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고민이 혁신적인 제품의 원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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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고민이 혁신적인 제품의 원료죠”
  • 안은선 기자
  • 승인 2017.01.06 16:1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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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용이 만난 사람들] ⑮ 열정의 연구‧개발자… (주)네오바이오텍 허영구 대표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으로 뭇 개원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주)네오바이오텍(이하 네오)는 2000년 2월 창립된 회사로, 본격적으로 임플란트 사업에 뛰어든 2007년 이후 지금까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단 시간 내에 임플란트 업체로 개원가에서 인정받는 데에는 개원의의 어려움을 십분이해한 제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공동대표로, 연구‧개발자로 또한 임플란트 명연자로 주목받고 있는 허영구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006년 먼저 ‘오스케어’란 임플란트 회사를 설립한 허 대표는, 기술자문으로 인연을 맺어 온 네오 측의 제안으로 2007년 회사를 ‘네오’이름 그대로 인수합병했다. 네오가 임플란트 회사로 이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전민용의 만남 열다섯번 째 인터뷰이로 만난 허영구 대표는 한사코 대표라는 호칭보다는 ‘원장’으로 불러주길 바랐다. 자신의 정체성을 기업인이 아닌 한 사람의 치과의사로 연구자로 두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전민용이 만난 허 대표는 자신을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사람’이라고 한 없이 겸손함을 보이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잘하는 것을 더 잘하고 싶은 연구자이자 열정적인 치과의사였다.

네오 허영구 대표를 지난 19일 강남 한식당에서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편집자

▲본지 전민용 대표가 허영구 대표원장과 인터뷰 하고 있다.

경쟁이 싫어 택한 ‘치과의사의 길’
소심한 소년에서 사업가가 되기까지
붕어빵 장사‧접시닦이…안 해 본 일 없어

- 반갑습니다. 실례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죠?

“단국대학교 82학번입니다. 3년 늦게 입학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79학번이죠”

- 처음부터 사업가로 시작하신 건 아니죠?

“네,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졸업하고 바로 제천으로 가서 페이닥터로 시작했어요. 원장님이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는데 절 많이 좋아해 주셨죠. 밤까지 붙잡고 술도 사주시고 (웃음). 사실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2달 만에 의령으로 페이닥터 자리를 구해서 도망쳤죠”

- 의령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제가 막낸데, 치대 졸업할 때까지 부모님이 고생을 많이 하셔서 같이 살고 싶어서 원래 고향은 안양인데 모시고 가서 함께 살았습니다. 88년 당시 첫 월급이 120만원 이었는데 정말 굉장했었죠. 이 돈이면 부모님 봉양도 할 수 있겠다 싶었죠. 페이닥터 시작하고 3개월 만에 결혼도 했습니다.(웃음)

- 듣기로는 굉장히 크게 치과를 하셨다고 하는데요.

“사실 그 치과가 알고 보니 사무장치과였습니다. 결혼하고 신혼여행 갔다가 돌아오니까 그 오너(사무장)가 구속돼 있더라구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 면허대여자로 검사 앞에서 섰죠.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래도 검사가 정상 참작해 줘서 그냥 풀려났죠”

- 다행이네요.

“이후에 인수 제의가 들어와서 당시 2천만 원을 주고 치과를 인수했습니다. 치과가 잘 된 건 사실 당시 의령에 치과가 거기 밖에 없었거든요(웃음). 지금이야 뭐 병원이다 뭐다 많지만 당시엔 병원도 없고 치과는 더더욱 없었을 때니까요”

- 젊었을 때부터 사업가 기질이 있었나요?

“아뇨. 집안도 가난하고 똑똑하지도 않고…내가 뭘 하겠나 자신감 없는 사람이었어요”

- 강연 같은 것도 많이 하시고, 유명하신데 의외네요.

“그건 제가 잘 아는 분야니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거죠”

- 겸손하시네요. 그래도 사업시작하신지도 얼마 안됐는데 이렇게 사업을 일으킨 것을 보면 대단하신데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만나 얘기해 보면 자신을 외향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더라구요. 변호사들 조차두요.

▲허영구 대표

“그런 성격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들 앞에서 외향적으로 보이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요. 사실 비즈니스라던가 강연이라던가 하는 건 제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에요. (웃음) 사실 치과의사가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워낙 소심하니까 어디 취직도 못할거라 생각도 했고, 경쟁해서 남 밟고 올라가는 것도 스트레스 받고. 의사는 내 일만 충실히 하면 되니까.

지금도 비즈니스를 안 하려는 입장이에요. 그건 김인호 대표가 또 잘 해주시고 있으니까. 저는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에 충실하려구요. 막 회사가 잘 되고, 개발해서 내는 것 마다 호응이 있으니까 허 원장은 비즈니스도 잘한다고 생각하던데 그건 아니구요“

- 정혜신 박사가 성공한 CEO에 대해 연구 한 걸 보면 여러 가지를 잘해서 성공한 사람보다는 뛰어난 ‘한 가지’로 성공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허 원장님도 연구개발을 잘 하시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 허 원장님은 젊은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요?

“조숙했던 거 같아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다는 걸 초등학교 1,2학년 무렵에 깨달았어요”

- 정말요?

“그 때부터 세상엔 나 혼자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그 때문이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어렵게 살았던 것 같아요. 그 때 아버지 사업이 어렵기도 해서 더더욱 독립심이 커졌죠. 그리고 어렵게 치대에 합격 했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그런데 제가 치대에 합격한 걸 부모님은 그리 기뻐하시진 않았어요. 아버지가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고, 포기하면 안되겠냐고 하셨을 때 첫 학기 등록금만 내달라고 했어요. 나머지는 알아서 벌어서 졸업하겠다고. 그렇게 설득을 해서 등록금 70만원을 받아서 치대에 입학했죠“

- 당시에 치대 등록금을 벌면서 공부하는 학생은 드물었는데 대단하시네요.

“모든 짐을 싸들고 천안에 내려 간, 그 작은 방에서 진정한 제 삶이 시작된 것 같아요. 그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돈도 벌어야 했고”

- 과외 알바라던지 하시지 않았나요?

“어쩌다보니 과외는 본과 4학년 돼서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 전에는 소위 말하는 노가다를 했죠. 그 때 신사동 영동호텔에서 접시 닦는 알바부터 시작했죠. 허리도 못 펴고 접시 열심히 닦았죠. 그 때 적어도 한 달에 30만원은 벌어야 생활비도 하고 등록금도 모을 수 있었는데, 호텔에서 돈을 안주더라구요. 3개월은 수습이니 무급이라나? 어이가 없어서 때려치고 나왔어요”

-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화가 나서 신사동 골목을 헤매고 다니다가 당시 ‘스탠드 바’라는 곳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당장 일은 해야겠고, 거기서 서빙 알바를 시작했어요. 공연 끝나고 청소하고 그 바닥에서 잠자면서 일 했었요”

- 고생 많으셨네요.

“그래도 남는 게 있었어요. 그 때 비디오 촬영을 배웠거든요. 당시 바에서는 모든 공연을 찍어놓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비디오 프로그램 만지는 건 잘 하고 즐거워요”

- 또 다른 일을 해 보신 게 있나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안양 삼원극장 앞에서 붕어빵 장사도 했었어요. 어머니가 반죽과 팥소를 만들어 주시면 만들어서 팔았죠. 그 때 가격이 100원에 3개였나? 그랬었어요.

그 땐 젊으니까 두려운 게 없었던 것 같아요. 구두닦이도 하고, 그래도 등록금은 다 못 모아서 어머니께 조금 지원받기도 하면서 꾸역꾸역 휴학 한 번 안하고 졸업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 때 그 경험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 같아요“

 

궁극적인 건 없다 계속 변화만 있을 뿐
지치지 않는 연구‧개발이 후세 위한 ‘길’
혁신적 ‘임플란트’가 네오의 자존심

- 저도 노동운동 하면서 위장취업은 해 봤지만, 대표님은 더 대단하시네요. 대표님의 인생관이랄지 가치관은 어떤 건가요?

“제가 사실 기독교인인데, 그다지 기독교의 사상이 와 닿지는 않더라구요. 정말 신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대학생 때 신문편집 동아리에서 맑스나 헤겔을 공부하면서 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때 정리가 된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 변화‧발전한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 속에 나도 어떤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전체에서 보면 작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작은 하나의 계단을 쌓으면, 다음 후배들이 그것을 또 밟고 올라가 발전한다는 것을 인정 하게 됐죠“

- 일종에 본인이 하나의 어떤 경지를 쌓고, 그것을 다음세대로 물려주는 게 의무랄지 임무랄지 그런 생각이신건가요?

“네, 모든 건 변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고 내 뒤에 오는 사람들이 나의 작은 업적이 있다면 그걸 또 토대로 발전하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거죠. 깊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관념론과 유물론 중간에 있었던 것 같아요. 애석하게도 그 가운데서도 신은 없었지만요.

진료하면서도 마찬가지에요. 새로운 술식은 계속 나오고, 계속 발전하고 때로는 옮겨가기도 하죠. 계속 연구와 개발에 매달리는 것도 지금의 것이 궁극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분명히 만족스럽지 않은 날이 오니까요. 그래서 다음을 찾고 찾는 거죠. 그 연속된 것이 지금 제 삶이 됐습니다“

- 다시 좀 질문을 돌려서. 임플란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90년도에 처음 임플란트를 시작했어요. 초보 개원의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삶에 치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였거든요. 우연히 경남지역 임플란트 학회에서 임플란트를 처음 접했는데, 그게 찌든 일상의 서광이 비치는 일이었어요.

‘내가 할 건 저거다’란 생각에 학회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배웠어요. 그러다가 유학까지 생각하게 됐어요“

▲전민용 대표

- 유학은 어디로 가셨나요? 일본?

“미국으로 갔어요. 사실 일본으로 갈까 고민키도 했었는데, 이왕 하는 거 어려운 길을 택하자 해서 1993년도에 UCLA로 건너가서, 영어가 익숙해지고 1년 뒤에는 대학원 레지던트를 지원해서 보스턴 치대에 들어갔어요. 보스턴으로 가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다 데리고 갔죠. 거기서 5년간 공부했습니다”

- 보스턴 치대는 서울대에서는 일종의 코스처럼 많이들 갔었죠. 다시 들어오셔서는 다시 개원을 하셨나요?

“보스턴 있을 때 그동안 벌어 둔 돈, 치과 처분 한 돈까지 써버려서 돌아왔을 땐 뭔가 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어요. 하필 1997년에 IMF가 터진 상황이라 더 막막했죠. 그래서 카톨릭대에서 제안이 와서 교수생활을 했어요. 의정부 성모병원에서 일했습니다. 그 때 많은 교수님들을 알게 됐죠.

그리고 보스턴 임플란트 연구회인 ‘BAO’를 만들어서, 모여서 공부했어요“

- 교수 생활은 얼마나 하셨어요?

“2년 정도 했습니다. 교수를 그만두고는 의정부 쪽에서 5년간 개업하다가 청담으로 치과를 옮겨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7년에 네오를 인수해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죠”

- 그럼 회사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처음엔 회사를 운영한다던가 할 생각은 없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성격 탓에. 보스턴에서 돌아와서 1998년에 SCRP를 논문으로 발표했어요, 그리고 완성해서 2003년에 특허를 받았죠. 그게 미국에서는 주로 Screw타입의 임플란트를 심었는데 그게 스트레스가 너무 컸어요. 반대로 Cement 타입은 탈부착이 어려운 점도 있고… 그래서 두 개의 장점을 합쳐보자 해서 만들었죠.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그걸 계기로 여기저기서 강연 의뢰가 들어오고, 어버트먼트에는 원래 관심이 많기도 해서 ‘오스케어’란 임플란트 회사를 만들었어요. 그 때 만든 게 Sinus Quick, 그리고 Sinus Kit에요. 그게 히트를 치면서 전문적으로 생산할 공장이 필요해 지더라구요.

그러던 중에 당시 기술자문으로 있던 네오에서 회사를 인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큰 결심을 하고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 판단이 빠르고 과감하시네요.

“제가 어려운 일을 좋아하거든요”

- 인수하시고 어려운 일은 없으셨나요?

“인수할 때 사실 이름을 어떻게 할까 고민 많이 했어요. 오스케어로 그냥 할 수도 있었는데 ‘네오바이오텍’이란 이름이 너무 좋더라구요. 거기에 새로운 기술, 생명 그런 의미가 들어 있으니까. 제 삶의 모토와도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오’란 이름을 그대로 쓰기로 했어요.

문제는 망해가는 회사 이름을 그대로 쓰다 보니까 처음에 영업사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들한테 쫓겨나기 일쑤였죠. 그걸 극복하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좋은 제품은 언젠가 알아준다는 생각으로 더 연구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임플란트’ 하나는 내가 자신하는 거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같은 치과의사 동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제품을 개발할 기회라고 생각하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됐어요.

비즈니스 보다는 그게 더 컸어요. 노력한 만큼 또 알아주시는 분들이 생겨나고 제품도 성공하면서 몇 년 사이에 가파르게 성장했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누구나 노력과 능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죠.

“작은 기적들이 쌓여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능력 펼칠 수 있는 회사 만드는 게 꿈
투명하고 자유로운 회사문화 만들기에 고심
직원의 행복이 곧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것

- 네오는 어떤 회사인가요?

“자유로운 회사 문화를 만드는 게 목표에요. 자신의 생각을 언제나 격이 없이 말할 수 있게, 거기서 토론하면서 서로 성장시키는 회사문화를 지향하고 있어요.

김인호 대표가 그 점에서 잘 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김 대표는 ‘투명성’을 강조하거든요. 가리고 비밀이 많으면 회사 문화는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거든요. 감시하고 쥐어짜기 보다는 투명하게 공개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요“

- 네오 직원은 몇 명인가요?

“400여 명 정도입니다. 많죠? (웃음)”

- 아까 자유로운 회사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회사운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엇보다, 젊은 시절을 보내도 아깝지 않은 업무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에 따른 보상도 물론 후하게 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고(웃음).

저희 회사 사훈은 ‘회사는 사원들에게 물질적인 행복과 정신적 행복을 제공한다. 그것이 사회 발전에 기여한다’에요.“

- 네오 월급이 업계에서 높은 편인가요?

“평균보다는 높게 주는 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 아직은 계속 성장하는 단계라 생각만큼 주지 못하고 있지만요. 그래도 직원들이 여기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또 행복했으면 해요. 그리고 끝까지 함께 가고 싶어요. 그래서 더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은 거기도 하고요”

- 해외 진출도 많이 하고 있는데, 어떠신가요?

“올해까지 70개국에 진출했어요. 국내는 워낙 치열하다보니 매출은 사실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게 많습니다. 특히 올해 본격적으로 중국진출을 했고, 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임플란트 회사로서, 국내에선 2위를 달릴정도로 대단한데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지금까지 네오는 끊임없이 성장해 왔어요. 특히 2010년까지는 매우 가파르게. 지금은 좀 주춤하지만 매출액은 650억 정도로 다른 회사에 비해서는 낮은 수준이지만, 내일 당장 접을 게 아니고 사업은 길게 봐야 하는 거니까 성장하는 시기가 있으면 또 진통을 겪을 때도 있고, 변화가 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내부적으로 다독이면서, 내실을 기하면서 가는 거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회사 문화에요“

▲ 허영구 대표

- 네오 자랑 좀 해주세요.

“첫 번째는 지금까지 없던 제품을 만들어 낸다는 거에요. 같은 치과의사들이 인정하는 제품이 많아요. 예를 들면 사이너스 픽스쳐 리무버 키트가 있어요. 임플란트 식립시 뼈가 녹는 경우에 이걸 쉽게 제거하고 심고 또 뼈 이식 하는 게 힘들었는데 400뉴턴 이상의 힘이 가해지는 툴이 없었는데, 이걸 개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제품이다 보니 리스크도 크지만.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네오의 색깔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원들에게 계속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는 것, 능력이 아니라 사람에게 맞는 일을 찾아주고 끊임없이 격려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또 거기서 단련하고 계속 나아가는게 목표입니다“

- 김인호 대표와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데 어려운 점은 없으신지?

“김 대표는 사실 중‧고등학교 친구입니다. 제가 네오를 인수하고 몇 달 뒤에 영입했습니다. 그러고서 10년 째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 대표가 회사 전반적인 운영을 한다면 나는 제품을 개발하고 연구하니 갈등이 적은 것 같습니다”

- 지금 의원도 계속 하고 계신 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신제품 개발에 있어서 어려운 점은 바로 ‘임상 데이터’입니다. 의료기구다 보니 제품과 실제가 딱 맞아들어가기는 어렵죠. 그래서 그런 미스를 줄이기 위해서는 임상데이터를 확보하는게 중요해요.

계속해서 환자를 만나면서, 개원의로서의 애로사항을 계속 배우는 게 궁극적으로는 네오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내년부터는 주1회 하던 회사 출근을 좀 늘릴까 생각 중이에요“

- 연구하고 개발하는 데 특별한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특별한 건 없지만, 뭘 개발해야겠다. 이건 개선해야 한다. 생각하면 뭐 예를 들면 어버트먼트라고 하면 잘 때도 그걸 꼭 쥐고 잔다던지 해요. 꿈에서라도 제발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요(웃음). 그러면 정말 어느 날인가 꼭 그것도 새벽에 잠에서 깰 때쯤 불현 듯 아이디어가 떠오르더라구요. 거기서 여러 제품이 나왔죠”

- 그런 통찰력은 과학적으로도 근거 있는 이야기에요. 몰입하는 중에 아이디어가 번쩍 하고 떠오르는 거요.

“그렇군요”

- 앞으로 계획이라던지 바람이 있으시다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살아가는 거에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후배, 후손들의 발전을 위해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인생의 모토이고 또 원동력입니다”

- 앞으로도 좋은 제품으로 치과계 발전을 이끌어 주세요.

“같이 같으면 좋겠어요. 잘나서 이런 일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관계를 맺어갔으면 해요. 건치라면 언제나 OK입니다. 건치는 옆에서 서대선 원장이라던지 동문들이 활동하는 걸 봐왔고, 또 각 분야에서 사회가 잘 될 수 있도록 분투한다는 데 있어 저와 건치가 태생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고 싶어요”

- 저희야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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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사 2017-01-09 17:22:11
좋은 기사 잘 읽었습니다. 허영구 선생님의 성실함이 인터뷰 곳곳에 베어 있네요...

izalam 2017-01-09 11:20:05
말씀하신 내용 수정했습니다. 기사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혜진 2017-01-07 15:47:20
기사 잘 읽었습니다. 허영구 회장님의 끊임 없는 연구가 결과로 나타나 네오바이오텍의 눈부신 성장에 기여하신 바가 큰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더 큰 성장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사진 밑에... 2017-01-07 09:04:01
헝영구 대표로 오타 수정 바랍니다. 기사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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