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기억을 전해주는 ‘두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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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기억을 전해주는 ‘두 위령비’
  • 이상미 기자
  • 승인 2017.03.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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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평연 18기 진료단, 하미마을과 퐁니마을의 위령비를 찾다
▲하미마을 위령비

베트남 꽝남성 탕빈현에 있는 하미마을과 퐁니마을. 학살의 참상이 지나간 두 마을에는 한국군에게 희생된 베트남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하나씩 세워졌다. 

두 위령비는 설립과정에 한국인들이 참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위령비를 두고 드러난 한국 측의 역사적 인식은 ‘사죄’와 ‘부정’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퐁니마을 위령비가 한국과 베트남이 이룬 화합의 결과라면, 하미마을 위령비는 학살의 기억을 부정한 한국군 참전자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미마을 위령비는 한국군 참전자들의 항의로 비문 전체가 연꽃 그림으로 가려지는 수난을 겪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12일 베트남평화의료연대 18기 진료단은 하미마을과 퐁니마을의 위령비를 찾았다. 위령비를 통해 진료단원들은 같은 과오에 전혀 다른 자세로 임했던 한국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꽃에 가려진 학살의 기억...이제 과오를 직면할 때

▲한국 참전군인의 반대로 하미마을 위령비에 적힌 글은 연꽃 그림으로 가려져 있다.

“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 26일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양민을 학살했다. 하미마을 30가구 중 135명이 죽었다. (중략) 무너진 집에서는 늙은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신음하며 죽어갔고 아이들은 두려워 공포에 질렸다. 도망친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고, 아기는 죽은 어머니에게 기어가 젖을 먹었다. 더 끔찍한 것은 군인들이 탱크로 무덤을 파헤친 것이다.”

하미마을 위령비에는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당시 135명의 마을 주민이 하루만에 학살됐으며 시체는 탱크로 짓이겨졌다. 

“과거의 전장이었던 이곳에 이제 고통은 줄어들고 있고, 한국인들은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그리하여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 우리는 인도적인 인의로 고향의 발전과 협력을 열어갈 것이다. 이 모래사장과 포플러 나무들이 양민학살을 기억할 것이다.”

하미마을 위령비에는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는 한국인들과 평화를 모색하자는 내용도 담겨 있다. 하지만 위령비 제작에 관여한 ‘사단법인 월남참전전우 복지회’는 한국군의 양민학살이 언급됐다는 이유로 위령비 설립을 반대했다. 

▲원래 한국과 베트남 국기가 펄럭이고 있던 곳. 지금은 깃발이 사라진 채 방치돼 있다. 

하지만 이들도 하미마을 준공식 당일에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의 권현우 공정여행 팀장은 진료단에게 하미마을 위령비 준공식 당시의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군 참전자들이 하미마을에 한국과 베트남 간 화해의 비를 세우자고 제안했죠. 그들은 제대로 된 사과도 안 했는데 화해의 비를 세우겠다고 이 하미마을에 온 거예요. 당시 준공식에 온 참전자들은 전적지 투어를 왔다는 생각에 해병대나 미군 옷을 입고 왔죠. 준공식 날, 첫 삽을 뜨는 소리에 베트남 사람들이 참아왔던 울분을 토하며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어요. 참전군인들의 입이 다물어졌죠. 그때 침묵했던 이들 중 한 명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어요. “미안하다”고.”

권현우 팀장은 진료단원들에게 베트남 사람들이 양민학살에 대한 한국의 사죄를 촉구한다고 했다. “과거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자”고 알려진 베트남 측의 메시지가 번역 과정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잘못 이해됐다는 것. 그는 ‘잊다’로 번역된 베트남 단어의 본래 의미가 ‘잠시 묻어둔다’는 것일 뿐, 망각을 뜻하는 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지난 하미마을 학살 45주년 위령제 때, 마을 인민위원회가 위령제에 온 한국 측에 연꽃 그림에 가려지기 전 옛 비문의 사진을 선물했어요.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하라는 의미죠.”

사죄와 화해의 상징이 된 위령비

▲위령비 앞에서 진료단에게 퐁니마을 학살을 설명하는 권현우 팀장

하미마을 위령비를 지나, 평연 18기 진료단은 1968년 음력 1월 14일 학살이 자행됐던 퐁니마을의 위령비를 찾았다. 

당시 퐁니마을은 남베트남 소속 마을로 한국군의 대치 지역이 아니었다. 마을 자체가 ‘안전마을’로 지정돼 미군과 자매결연까지 맺었던 상황. 그러던 중 마을을 지나가던 한국 청룡여단 1중대가 급작스러운 베트콩의 공격을 받는다. 

이에 마을 사람들을 베트콩이라고 판단한 1중대는 퐁니마을을 공격목표로 잡고 집단학살을 벌였다. 순식간에 35가구가 살해됐다.  

이 같은 참상은 한국군의 학살 이후 마을을 찾아온 미군 병사에 의해 사진으로 담겼다. 30년 뒤 미군이 찍은 사진이 한국 기자를 통해 공개되면서 학살의 참상과 한국군의 과오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 같은 소식에 한국이 베트남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민간 차원에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지난 2010년, 베트남 평화운동 단체인 ‘나와우리’는 ‘한-베 평화캠프’를 기획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지역을 방문했다. 

평화캠프 참가자들은 퐁니마을을 찾아가 한국군의 학살을 사죄하는 의미로 위령비 건립을 추진했다. 건립 과정에서 부족한 예산은 퐁니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결과 퐁니마을 위령비는 한국과 베트남 양국 간 화합의 상징물로 우뚝 섰다.  

“하미마을 위령비와 퐁니마을 위령비에서 베트남에 사죄하는 방식이 비교가 되죠. 이는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맙 권현우 팀장은 평연 18기 진료단에게 학살의 과오 앞에 한국인들이 보여야 할 태도에 대해 말했다. 

“평화주의적인 태도는 뭘까요? 평화주의는 역사적 과오 앞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가해자 입장에 놓고 생각할 줄 알아야죠. 정부가 사과하지 않는다면 시민사회단체 등 민간차원에서라도 진상규명에 대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퐁니마을 위령비 앞에서 고개를 숙인 평연 18기 진료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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