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씨라는 백성의 시에 운을 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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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씨라는 백성의 시에 운을 빌려…
  • 송학선
  • 승인 2016.09.3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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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밝송학선의 한시산책 26] 제복령사벽題福靈寺壁 차설씨민운次偰氏民韻 설씨라는 백성의 시에 운을 빌려 복령사 벽에 쓰다 /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1410태종10-1481성종12)
(ⓒ송학선)

제복령사벽題福靈寺壁 차설씨민운次偰氏民韻 설씨라는 백성의 시에 운을 빌려 복령사 벽에 쓰다 /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1410태종10-1481성종12)

산사심유일山寺尋遊日 산사를 찾아 노니는 날

추풍목락시秋風木落時 가을바람에 낙엽 진다

창허승결납窓虛僧結衲 창은 비었는데 스님은 장삼을 깁고

탑정객제시塔靜客題詩 탑은 고요해 손은 시를 짓는구나

취백상유수翠柏霜猶秀 푸른 잣나무는 서리에 오히려 빼어난데

한화만욕미寒花晩欲微 차가운 꽃은 저물녘이라 희미해진다

지청무몽매地淸無夢寐 땅이 (달빛에) 맑아 잠들지 못하고

수득갱훤사誰得更喧思 누가 얻는가, 다시 시끄러운 생각

복령사福靈寺는 건립 시기는 신라시대이며 소재지는 경기도 개성시(현 황해북도 개성시) 송악산에 있었던 절이랍니다.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박은朴誾의 시를 통해서 볼 때 신라시대에 창건되었고, 서천축국西天竺國에서 왔다는 불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숙종肅宗 때부터, 특히 고종高宗 이후에 왕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발전하였답니다. 숙종은 1100년(숙종5) 8월에 이 절로 행차하였고, 고종은 1245년(고종32)부터 그가 죽은 1259년까지 매년 건성사乾聖寺와 함께 이 절에 행차하였다고 합니다. 원종元宗 또한 즉위 초부터 1268년(원종9)까지 매년 이 절에 행차하였는데, 고종이나 원종이 주로 3월과 9월에 이 절에 행차한 것으로 되어 있어 왕실과 관련된 인물의 원당願堂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 뒤에도 충열왕忠烈王이 5번, 충숙왕忠肅王이 2번, 충목왕忠穆王이 1번, 공민왕恭愍王이 5번 행차하였다고 합니다. 이 중 충렬왕과 공민왕은 주로 공주와 함께 행차하였으며, 특히 공민왕은 1353년 4월과 9월에 공주와 더불어 불공을 드리기도 하였답니다. 폐사연대는 미상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기로 조선 중기까지는 존립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절에 관한 김극기金克己, 조위曹偉, 박은朴誾의 시가 전하고 있습니다.

김수온金守溫(1410태종10-1481성종12)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요 학자입니다. 본관本貫은 영동永同이고 자字는 문량文良, 호號는 괴애乖崖 또는 식우拭疣를 썼습니다. 괴애乖崖는 ‘벼랑에서 떨어진 놈’이란 뜻이지요. 식우拭疣는 ‘혹 또는 사마귀를 깨끗이 닦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인연이 깊었습니다. 절에서 부터 궁궐까지 정희왕후 곁에서 늘 일하였답니다. 세종 때의 국사였던, 신미대사信眉大師 김수성金守省의 아우입니다. 세조비 자성대왕대비의 섭정을 추진하였고,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없을 때 옆에서 정사를 논의한 정희왕후의 충신이었습니다. 좌리공신 4등으로 영산부원군에 봉해지고 관직은 1474년, 영중추부사에 이르렀습니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편찬 및 불경佛經의 국역 간행에도 공이 컸습니다. 시호諡號는 문평文平입니다. 저서에 《식우집拭疣集》이 있습니다.

이어서 아무개 이현주 목사께서 해 주신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지금은 방송국 피디 하고 있는 후배 녀석이 중학교를 다니다가 입산을 해 버렸어. 조숙했던 녀석이지. 이 녀석이 도봉산 천축사에서 동자승 노릇하고 있을 때인데, 하루는 모시고 있는 노스님이 ‘진성아 오늘은 내 밥은 할 필요 없다 네 밥만 해 먹어라’ 하시더라네. 그래서 혼자 해 먹었데. 그런데 다음날도 그러시더라는 거야. 한 두 끼도 아니고 굶고 계신 늙은 스님 두고 혼자 배불리 먹기가 영 찜찜해 눈치 보며 밥을 먹었다는 거라. 물론 왜 굶으시는지 말씀도 없으시고........ 그러다가 ‘이제는 내 밥도 해라’ 하시더란 거지......

그래 며칠 만에 공양을 마치시더니 ‘너, 내가 그동안 왜 굶었는지 아느냐?’ 하시더래. 모른다고 했더니, 글쎄 ‘수채에 부처님이 버려져 있는데 내 어찌 밥을 먹을 수 있었겠느냐’ 하시더라는 거라. 며칠 지나 새들이 먹었는지 수채에 밥알이 사라지니까 그제서야 공양을 하신거라네…

가르침은 이렇게 하는 거지. 정말로 밥알 하나가 바로 부처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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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밝 2016-10-18 17:51:04
많은 학자들이 이 시를 조선 최고의 시로 꼽더군요. 그래서 소개 합니다..... 부분 좀 지워 주세요..... 제가 착각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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