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여산, 숙소 잡기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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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여산, 숙소 잡기의 어려움
  • 김광수
  • 승인 2016.09.0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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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의 중국기행⑨] 구강, 여산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여산에 이른 김광수 원장, 여산에 얽힌 전설과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김광수 원장 본인이 직접 겪은 여행지 숙소의 소소한 이야기가 독자들을 더 즐겁게 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편집자-

 

여산(廬山)은 장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남쪽에 있다. 여산이라는 이름은 주나라 때 광(匡)씨 성을 가진 일곱 형제가 이곳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고 그들이 거처한 오두막집이 변하여 산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여(廬)는 오두막집 여다.

소동파의 시가 유명한데, “비류직하 삼천척“이라는 문구가 여산폭포에 대해 읆은 것이라고 한다. 소동파는 이 여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때 지은 시가 이른바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 설법인데 산 빛이 어찌 청정법신 아닐까(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清淨身)”이다. 여산폭포는 지금도 여산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불교사적으로는 혜원대사(慧遠大師)가 중요하다. 그는 4세기경 불교를 중국에 토착화한 도안(道安)의 수제자였다. 도안을 통해 중국 불교는 비로소 잘 모르고 흉내나 내는 불교를 벗어났다. 혜원은 여산에 동림사를 짓고 문도들과 함께 아미타불상 앞에서 발원하고 이들과 함께 연사蓮社를 결성하였으며, 이로써 그는 중국 정토종의 창시자이자 개조(開祖)가 되었다. 혜원은 또한 승조와의 사상교류를 한 것으로 유명한데, 승조는 금강경, 법화경 등 수많은 경을 번역한 역경의 제1인자인 쿠마라지바 스님의 수제자로서, 공사상(중관사상)을 중국화한 장본인이다. 혜원은 동림사(東林寺)에 들어간 뒤로는 30여 년 동안 한 번도 여산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날 때까지, 여산은 산서성의 오대산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불교성지였다.

사람은 이상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유독 관심 있는 사람이 있고, 유독 관심 있는 곳이 있다. 내가 여산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정말 심산유곡의 신선이 살고 있을 곳처럼 느껴졌다. 그 느낌은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었고, 여산이 어디쯤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곳을 감히 내가 가 볼 수 있다는 꿈도 꾸지 않았었다. 그곳은 마치 내게 ‘무릉도원’과도 같이 신비로운 곳이었다.

작년에 한달동안 여행했던 산서성의 오대산도 그러했다. 내가 오대산을 가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 어떤 분과 대화하는 중에 그분 사모님은 여름에 철마다 중국 오대산에 가서 기도를 드리신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분이 그렇게 가신다면 나도 못갈 것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서 그 사모님이라는 분과 경쟁심마저 생겨나서 오대산을 참배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것은 묘하다. 생각이 씨가 되어서 일을 이루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정운스님이 쓰긴 “허운(虛雲-)스님” 책도 크게 작용했다. 허운스님은 상해 앞바다 보타낙가사에서부터 산서성 문수보살 성지까지 3년 동안 삼보일배로 가셨다. 물론 범인으로서는 감히 마음을 낼 수 도 없는 일이었고 그 동안에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기셨다. 그분의 구도심과 수행에 대한 결의가 그분을 이끄신 것이다. 물론 그만한 치열함이 있으셨으니까 정치적 격동기에도 115세까지 사시기도 했을 것이다. 그분의 영웅적인 삶은 저작인 「방편개시」에 잘 나와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그분은 목숨을 몇 번씩 바치고 삼보일배로도 상해에서부터 오대산까지(3000Km쯤 된다-서울 부산의 열배) 가셨는데, 나는 비행기타고, 기차타고 버스타고도 못가 보겠냐” 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해서 오대산을 갔다오고 나니, 이번에는 “여산”이라고 해서못갈 것도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곳은 오조 홍인대사가 6조 혜능대사를 손수 강 건너 주셨던, 구강(九江) 옆에 있는 곳 아닌가.

▲ 오대산 현통사, 청량·징관스님이 화엄경을 강의하시던 곳이다.

여산을 가려면 오늘 밤에는 구강에서 자야한다. 여산 속에 YH가 하나 있는데, 거기 가려면 적어도 구강에 낮에 도착해야 하고, 더구나 그 YH는 인터넷에 뜨지 않아서 예약이 안 된다. 그런데 구강에는 YH가 없다. 일반 숙소 즉 저우뗀(酒店)에서 자야한다. 문제는 외국인은 3성급 이상 호텔에서만 묵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적어도 200위안은 든다. 대개는 300위안이다. 빈관(賓館)은 대개 그 이하이다. 이름이야 어떻든, 3성급 이상이어야 하다는 것이다. 물론 돈을 내고 묵으면 되지만, 일박에 200-300위안씩 한 달 동안의 숙박비를 감당할 수 없다. 한국 돈으로 쳐도 일박에 5만원이다.

작년 여름 톈수이(天水) 이야기를 잠깐하자면, 별생각없이 기차에서 내렸을 때, 도시가 작아서 적당한 숙소가 없었다. YH는 없고, 아주 비싼 호텔이 한두개 보였다. 할 수 없이 어떤 빈관에 들어갔다. 외국인도 받는다기에 다행이다 싶어서 값을 치르고 나갔다 왔더니, 주인아줌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돈 줄테니까 나가란다. 왜 그런지 물었더니 모든 숙박인은 인터넷으로 신고하게 되어 있는데, 해보니까, 자기네 업소는 외국인 신고가 불가능한 곳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건 그 아줌마한테 사정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래서 구강에서는 할수없이 하이탕 호텔(海棠酒店)을 예약했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저녁 7시 반 기차면 9시는 되어서야 기차역에서 나오니까, 너무 늦은 시각이라서 찾아가기도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곳에서 늦은 밤에 지도만 보고 찾아가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반드시 모르는 곳에 갈 때는 해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런데, 기차가 밤 9시에 도착하니, 쉽지 않다.

이 주소 九江海棠大酒店 Haitang Hotel , 1.5 82 Lushan Avenue (Lushan Dadao)(廬山大道82號)만 가지고 밤늦게 후진 골목지도 하나 가지고 찾아가야 한다. 어쩌다 일이 이리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기차에서 내렸는데, 지도 파는 사람도 없고 가게방도 다 문 닫았다. 거리는 썰렁하다. 조심해야 한다.

예약을 무시하고 아무데나 다른 호텔에 들어갈까 생각 했다. 그래서 일단 보이는 숙소(Holiday Inn 인가?)에 들어갔는데 방도 없단다. 결국 해당화에 가야했다. 지나가는 이에게 주소를 들이댔지만 그 사람도 주소만 가지고 어찌 알겠는가, 설명한다고 해도 내가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막막했다.

구글에서 뽑은 골목 지도 하나만 들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는 역에서 가깝게 느껴졌으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한참을 걸어서 지도에 나온 네거리가 확인되는 것을 알고서야 이 거리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한 30분 정도는 걸은 후였다. 문제는 그 가는 길이, 거대한 산업도로 옆, 공장 지대를 지나 불도 없는 스산한 길을 한없이 지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정말 나쁜 놈을 만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거리였다. 게다가 여행자 내색이나 외국인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거리는 나쁜 놈이라면 흑심(黑心)을 낼 만도 한 거리였던 것이었다.

나는 ‘빨리 이 거리를 벗어나야지’ 하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온몸이 땀으로 절고, 무거운 배낭은 점점 더 무거워 지고, 숨은 턱턱 막혔다. 200만원의 현찰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긴장감이 더했다.

▲ 당시 들고 있었다는 후진(?) 지도

고개 하나는 더 넘어서야 겨우 저 멀리 빨간 네온 사인이 보였다. 해당화 호텔이었다. 결국 한 시간 정도 걸렸다.

호텔 프런트에서 예약을 이야기하고, 방을 배정 받는데, 직원에게 “못찾아서 혼낫다, 밤이 깜깜하고 늦어서 힘들었다. 배낭도 무겁고. . ” 막 얘기했는데, 그는 내 얘기는 별로 듣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구강에 도착했다.

▲ 해당화 호텔
▲ 구강 기차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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