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69·75·7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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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69·75·79·22’
  • 홍수연
  • 승인 2017.06.20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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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홍수연 논설위원

 

눈 밝은 사람은 알아차릴 것이다. 연세대 교정에 세운 이한열 열사 기념비에 새겨진 숫자이다. 한열은 1987년 6.9 집회에서 최루탄에 피격당했고 7.5 운명하였으며 7.9 시청 앞에서 110만명의 민주시민들이 장례를 치루었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우리 또래 이야기를 좀 더 하자. 1985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 5400여명 중 1987년까지 경찰에 연행되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 1523명이라고 한다. 입학동기 4명중 1명이 잡혀갔다 나온 적이 있다니, 이 숫자만으로도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아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6월보다 더 뜨거웠던 7,8월 노동자 대투쟁까지 헤아리면 그 시대의 결기가 얼마나 도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벌써 30년이 지났다.

반면 우리는 초라하기도 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의 결과는 노태우의 당선이었고, 이어진 88 올림픽 이후 우리사회는 ‘돈’이 움직이는 사회가 됐다. 정치적 야합은 3당합당이라는 보수 우파정치로 귀결됐고, 최고의 가치가 된 자본은 계획 없이 흥청거리다가 1997년 구제금융을 불러왔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갖추게 됐다는 87년 체제는 바로 이런 수많은 층위에서의 분리의 연속이었고, 함께 가난했지만 더불어 나누던 경제적 삶은 어느새 살아남기 위해 이전투구하며 불로소득을 갈망하는 불합리한 전쟁터로 변해 있었다. 

회사들은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마음껏 누렸고, 파업하고 시위하면 이를 응징하는 ‘정의’들이 난무했다. 거기에 대고 87년의 투사였던 소위 ‘중간층’은 무엇을 했을까? 실체라고는 찾을 수조차 없는 ‘낙수효과’에 목매고 살았을까? 

정치적 개인과 경제적 계급은 한 몸이되 다른 존재가 됐다. 87년에 빛나던 투사들 역시 먹고 사느라 ‘정의’에 둔감해졌고, 내가 먼저 서야 타인의 존재도 보인다는 자기최면에 빠져들었다. 사교육을 통해 없는 사다리를 찾아 헤매느라 나와 우리를 분리함으로써 ‘같이 사는 일’의 위대한 평범함을 잊었다.

그런데 촛불이 왔다. 슬금슬금 도둑처럼 와서 온 겨울을 태우더니, 봄을 건너 뜨거워진 여름으로 ‘민주주의’가 돌아왔다. 87년의 투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버린 우리아이들이, 30년전 한열이보다 어린 학생들이 광화문에서 손잡고 포효한 결과이다. ‘정치적 자유’가 다시 온 것이다. 돌아온 자유를 환영하면서 함께 와야 할 ‘정의’를 찾아보자.

무엇보다 우리가 놓아버리고 살던 ‘경제적 정의’가 어느 만큼 있는지 살펴보자. 함께 촛불을 든 우리 아이들이 알바비는 제대로 받고 있는지, 내가 낸 세금이 재벌에게 흘러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아직도 갤*폰을 쓰고 있는지 다시 보자. 임대료는 적정한지, 심지어 임대인이 되고픈 열망에 휩싸여있지는 않은지도 돌아보자.

5월부터 우리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최저시급을 1만원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여러 제약요인이 있다. 경력직원들의 반발도 있었고 경기는 항상 나쁘다. 더 힘들어져서 지속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보다는 ‘함께 시작’ 한다. 87년 6월, 약속한 시위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도 동을 안 떠서 ‘동~은?’이라고 나지막히 말했는데 온 사방에서 ‘~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라고 노래하는 바람에 졸지에 시위주동자인 것처럼 되어버린 어느 어린 날의 기억처럼. 가 보는 거다.

이 글은 본지의 논조와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 (편집자)

 

 (재)화강문화재단 서울이웃린치과 원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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