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극복해야 할 선구자 '입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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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극복해야 할 선구자 '입치사'
  • 이주연
  • 승인 2005.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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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치의학 120년 : 역사가 보인다]

입치사란 도제식으로 입치(入齒) 기술을 익혀 치아를 제작해 입안에 넣어주는 사람이다.

명치유신기 일본에는 치과의사보다 많은 수의 입치사가 활동했다. 그러나 정규 치과의사들이 치과의사법을 제정(1906)하면서 입치사의 영업이 불법화되었다. 그러자 많은 일본인 입치사들이 한국으로 이주했고, 일본 정부도 이를 장려했다.

최초의 일본인 입치사는 고모리(小森, 1902)로써 노다치과의원 근처에 '치과시술소'라는 간판을 개업했다. 당시 조선에는 치과의사와 입치사를 구별하는 법안도 식견도 없었다. 이어 통감부가 제정한 '입치치발구중료치영업자 취체규칙'은 치과에서 사사받은 증명서만 첨부하면 입치업을 허가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통감부는 일본에서는 불법화한 입치사들의 영업을 조선에서는 합법화하는 식민지 의료정책을 펴나갔던 것이다.

반면 한국 정부는 외국인 의업자들의 진출에 대한 보호책으로 외국인 부동산 소유 및 임대와 영업을 제한했다. 이에 일본인은 한국인을 고용해 그의 명의로 영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자 일본인 치과의사나 입치사들의 조수로 들어가 사사받은 한국인 입치사들이 탄생했다.

최승룡(1907)을 시작으로 안중수(1907), 김한표(1908), 신정휴(1908) 등이 그들었다.

이들은 주로 한국인 상권의 중심이었던 종로에 '잇방(牙房), 齒術院, 이해박집, 치과병원' 등의 간판을 걸고 개업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이들을 우대하고, 비상하게 존경했으며, '상당한 수입'도 보장됐다.

이와 같은 한국인 입치사들의 등장과 한국인들의 환대는 통감기 민족주체성을 가지고 근대 치과의료 기술을 수용하고 이를 상업적으로 육성시키려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적 치과의료 침탈과정에서 등장한 한국인 입치업자들이 지닌 한계와 부정적인 측면도 주목해야 한다.

첫째, 한국인들이 치과진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기 전에 상업적인 입치문화를 성행시켰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부자, 멋쟁이, 기생들이 보건적 목적이 아닌 장식적 목적, 즉 장식도구로 알고 뻣내기 위해 중절치, 측절치 등 건전한 치아에 금으로 전부금관, 또는 개면(開面)금관을 해 씌우고 뻔적뻔적 거리며 다니는 것이 현재 다이야 반지나 끼고 다니는 정도로 유세했고 20년간이나 유행'이 지속됐다. 진료 수가도 높아 주로 서울이나 지방의 유력자들이 이들에게서 치료를 받았다.

둘째, 학문적 한계이다. 이들은 도제교육을 통해 보철물기공술(개면금관, 모리손금관, 인레이, 고무상의치, 국부가철의치, 납착방식의 계속가공치)만을 익힌 수준이었다.

최승룡의 경우, 나무의자와 2-3가지의 기공 및 발치기구, 아이오다인 등의 약제만을 구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치료내역은 보철물제작과 흔들리는 치아를 마취 없이 발치하는 정도였다.

셋째, 입치사들이 지닌 사회적 의식의 한계이다. 한국인 입치사들간의 기술전수는 있었으나, 스스로를 정규치과의사로 승격시킬 수 있는 추가적 교육이나 시험신청조차 할 줄 몰랐다. 또 한국인 구강보건위생계몽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거나 치의학문을 발전시킬 내적 동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인 입치사들은 한국의 근대적인 치과의료체계 마련에는 아무런 견인차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비정규적인 치과의료인력으로 남게 되었다.

이주연(세브란스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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