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길을 따라가는 서울 과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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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을 따라가는 서울 과거여행
  • 조인규
  • 승인 2017.01.0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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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서울 성곽기행] 딜쿠샤에서 선바위까지

이번에 살펴볼 서울 성곽길은 '꿈의 궁전'이라는 뜻의 '딜 쿠샤'에서 시작한다. 딜쿠샤를 따라 오래된 성곽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 숨은 나무들과 옛 서울의 흔적이 도시 산책자들을 반긴다.

아울러 선바위를 통해 현대화된 서울에 남아 있는 옛스러운 기복신앙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간절히 빌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날이 푸근한 날을 골라 선바위를 찾아가보자. 

-편집자-

 

▲권율장군 집터에서 자랐다는 은행나무

월암공원을 지나면 한동안 주택가를 거쳐 사직터널 위를 지나게 된다. 터널 위로는 성곽이 복원돼 있다. 여기에서 바라보면 오밀조밀한 주택가 사이로 큰 가지들을 넓게 펼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다.

500년 수령에 보호수로 지정된 일명 ‘권율장군 은행나무’다. 권율장군 집터에 자란 은행나무라고 한다. 주택가 좁은 터에 큰 가지 몇 개를 잘라낸 상태이긴 하나 워낙 크고 높이 자란 나무라 수형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딜쿠샤 전경

이 은행나무의 바로 옆에는 낡은 2층짜리 붉은 벽돌 집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딜쿠샤’라는 건물이다. 건물 이름은 힌두어로 ‘이상향’ ‘꿈의 궁전’ 등의 뜻이 담겼다고 한다. 알버트 테일러라는 미국인이 지은 건물이다. 그는 AP통신 기자 신분으로 1919년에 3.1운동을 취재하고 제암리 학살사건의 진실을 적은 쪽지를 아기 강보에 숨겨서 해외로 반출했다. 그렇게 그는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의 진실을 세계에 최초로 알린 인물이다.

일본은 그런 그를 한국에서 영구 추방했다. 1948년에 생을 마감한 후 유언에 따라 유해가 되어 한국에 돌아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딜쿠샤 안으로 들어가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걷다 보면 어두침침해서 좀 무섭기도 하다. 게다가 유리창이 둘러쳐진 계단은 한발 한발 온 신경을 집중해서 살포시 걷게 만드는 묘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최근까지 각 방을 쪼개서 여러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후에는 무연고의 사람들이 흘러들어 오면서 재산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언제 퇴거될지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딜쿠샤 건물은 지금은 너무나 낡아서 지붕에 얹었던 동판들도 다 사라져버리고 비도 새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도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맞춰 복원을 거쳐 개방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3.1운동과 관련된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라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곳이다.

▲성곽길의 모습

딜쿠샤를 지나면 바로 위에 인왕산 성곽으로 가는 길이 있다. 산행을 안 한다면 딜쿠샤 바로 위 인왕상 성곽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된다.

오른쪽 길로 내려가면 곧 사직단이 나오고 좀 더 가면 경복궁역이다. 경복궁역 바로 앞은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라는 막걸리 골목이다. 저녁에 술 한잔하는 사람들이나 여행 온 사람들 산행 후 뒤풀이하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비는 곳이다.

첫날 코스의 끝인 창의문까지 가고는 싶으나 인왕산을 넘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인왕스카이웨이를 따라 조성된 인왕산 자락길로 걸어서 가도 좋다. 인왕산 자락길로 가게 된다면 중간 쯤에 겸재 정선의 그림을 따라 복원했다고 하는 수성동 계곡으로 내려가 인왕산 전경을 감상하며 잠시 쉬어주자. 좀 더 가다보면 만나는 구름다리도 흔들흔들 건너면서 가볍게 산책을 즐기면 된다.

덤으로 코스 끄트머리에 윤동주 언덕에 다다를 쯤, 아래로 잠깐 내려가면 청운문학도서관이 있다. 여기도 둘러보고 쉬어가면 좋을 것 같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한옥으로 지어진 도서관이다. 인왕산을 배경으로 멋들어진 한옥이 자리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답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서촌기행을 쓰게 된다면 그 때 자세히 얘기하고자 한다.

다시 돌아와 인왕산 산행의 시작점에 서면 잠시 끊어졌던 성곽길이 시작된다. 여기서는 성곽의 위로 갈 수도 있고 밑으로 갈 수도 있다. 자신이 가고 싶은 길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가끔 나오는 암문을 통해 길을 바꿔 잡아도 된다. 성곽 윗길에서는 조망이 넓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성곽 아랫길은 성곽을 올려다보면서 자연지형에 따라 성곽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게다가 성돌의 시대별 변화도 살펴볼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아랫길을 추천하는 편이다.

특히 인왕산 성곽길의 시작점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 그러니까 성곽을 끊는 도로와 작은 초소를 만나는 지점까지 완만하게 이어지는 성곽길은 조선시대의 성돌이 잘 남아있는 편이다. 구불구불하게 난 좁은 길을 따라 걷는 게 무척이나 운치가 있다.

초소 앞에서 남산 쪽을 바라보면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지면서 성곽이 옆으로 길게 누워 있다. 중간에는 큰 바위 위에 올라앉은 성곽과, 그 위로 남산타워가 솟아오른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성곽길의 유명한 포토존 중 하나로 여겨진다.

초소에서부터는 본격적인 산행의 시작이다. 성곽 아래쪽 길은 사라지고 윗길만 있어서 선택권이 없다. 갑자기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길이 아득할 정도다. 여기서부터의 성곽길은 몇 해 전에 복원을 마친 터라 깔끔하게 잘 닦여 있다.

▲선바위의 모습

옛스러움을 전혀 느낄 수 없어서 아쉽지만, 조금 오르다 보면 성곽 너머로 오밀조밀 모여 있는 산사들과 뾰족하게 솟아있는 바위 하나를 볼 수 있다. 바로 신령하기로 유명한 선바위다. 두 바위의 모습이 마치 장삼을 걸치고 나란히 참선하는 스님의 모습이라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로 부른단다.

바위 전체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인왕산 전체가 화강암 지형인데 독특하게 나타나는 타포니 현상(풍화작용으로 바위외 움푹 구멍이 생기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시대 때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폐하고 일본의 신사를 세우면서, 쫒겨난 국사당이 바로 선바위 아래로 옮겨왔다. 이후로 선바위와 무속신앙이 결합되면서 더욱 효험 있는 기도처로 유명해졌다.

이 바위는 그 이전부터 유명했는데 바로 한양도성 건축과 관련된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대결 일화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도성을 쌓으면서 그 경계를 정하고자 할 때 무학대사는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놓고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도전은 바위를 도성 밖에 두려 했다고 한다.

둘은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으면 불교가 흥하고, 성 밖에 놓이면 유교가 흥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설전을 벌였다. 이성계는 둘의 의견대립으로 결정을 못하다가 어느 날 밤 사이 눈이 내렸는데 신기하게도 선바위 안쪽은 눈이 모두 녹아 있는데 바깥쪽으로는 그대로 쌓여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이성계는 눈이 녹은 경계를 따라 성곽을 쌓도록 했고 이로 인해 선바위는 성곽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학대사는 이를 보고 “이제 중들은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겠구나”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선바위가 스님의 형상이라 조선이 불교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펼 것인지 결정하게 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일화가 아닐까 싶다.

전해지는 얘기와는 상관없이 선바위는 소원을 빌면 반드시 그 소원을 이뤄준다고 한다. 혹시라도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으면 가보시라. 다만 힘이 충분히 남아 있어서 길을 크게 돌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편 이성계가 눈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의 자리를 결정했다는 것에서 한양도성을 설성(雪城)이라 부르게 됐다. 여기서 설성이란 말이 훗날 ‘설울’이 되었고, 이를 다시 서울이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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