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어설픈 우월감이 낳은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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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투고] 어설픈 우월감이 낳은 비극
  • 편집국
  • 승인 2004.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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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TV에서 방영된 PD수첩을 보고 밤새 밀려드는 감정이입과 자책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TV 속에는 두 명의 위생사가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이고, 대학원 학생이고, 치과위생사이고 그리고 20대의 두 여성이었다. 그 두 친구는 한 남자의 하룻밤 노리개가 되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두 여성을, 그 교수는 두 학생을, 그 치과의사는 두 위생사를 결코 자신과 같은 동급의 인간으로 생각하지도, 대하지도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권력관계가 있었고 우리 사회에서 그 정도의 권력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사건이었다.

나는 여자치과의사다. 학생의 신분을 벗어난 지도 몇 년 되었다. 여자 신입생들에게 “너희들 때문에 남학생이 떨어졌어”라 말하는 교수님들과도 더 이상 볼일이 없다. 지금은 여자라는 신분을 잊을 만큼 대접받고 살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의 시각도 기득권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변했던 모양이다.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도 두 피해여성에게보다 치과의사인 가해자에게 먼저 시선과 감정이 쏠렸으니까.

어쩌면 남성보다 더 남성의 시각에 익숙해져 있다. 의사 대 위생사로서도, 고용인 대 피고용인으로서도 내 위치는 늘 우월했기에 내 주위의 위생사들은 같은 여성이지만 같은 인간으로, 진정한 동료로 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동료치과의사에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나 마음도 가진 적이 있다. 고백하건데 어설픈 우월감을 가졌다.

그래서 누구의 말처럼 어젯밤 TV에서 본 서교수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치는걸 느꼈고, 10분의 1이건 몇 분의 1이건 그 사건에서 나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과하고 싶다. 내 어설픈 우월감의 연장선상에 서교수 사건이 있고 이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과계 동료로서 연대하여 돕고싶다. 같은 여성으로서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며 아픔을 나누고 싶다. 단지 사고를 당한 것뿐이라 말해주고 싶다. 친구처럼 언니처럼 의지가 되고싶다.

내 짧은 생각으로는 그 친구들이 대학원을 제대로 졸업하는 것도, 그 이후 치과계와 관련된 삶을 살아가는 것도 결코 쉬울 것 같지 않다. 미래는 커녕 당장 이 사건을 마무리하기까지 견뎌내야 할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겠지? 성폭력은 피해자가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니까. 인터뷰 하는 동료들조차 “찍힐까봐” 두려워하는 풍토에서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두 친구가 치과계나 어디서나 당당하게 살아나갈 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도 함께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감히 믿기에, 오늘밤에는 자책감과는 다른걸 밤새 고민하려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얼마전 <성폭력방지를 위한 치과의사 모임>에서 피해여성 돕기 후원계좌(국민은행 079801-04-000401, 원선아)를 개설했다.

신순희(푸른치과, 경희 치대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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