 7시 반 기차표가 있단다.

애고, 죽으란 법은 없구나. 기차표를 얼른 사고 돌아서는데, 내 뒷사람이 “져우쟝 여우마?(구강 표 있어요?)”하는데, “메이요(표 없어요)”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맹세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이야기도 그렇지만.

D 84가 나중 것이고, Z 72는 먼저 것, 놓친 기차표이다.

그 옆에 것은 항주 동역에서 남창 서역까지 온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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