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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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의 숲
  • 김경아 학생
  • 승인 2016.08.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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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의협 의대생 캠프 참관기] 이화여자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김경아 학생

8월 6일 8시 15분. “묵도-“라는 커다란 외침과 함께 우리는 일제히 묵념했다. 댕-댕-댕-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71년 전 바로 이곳, 바로 이 시간에 일어났던 그 참혹함을 떠올려본다. 섬뜩한 소름이 온몸에 버섯구름처럼 돋는다. 그들이 보았던 그것은 그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될 참혹함, 끔찍함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히로시마에 다녀온 소감을 말해보라 하면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다. 말로써 차마 표현해낼 수 없는 그런 먹먹함이 너무 지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 선생님의 『히로시마 노트』에서 묘사한 히로시마 사람들 역시 늘 침묵과 함께 해왔었는데, 히로시마가 그 침묵의 아주 조그만 일부를 내게도 건네주었던 것 같다. 같은 책에서 인용되었던 한 교수의 글에서 나타난 절규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더 이상 전쟁은 싫다. 더 이상 전쟁은 싫다.”

약 일주일 후 같은 시각, 8월 15일 8시 15분. 도쿄 중심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야스쿠니 신사에는 양복을 차려입은 사람들 여러 무리가 도리이(鳥居, 일본 신사 입구에 있는 문) 아래를 고개 숙여 지나갔다. 야스쿠니 신사를 찾기 하루 전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곳에 가서 절대로 한국인라는 티를 내면 안 된다고 했다. 정말 가보니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늘한 공포감을 느껴서 함께 간 남자친구와 아주 조용히 영어로만 대화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욱일기가 사람들의 옷과 거리의 팸플릿에 이곳저곳 널려있고, 한국이 다케시마를 빼앗았다거나 헌법을 개정하여 군사력을 갖춰야 한다는 내용이 거리에서 쏟아져 나오고, 일장기와 욱일기로 도배된 행렬은 힘찬 구호를 내뱉으며 군인 걸음으로 신사로 향하고 있었다.

히로시마의 평화행사들과는 다르게 일본어 이외의 언어는 찾아볼 수 없어서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 했다. 무서웠던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당위성으로 내거는 단어가 다름 아닌 평화였다는 사실이었다. 평화를 위한 무장, 평화를 위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 평화를 위한 일본 국가의 번영… 신사 안의 전시관에는 어린이들의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모두 군용 전투기와 군인들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평화일까. 이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넘겨주고 싶은 미래일까. 홋카이도부터 오키나와까지 4500명이나 평화행사에 모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헌법 9조 수호를 이야기하는데 왜 모를까라고 외치셨던 히로시마 피폭자 오가타 스미코 씨의 탄식이 이곳의 광경과 겹치며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 야스쿠니 신사 안의 전시관에 걸려 있는 어린이들의 그림 작품 중 하나.

지금 2016년에도 세계에서는 71년 전 끔찍했던 원자폭탄이 재현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의련대교류회와 원수폭금지세계대회 폐회식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다른 나라들도 겪었던 그리고 겪고 있는 관련 문제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비키니 수영복의 이름이 유래한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에서는 미국 핵폭탄 실험이 연달아 자행되었고, 근처 주민들은 방사선 피해를 입고 집을 빼앗겼다. 배를 타고 근처를 항해하던 어민들도 죽거나 다쳤다. 북한에서도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고, 네덜란드 같은 NATO 핵무기 공유 국가들은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으며 핵무기를 비밀리에 개발하고 있으며, 영국과 같은 나라들 역시 자국민의 평화를 위하는 척하며 엄청난 돈을 들여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꼭 핵무기가 아니더라도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한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의 피해자들도 있다.

이런 오늘날을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내가 일본인과 제2차 세계 대전과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피해에 대해 대화해볼 수 있을까 상상이 잘되지 않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민감할 수 있는 주제에 관해서는 일본 친구와 깊이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미네소타 주에서의 학부시절, 독도는 우리 땅이고 동해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홍보하기 위해 마음 맞는 사람들과 Korea’s Island Dokdo라는 단체를 만들고 미시시피 강 위를 가로지르던 워싱턴 애비뉴 다리에 멋들어지게 한반도와 독도를 그렸던 적이 있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다음날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독도가 그려진 위치에 일본 외무성에서 배포한 ‘다케시마 문제에 관한 10개의 포인트’가 한글로 출력되어 떡 하니 붙어있었다. 아톰이라는 다소 신기한 이름을 가진 청년의 소행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일본인과 민감한 문제에 대해 마주했던 것 같다. 막상 공식적으로 우리 행사에 그를 초대하여 애써 과장되게 미소를 띠고 우리의 활동을 소개하자, 그 역시도 덤덤한 표정으로 둘러보고 함께 왔던 다른 한 일본인과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는 가 버렸다. 언어의 장벽 때문인지 우리 쪽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전혀 의견을 공유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일본인과 민감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는 마음의 문을 닫고 피했었던 것 같다.

야스쿠니 신사에 가기 하루 전날, 히로시마 첫날 교류회에서 만났던 유이 씨와 신주쿠에서 꼬박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맛있는 일본 디저트를 소개시켜달라는 나의 부탁에 유이 씨가 열심히 검색해 주어서 덕분에 난생처음 한천을 먹으며 히로시마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나와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았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근무하던 민의련 소속 병원에서 인턴 두 명이 히로시마에 가야 한다고 해서 다른 한 친구와 손들어 자원하여 왔다고 했는데, 일본인이었지만 지금까지 그저 교과서 속에서만 배웠던 것을 히로시마에 와서 많이 느꼈다고 했다. 학창시절 동급생이던 히로시마에서 온 친구들이 8월 6일과 원폭에 대해 뭔가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고 기억했는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고 했다. 특히나 지금 근무하는 병원에 정기검진을 받으러 오는 피폭자 분이 있어서 더 특별한 의미를 느낀 것 같았다. 앞으로 관련 공부도 하고 사회의 활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국적은 다르지만 느끼는 것은 같구나 싶었다.

유이 씨의 말 중에 특히나 재미나게 느꼈던 것은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 다음날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는 우리들의 말에 유이 씨는 기뻐하며 그곳은 유이 씨의 고등학교 근처라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 테니스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에서 달리기를 했다고 하며 신나게 말했다. 야스쿠니 신사가 꼭 극우파의 아지트만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에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면서, 일본인들을 마치 동일한 생각을 가진 한 집단처럼 생각한 적이 많지 않았나 반성해보았다.

역사의 비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은 한국인들에게는 광복의 기쁨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유이 씨에게 설명하는 것이 좀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유이 씨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이해해주었던 것 같고, 우리 둘 다 원자폭탄의 끔찍함을 생각하며 말을 잃었다.

이런 주제로 일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그랬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이번 히로시마가 만들어준 기회는 이전에 열지 못 했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의 끔찍한 사건들이 너무나 안타깝고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역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까지도 적대감을 먼저부터 가지고 서로를 대할 필요는 없다는 것에 대해 우리 둘 다 공감하였다. 미래는 우리가 좀 더 세계적인 시각을 가지고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청년들은 다행스럽게도 끔찍한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자유로운 시각으로 보다 아름다운 미래를 만드는 것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 폐회식이 수많은 젊은 청년들과 어린이들이 마음을 모아 손을 흔들며 막을 내렸던 것처럼. 사다코 사사키 씨의 조카인 유지 사사키 씨와 피폭3세 Metis 상이 평화를 노래하는 것으로 아오기리 씨앗을 뿌리는 것처럼 (이 아오기리는 폭심지로부터 1.3km 떨어진 곳에서 피폭을 살아남은 벽오동 나무로, 그 씨앗은 평화가 퍼져나가는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나와 유이 씨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에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래서 희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 원수폭금지세계대회 폐회식 무대를 가득 메운 어린이들
▲ 히로시마 공립병원 앞에도 씨앗을 뿌린 아오기리. 아오키 선생님께서 이 나무에 대해 설명해 주고 계신다.

평화를 위해 남겨진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평화의 편에 서는 것이 답이 아닐까 싶다. 현재 내 앞에 놓인 줄기세포의 평화와 세계 평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방사능의 피해를 규명하여 수많은 환자들이 그나마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연구와 같이 조금이나마 생명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만들고 축적해 나가는 길도 있을 것이다. 핵무기를 반대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이 아닌,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핵무기가 인류와 절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는 것이 야스쿠니 신사의 평화 주장에 맞서는 방법이 아닐까. 그 말씀을 당부하셨던 No More Hibakusha 운동에 몸담고 계신 후지와라 선생님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며 힘을 얻는다. 아직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나의 길을 고민해나간다면, 나라는 줄기세포를 평화의 세포로 분화시키는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핵무기 위협 속에서도 우리가 평화를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모두가 함께 싸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 동안 지속되는 피폭자의 고충을 덜고자 분투하시는 아오키 선생님과 민의련 선생님들이 계시고, 같은 마음으로 No More Hibakusha 활동이나 헌법 9조를 지키기 위한 활동을 하시는 후지와라 선생님과 오가타 스미코 씨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계신다. 네덜란드의 PAX는 네덜란드 정부가 비밀리에 개선하고 있는 핵무기 폐지를 위해 싸우고 있고,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CND)는 영국의 Trident 핵무기 시스템을 없애버리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외에도 이들은 수많은 다른 활동을 통해 핵무기 폐지를 외치고 있고, 이들뿐만 아니라 이들과 같은 수많은 다른 이들도 함께 평화를 외치고 있다.

히로시마는 끔찍한 사건의 잔상임과 동시에, 희망의 장소라고 생각하고 싶다. 평화로 향하는 길은 지난날의 참사에 대한 인지와 그것에 대한 충분한 고찰과 반성이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평화에 대한 개념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참여한 5500명과 그 외의 수많은 사람들이 히로시마에 모여 피폭자들을 만나고 남겨진 잔해를 보며 전쟁과 원폭이 일으킨 재앙에 대해 반성하였고, 하나의 마음으로 평화를 부르짖었다. 이곳을 다녀간 우리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평화의 아오기리 씨앗을 심고, 우리 스스로가 그 평화의 씨앗이 되는 것은 어떨까. 하나의 씨앗이 된 우리 하나하나가 어디에 가서든 그것을 열심히 자신의 방법대로 피워내면 결국 평화의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가 모여 평화의 숲이 생겨나지 않을까. 이번에 평화를 위해 열심히 나아가는 많은 분들을 만나며, 그날이 그저 동화책 속 한 장면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확신이 생겼던 것 같다. 그 숲이 뿜어내는 평화의 공기를 마시게 될 그날을 위해, 오늘 나도 내 안의 씨앗에 흠뻑 물을 준다.

 

김경아 학생 (이화여대 의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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