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에서 신해혁명과 굴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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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에서 신해혁명과 굴원을 만나다
  • 김광수
  • 승인 2016.11.10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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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의 중국기행⑪] 신해혁명과 굴원

이번 여행기에서 김광수 원장은 중국의 중심에 위치한 무한에서 여행을 이어간다. 이곳에서 그는 중국 근현대역사 사건인 신해혁명과 기원전 278년 전 사망한 중국의 정치가 '굴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랜 역사가 켜켜이 쌓인 여행지에서, 여행자가 바라보는 중국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교차다.

-편집자-

 

지난번 (11차) 무창(武昌)에 있는 홍산의 차밭을 이야기하는 중에 자희태후(서태후)와 광서제 이야기가 나왔는데, 배다른 자식이라는 것은 나의 오류이고, 조카라고 한다.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同治帝)가 6살부터 13년간 황제를 하는 동안 섭정을 했고, 동치제가 18살에 죽어버리니까 세 살짜리 조카를 황위에 앉힌 것이다.

▲서태후 (자희 태후)

또 서태후가 광서제(光緖帝)를 독살했다고 했는데, 그건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다만 청년이 된 27세의 광서제가 1898년 청나라의 국권회복과 외세배격, 근대화를 위해 강유위와, 담사동 등과 내부혁명을 기도했다. 그것은 물론 우선 서태후로부터 권력을 되찾는 일이 우선되는데, 이러한 황제를 중심으로 한 내부 쿠테타가 성공했다. 그것을 변법자강이라고 한다.

그러나 100일만에 외세와 위안스카이 등의 군벌을 끌어들인 서태후의 반격에 의해 청나라의 부국강병과 근대화는 결정적으로 좌초된다.

그 결과로 서태후는 광서제를 이화원에 있는 작은 방에 죽을때까지(10년 동안) 유폐시킨다(독살시킨거나 다름없다...). 광서제가 죽고, 마지막 황제 푸이가 선통제(宣統帝)로 즉위하고 그 다음날 서태후가 74세로 죽는다(1908).  그 10년 동안 서태후는 자신의 사치한 생활을 계속 누리기 위하여 청나라를 외세에 거저 갖다 바친다(12개 조칙의 수용).

대충 다시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청나라가 망하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마지막 황제 푸이가 황제 자리를 누리는 것은 3년인데, 왜냐하면 1910년 바로 이 무창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그것이 커져서 신해혁명이 되고, 손문을 중심으로 공화국(중화민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산에서 내려와서 그 무창봉기, 신해혁명의 총 지휘본부를 찾아간다.

신해혁명 박물관
▲ 무창기의군 정부 옛터
▲무한정신= 감위인선  추구탁월=  용감히 국민을 위해 먼저 월등히 추구한다.
▲손중산(손문) 선생님

▲악군 도독 려원홍  한구전선에서 = 여기에서 혁명군을 악군이라고 했다.  여기가 악주, 송나라때 악비를 악왕으로 봉했었다. 

동호로 가는 길에 동호 옆에 있는 호북성 박물관에 들렸다. 박물관은 크고 볼 것도 많지만 읽으시는 분들이 재미없어 하실 것 같다.

▲웅십력

웅십력(熊十力-슝스리)이 여기(황강) 출신이다. 웅십력이 누구냐구? 북경대학 철학교수로서, 개화기 때의 대표적인 중국 철학자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양인산과 그의 제자 우양경무가 세운 지나내학원 출신이다(남경에 있었다). 지나내학원은 잠자던 중국불교를 일깨운 중국 최초의 근대식 불교대학이다. 특히 유식학 연구가 강했던 곳이다.

웅십력이 북경대학 교수로 가서는 이 불교를 배반하고, 신유식학을 주창하면서, 결국 불교의 유식학이란것도 전통 중국사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은 중국의 체상용철학, 음양 무위의 철학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신유식(新唯識)이라고 했다.

즉 신유식은 유식불교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유식을 빌미로 중국전통철학을 선양하는 것이 목표다. 이에 대해서 당시 불교지식인들은 이에 반발하고, 약 20년에 걸쳐서 웅십력과 논쟁했다. 무창, 무한은 정말 중국의 한가운데다. 중원(中原)이다.

 

이곳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전진기지이고, 삼국시대 오나라의 전진기지이고, 초한지의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맞서는 전선의 중심지였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량이 형주(荊州)를 차지하는 자가 중국을 차지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고, 양양을 탈환하겟다는 부분이 자주 나오는데, 형주, 양양이 모두 이 지역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지역을 형초(荊楚)라고 한다. 이 지역이 초나라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라서,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의 입상도 동호에 만들어 놓고, 굴원 기념관도 동호에 만들어 놓았다. 이제 동호로 이동한다.

 
 
 
 
 
 
 

다음은 굴원의 기념관과 입상을 볼 차례다.

 
 
 
 


원래 굴원이 자기 몸에 바윗돌를 매달고 물에 빠져 죽은 지역은 멱라수이다. 그것은 호남성의 장사에서 악양 가는 길의 오른 편에 있다. 당연히 동정호로 들어가는 물길이다. 무창은 호북성이지만 여기는 호남성이다. 호수의 남쪽, 북쪽? 그 호수는 바로 동정호이다. 그 정도로 동정호는 크다. 거의 바다 수준이다. 그 지역이 모두 초나라였다.

이 호남성의 중심은 장사. 여기서 반골들이 다 나왔다. 공산혁명의 중심인물들, 모택동 등등이 다 호남성 출신이다. 옛날로 치면 초나라 지역 출신이다. 이름도 우리나라 호남(湖南)과 같다.
 
원래 한나라 이후로, 이 초나라 지역을 오랫동안 차별했다는데, 그것은 한나라 황실이 항우의 지역기반인 초나라 지역이 또다시 세력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서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이러한 지역차별은 계속됐는데, 그것이 모택동 들이 출현하게 된 원인이라고도 하는데, 그거야 설명하기 나름이다. 하여튼, 그래도 굴원의 죽음은 초한지의 항우 유방 이야기가 나오기 훨씬 전이다.
 
한구(漢口)는 서양지배 때 조차지였다고 한다. 7개국이 모두 들어와서 자기네 땅이라고 했다는데, 그래서 옛날 서양식 건물들이 많다고 한다. 지금은 거기가 패션 스트리트가 되었다. 무한의 젊은 애들이 밤에 나와 노는 대표적 지역이 됐다.
 
무창 지역을 벗어나서 조차지인 한구지역 시내로 이동한다.

▲김밥천국도 중국에 오면 이렇게 고급이 된다. 문 밖에서는 지배인이 종업원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그래도 번화가에 와서 국수 신세를 벗어났다. 토마토 탕이다. 중국에서는 도마도가 야채이다. 밥 반찬이고.
 

내일은 한양 지역을 간다. 한양 지역에서 귀원사, 그리고 고금대를 가볼 참이다. 고금대가 뭐냐구? 지음(知音)의 고사가 들어있는 곳이다. 기대하시라.

▲유스호스텔의 침대는 대충 이러하다. 

서양 사람들이 들어오면 무척 시끄럽다. 예의도 없고, 경우도 없고, 아주 매너가 나쁘다. 누가 서양인들을 교양있다고 칭찬하는가. 서양 사람들에 대한 사대의식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환상을 깨기에 충분하다. 서양물 먹은 지식인들의 낯 간지러운 찬사와 그들의 열등감을 발가벗기자.

▲어떤 이의 낙서

티벳을 비롯해서 무척 많이 다녔다는 자랑이다.
여기는 여행 선수들이 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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