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거山居 산에 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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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거山居 산에 사노라
  • 송학선
  • 승인 2016.10.17 17: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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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밝송학선의 한시산책 27] 산거山居 산에 사노라 / 김구용金九容(고려高麗1338∼1384)
(ⓒ 송학선)

산거山居 산에 사노라 / 김구용金九容(고려高麗1338∼1384)

호연천지일광생浩然天地一狂生 드넓은 천지에 미친놈 하나

독와청산농명월獨臥靑山弄明月 홀로 청산에 누워 밝은 달 희롱한다

자소이래무세미自笑邇來無世味 근래에 세상맛 없어 절로 웃나니

죽근유수세심성竹根流水洗心聲 대나무 뿌리에 흐르는 물 마음 씻는 소리

김구용金九容(고려高麗1338충숙왕복위7∼1384우왕10)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어릴 적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또는 육우당六友堂을 씁니다. 첨의중찬 방경方慶의 현손으로 묘昴의 아들입니다.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하고,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일등을 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습니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습니다. 1367년(공민왕16) 성균관이 중건되자, 민부의랑겸성균직강民部議郎兼成均直講이 되어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해 성리학을 일으키는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후진들을 힘써 추천하고 교육하는 데 싫증을 느끼지 않았기에 비록 쉬는 날이라 하더라도 지식을 배우러 오는 여러 학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구용이 활동하던 시기는 원元과 명明의 교체기였는데 이때 고려는 원나라와 명나라에 양면정책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1375년(우왕1) 김구용이 삼사좌윤이 되었을 때 당시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이들을 맞으려는 이인임 등 권신들에 맞서 친명파인 이숭인, 정도전 등과 함께 반대하다 죽주竹州로 귀양을 갔습니다. 얼마 후에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는데 산수경치가 좋은 곳에서 시와 술로 낙을 삼으며 자기 거처에 편액을 달아 육우당六友堂이라 하였습니다. 육우당은 천령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위치를 알 수 없습니다. 육우六友란 설월풍화雪月風花에 강산江山을 더한 것이라 합니다. 천령은 김구용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비록 귀양살이이긴 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김구용을 부러워하며 이색李穡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경지敬之는 어머니를 모시는 틈틈이 강에서 배 타고 짚신 신고 산에 올라 낙화를 세고 청풍에 눈을 밟고 중을 찾고 달을 마주하고 손님을 청하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한 극치에 달했다. 경지는 일세에 독보獨步하는 분이다.”

김구용은 1381년(우왕7)에 좌사의대부가 되자 8왕비 3옹주를 거느리고 있던 우왕의 절제 없는 행동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직간하는 기개 있는 선비였는데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가 얼마 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습니다. 1384년 행례사로 명明에 가면서 국서와 백금 100냥, 세모시와 삼베 각 50필을 가지고 가다가 요동에서 명의 도성인 남경南京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는 다분히 명明과 원元의 알력으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김구용은 명 태조의 명령으로 대리위大理衛(지금의 운남雲南)로 귀양 가던 중 노주濾州 영녕현永寧縣에서 병을 얻어 47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1899년(광무3)에 편찬한 『여주읍지驪州邑誌』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는 사장詞章을 잘해, 특히 시로 유명하였습니다. 이색李穡은 그의 시를 가리켜, “붓을 대면 구름이나 연기처럼 뭉게뭉게 시가 피어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동문선』에 그의 시 8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무창시武昌詩가 유명합니다. 허균許筠은 이 시를 들어 청섬淸贍하다 하였고, 신위申緯도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그의 시를 들어 감탄하고 있습니다.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찬했으며, 문집인 『척약재집』이 전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의 용장서원龍章書院에 배향配享되었습니다.

며칠 이태리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아들 녀석이 제 엄마 환갑이라고 싼 비행기 표를 용케 구했길 레 손주 녀석 까지 데리고 다녀온 여행이었습니다. 황당스럽고 희한한 나라 소식을 멀리서 페북으로만 접하느라 죄송스럽기 짝이 없더군요. 투스카나 지방을 둘러보고 로마로 돌아온 다음날이었습니다. 바티칸 박물관을 가겠다고 주먹밥 도시락을 싸서 일찍 서둘러 나왔더니, 세워둔 차가 없어졌네요. 헐! 옆 아파트에서 할아버지가 내려다보며, 견인차가 끌고 갔다고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 해 주십디다. 그제야 장애우 주차선 안에 차를 세운 잘못을 알았습니다.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리 저리 힘겹게 주인집 아줌마의 도움으로 택시를 불러 타고 차를 견인한 곳을 찾아가니 아주 먼 공항 근처 시골구석이더군요. 견인 거리를 계산한 비용에 하룻밤 묵은 비용 그리고 견인한 사람 인건비에 세금까지 200 유로가 넘는 돈을 물어내고 차를 찾아 예약 시간을 넘겨 바티칸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그래도 이태리 여행 네 번 만에 바티칸 박물관은 잘 구경 했습니다. 혹 이태리에서 차 운전 하시거든 노란 선을 주의 하십시오. 그리고 높은 곳에 자그맣게 세워져 있는 장애우 주차지역 표시가 없는지 꼭 확인 하시구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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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밝 2016-10-18 17:49:24
<다소 엉뚱한 세상 바꾸기 제안 하나!>

건치신문이 주도하여 젊은 미술인들과 문화 창달暢達의 새로운 연대 방식을 만들어 봅시다.

졸업 작품 제출을 끝으로 막막한 사회 현실 앞에 창작의욕을 잃어가는 젊은 미술 학도들에게 우리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시장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창작의욕을 고취 시키는 작업을 제안 합니다.

1. 우선 각 대학 미대 졸업전시 정보를 확보하고 공유한다.
2. 젊은 미술인들의 창작 의욕이 지속되도록 지속적 문화시장을 형성한다.
3. 새로운 사조나 정보를 공유할 문화 아카데미를 만든다.
4. 점차 젊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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