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타락한 권력을 폭풍처럼 휩쓴 혁명가!
상태바
부패·타락한 권력을 폭풍처럼 휩쓴 혁명가!
  • 송필경
  • 승인 2016.11.28 19: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논설] 송필경 논설위원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 2016년).

우리나라에서 부패하고 타락한 권력에 대해 사상 최대의 촛불을 든 11월 26일, 20세기 혁명가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피델 카스트로가 90세 일기로 영면했다.

1956년 12월 2일,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를 포함한 쿠바 원정대 86명은 조그만 배 그란마(Granma)호를 타고 멕시코를 떠나 미국의 괴뢰가 득실거리는 쿠바에 상륙했다. 때마침 불어 닥친 폭풍과 정부군의 공격으로  86명 중 22명만 살아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악에 들어가 둥지를 틀었다. 고작 22명만으로 무장 혁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신출귀몰의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실은 카스트로 일행 뒤에는 저항의 훌륭한 버팀목이었던 학생, 노동자, 공무원 등이 도시에 구축한 강력한 조직의 지지가 있었다.
카스트로는 산악에서 군대를 조직했고 1958년부터 산악지역에서 평지로 이동하며 여러 마을을 장악했다. 1959년 1월 1일에 카스트로 군대는 수도 아바나에 입성해 미국 마피아의 하수 조직이었던 바스티타 정권을 몰아냈다.
 
20세기를 가로지른 제3세계혁명 가운데 그 품격의 수준을 따지자면 단연 베트남 혁명과 쿠바 혁명이 으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쿠바 역시 베트남처럼 미국에게 고통을 받았고 미국 앞잡이와 싸워 기어코 이긴 나라이다.

카스트로가 쓴 변론집인 <아바나 선언>의 서문을 쓴 타리크 알리(Tariq Ali)는 세르반테스의 말을 인용했다.
『돈키호테: 그래서 너는 지금껏 먹여준 주인에게 감히 저항하려하는가.
산초; 나는 왕을 추대하지도 폐위하지도 않는다. 단지 스스로 서려 할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인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종이 순순히 처벌에 응하지 않을뿐더러 오리려 주인의 무릎을 꿇린다면 주인은 얼마나 놀랄까? 산초의 무례하고도 간결한 표현에는 쿠바 혁명의 전말이 모두 담겨있다고 타리크 알리는 말한다. 주인이나 왕을 미국으로 바꾸어 주면 쿠바의 역사적 상황과 그렇게 똑같을 수 없다.

쿠바혁명이나 베트남혁명 같은 것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쿠바혁명이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같은 피 끓는 젊은 천재들의 무한한 용기에 힘입어 전광석화 같이 성공한 줄 알았다. 100년이나 걸린 베트남혁명과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쿠바 역사를 공부하면서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배 호세 마르티(1853-1895)가 뿌린 씨앗이 한 세대를 지나 수확을 일군 것을 보고, 번개에 콩 볶을 수 없고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씨 뿌리지 않고 혁명을 꽃피울 수는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호세 마르티(1853-1895)는 우리나라로 치면 최제우와 전봉준을 합친 인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53년 27세 청년 카스트로는 200여명의 청년을 모아 몬타나 병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려다가 체포 되어 재판을 받았다. 반란의 배후가 누구냐는 취조에 카스트로는 60여 년 전에 사망한 ‘호세 마르티’라 꿋꿋하게 말했다. 법정 최후 진술에서는 “나에게 유죄를 선고하라, 그러나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독재 권력의 법정은 이 젊은이를 뚱딴지로 취급하여 1955년 멕시코로 추방했다. 멕시코로 간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를 만나 1956년 12월에 함께 쿠바로 돌아왔다. 
 
쿠바혁명의 성공은 호세 마르티와 같은 선열들이 흘린 피가 역사의 거름이 되어 후손들이 그 토양에서 힘찬 근육으로 노동했기 때문에 혁명의 나무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항거하고 투쟁하며 단합을 되풀이 하는 과정에서 민중은 험난한 고통을 견디며 자기발전의 길을 걸었다. 쿠바 혁명을 공산주의 이념의 단순한 실현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치졸하다. 이들 혁명의 성공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확대를 위해 단절 없이, 주체성 상실 없이 역사에 민중의 저력을 축적한 결과였다.

호세 마르티 후예들인 쿠바 민중은 마약과 매춘이 춤추는 미국의 뒤뜰이 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영화 ‘대부2’를 보면 마피아가 지배하는 쿠바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카스트로 일행은 1957년부터 작은 승리를 거두며 58년에는 기지를 더 마련하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59년 1월 1일, 호세 마르티의 후배들은 인간을 착취하는데 능수능란한 미국 마피아의 등에 업힌 바티스타 독재 권력을 무너뜨리고 호세 마르티가 그토록 염원했던 혁명의 꽃을 피웠다.

선배 못지않게 훌륭한 이 후배는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선배의 거룩함을 기리기 위해 쿠바의 하늘 관문을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라 부르고, 아바나 시내 중심 광장을 호세 마르티 광장이라 이름 짓고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탑과 동상을 세웠다. 나는 이제 쿠바를 생각하면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보다 호세 마르티가 먼저 떠오른다.

"이제 아메리카의 산과 들에서, 산등성이와 평원과 정글에서, 황야와 도시의 번화가에서 이 세계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폭발하고 있다. (…) 이제 그들은 야만적인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중이다. 왜냐하면 이 위대한 민중이 '그만하면 됐다'고 말하고 행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행진은 진정한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결코 굴복하지 않는 진정한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조국 아니면 죽음을! 앞으로 전진!"

이것은 1962년 2월 4일 쿠바 민중들이 채택한 '제2차 아바나 선언'의 마지막 문구이다

대체로 카스트로 하면 좌익 독재자들 중 하나 정도로 여기는데, 그의 출발점은 사실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그는 미국 마피아들과 손잡은 바티스타 군부 정권에 맞서 혁명적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며 정치 역정을 시작했다. 유명한 법정 변론인 '아바나 선언'에는, 예상 외로 '좌파'라는 꼬투리를 달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 '아바나 선언'을 출간하며 서문을 쓴 파키스탄 출신의 신좌파 저술가 타리크 알리에 따르면, 1958년 혁명 당시에도 카스트로는 아직 신념 있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살아서 역사와 전설의 세계로 들어와 영광을 누린 사람은 거의 없지만, 카스트로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국제 정치의 마지막 ‘거룩한 괴물’이다. 그는 넬슨 만델라, 호찌민, 파트리스 루뭄바, 아리카르 카브랄, 체 게바라, 카를로스 마리겔라, 카밀로 토레스, 투르시오스 리마, 메디 벤 바르카로 대표되는 신화적인 반란자의 세대에 속한다. 이 반란자들은 정의라는 이상을 추구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불평등과 차별로 얼룩지고, 소련과 미국이 시작한 냉전을 특징으로 삼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과 희망을 가지고 정치활동에 전념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미국 민중에게 행해진 9․11테러공격에 깊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카스트로의 이 말은 자칭 목사라는 김홍도의 저질 저주 발언인 “쓰나미 희생자들은 예수를 믿지 않아 희생을 당했다”와 비교해 보면 그 품격을 느낄 수 있다.
미국에 대한 카스트로의 발언들은 의외가 꽤 있다. “여기서 미국 민중을 우습게 여기는 말 한 마디라도 발견하면, 내 손을 잘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양국 정부의 차이를 미국 민중의 탓으로 돌린다면, 우리는 무지한 광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쿠바에서는 특정 개인을 공식적으로 숭배하지 않는다. 비록 카스트로의 모습은 언론과 방송,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공식적인 초상화나 동상은 없으며 동전도 없다. 카스트로를 기념하는 거리나 건물 혹은 기념탑도 없다. 아직 살아 있는 그 어떤 혁명의 지도자들에게 헌정하지 않았다. 대신 죽은 동지인 체 게바라에 대한 기념물은 제법 있다.

외부의 압박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지만, 주권을 고집하는 이 조그만 섬나라는 인종주의 철폐, 여성해방, 문맹 추방, 유아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 일반적인 문화수준의 향상 등 인간 차원의 진보에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과를 얻었다. 교육과 건강, 의료와 스포츠 연구 분야에서 쿠바는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국가 그룹에 속할 정도이다.

쿠바 혁명은 분명한 문제들-경제적 난관, 비효율적인 거대 관료주의, 일반화된 소규모의 부정부패, 가난, 전력 부족, 교통문제, 배급제, 힘든 일상생활, 특정 자유의 제한-을 안고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프롤레타리아는 교육과 의료 분야의 성공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그에 비해 동유럽은 외부에서 강요한 체제이고 민중 대부분이 혐오한 체제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카스트로의 정적들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지만, 쿠바인들은 대부분 혁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 이게 쿠바의 정치적 현실이다.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것과 반대로, 이런 충성심은 미국 제국주의 혹은 병합주의 야심에 반대한 역사적 저항에 뿌리를 둔 민족주의에 근거한다.

카스트로는 의학이 발전되기를 뜨겁게 소원했다. 의학의 발전은 아이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리고 수천 명의 쿠바 의사들이 많은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다. 인도주의적 동정심과 국제주의적 협력으로 똘똘 뭉친 그의 야심은 전 지구에 건강과 지식, 의학과 교육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터무니없는 꿈은 결코 아니었다.
카스트로는 돈키호테를 자신의 고귀한 희망과 정의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행동하는 인물로 여겼다. 이로써 그는 ‘위대한 혁명은 오로지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라는 체 게바라의 말을 종종 떠올렸다.

카스트로는 기독교를 자주 언급했다.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고, 물고기들과 빵의 개수를 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물고기와 빵을 몇 배로 늘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는 특정 순간에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장사치들에게 채찍을 내리쳐서 그들을 사원에서 쫓아냈습니다.“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 나를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나 역시 기독교인이라고 확신합니다.”
“기독교는 야만의 시절에 나온 최초의 교리였고, 거기에 아주 인간적인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 윤리적 가치와 사고가 이바지한 사회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태여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데올로기에 엄청난 혼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거와 매우 다릅니다. 위대한 사회정치사상가들의 지식은 우리가 혁명사상을 갖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그들이 장기적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저개발과 질병과 문명과 싸우지만, 인류문제를 전 지구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국가적 토대에서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전 지구적 기초,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것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노예주의적이며 봉건적이 될 수도 있는 지배-수탈적 법칙을 설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지배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 지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카스트로는 바로 미국의 턱 밑에서 󰡒미국은 인류의 시체를 파먹고 사는 독수리󰡓라고 비난했다. 또 세계화에 대해 이렇게 일갈했다. 󰡒자본주의는 타락을 가져온다. 쿠바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악덕(惡德)과의 접촉을 통해 더 많은 면역성을 기를 수 있다면 우리의 도덕은 그만큼 강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세계사적 인물에 대해 평가가 짠 편이다. 체 게바라의 대중적인 인기가 상대적으로 더 높아서 일까? 내 나름으로 혁명의 질적 수준을 굳이 평가한다면 카스트로가 대학생이라면 체 게바라는 중학생 수준에 불과하다고 본다.

카스트로가 비록 영면했지만 쿠바를 둘러싼 카리브 바다의 햇살은 언제나 부드럽게 비칠 것임은 분명하다.

1969년 베트남 호찌민이 서거하자, 아바나 주재 베트남 대사관이 마련한 빈소에서 혁명의 선배에게 조의를 표하는 카스트로.2008년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쿠바 특별 사진 전시회가 열렸을 때 찍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