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두목지杜牧之와 호계삼소虎溪三笑
상태바
미친 두목지杜牧之와 호계삼소虎溪三笑
  • 송학선
  • 승인 2017.09.08 13: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콩밝 송학선의 한시산책 50] 입중흥동入中興洞 중흥동으로 들어가며 /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명종4~1587선조20)
(ⓒ송학선)

입중흥동入中興洞 중흥동으로 들어가며 /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명종4~1587선조20)
심정경구적心靜境俱寂 마음이 고요하니 지경도 아울러 적막한데
석위천여제石危天與齊 돌은 위태롭게 하늘과 가지런하다
운횡고수외雲橫高峀外 구름은 높은 봉우리 너머 비껴있고
일락대강서日落大江西 해는 큰 강 서쪽으로 진다
만학엽사수萬壑葉謝樹 온 골짜기 잎들은 나무를 떠나고
일공인도계一笻人渡溪 지팡이 하나로 사람은 개울을 건넌다
암간장요초巖間長瑤草 바위 사이 요초가 자라니
막시원공서莫是遠公棲 이곳이 바로 원공의 거처가 아니던가

원공遠公은 ‘호계삼소虎溪三笑 즉 호계虎溪에서 세 사람이 웃다’라는 옛 이야기에 나오는 혜원화상慧遠和尙을 말합니다. 이야기인즉슨 도연명陶淵明(365~427)과 육수정陸修靜(406~477)이 어느 날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혜원화상慧遠和尙을 방문했습니다. 세 사람은 다향茶香을 맡으며 담론談論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혜원화상은 시간이 되어 돌아가는 두 사람을 절문 밖까지 전송하고자 나섰습니다. 세 사람은 헤어지면서도 담론에 심취해 어느 사이 호계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 때 혜원화상이 “어이쿠, 내 죽는 날까지 결코 호계 밖을 안 나가겠다고 했는데 오늘 그만 다리를 건너버렸네” 하자 모두들 박장대소했습니다.

‘호계虎溪’는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경내 절문 밖의 조그만 개울입니다. 손님들이 개울을 건너갈 때마다 호랑이가 울어 ‘호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혜원화상은 오직 수행만 하겠다는 결의 때문에 찾아오는 손님을 모두 절문까지만 나와 배웅했었습니다.

이 고사는 성스러운 세계에만 머물고자 하는 혜원화상의 낙공落空을 깨는 부주열반不住涅槃을 비유적으로 보여준 유명한 화두話頭로 이야기합니다. 정토종淨土宗 개산조開山祖이기도 한 동진東晋 고승 혜원화상이 도연명 육수정과 함께 법열法悅 속을 노닐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계의 다리를 건넌 것은 바로 깨달음의 사회 환원, 성속일여聖俗一如를 뜻한다고 하지요.

임제林悌(1549명종4~1587선조20)는 조선의 문신입니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痴, 겸재謙齋 등 입니다.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남인南人의 당수黨首인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스무 살에 속리산에 있던 대곡선생大谷先生 성운成運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576년(선조9)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했으며 다음해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합니다. 그가 문과에 급제한 뒤 제주목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뵈러 제주도로 가면서 꾸렸던 보따리 속에는 세 가지 물건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어사화御史花 두 송이와 거문고 한 장張 그리고 칼 한 자루였다고 합니다.

그 후 예조정랑禮曹正郞까지 지냈으나, 선비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고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백호가 평소에 가까이 사귀던 벗들은 허균許筠의 형인 허봉許篈(1551~1588)과 삼당시인三唐詩人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9∼1583)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1537∼1582)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8) 그리고 사명당四溟堂을 비롯한 스님들이었다고 합니다. 백호는 그 잘났다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803~852)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았기에 ‘미친 두목지杜牧之’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39세로 요절하면서 그의 가족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칭제稱帝치 못한 자가 없는데 홀로 우리나라만이 종고불능終古不能하여 칭제稱帝치 못하였다. 이러한 누방陋邦에 났다가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하고, 죽은 후에 곡哭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일화는 그의 기개를 잘 말해줍니다.

평안도 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에 들려 시조를 짓고 술을 따르고 제사 지냈다는 이유로 부임지에 당도하기도 전에 파직되어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풍류남아가 바로 백호 임제입니다.

저서로 《수성지愁城誌》 《화사花史》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을 남겼으며, 시조 3수와 《백호집白湖集》이 있습니다.

아마 중흥동中興洞이 충청도 면천군沔川郡에 있나 봅니다. 이 시를 쓴 게 임제가 속리산에 들어가 대곡선생께 공부하고 내려왔다더니 그 때인가 봅니다.

더불어 황진이 무덤에서 읊었다는 시조도 같이 읽지요.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紅顔은 어듸 두고 白骨만 무쳣는이
盞자바 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作家<林悌> 出典<珍本靑丘永言 107>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