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원폭의 공포에 웅크린 도시
상태바
나가사키, 원폭의 공포에 웅크린 도시
  • 김신애
  • 승인 2017.09.13 16: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고]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구·경북지부 김신애 문화국장

드디어 다녀왔다. 대학생 캠프에 동반해서.  '일어 가능한 사람이 우선권을 가지죠,' 라는 인솔자 선생님의 이야기로 시작된 이번 나가사키 행은 오사카 연수 때부터 가져온 숙제 같은 의구심의 해결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얻는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가 받은 벌 같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은연중에 가져 온 일본 원폭 역사에 대한 생각은 피폭자 간담회 시간을 가지며 깨져버렸다.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폭으로 인한 상처는 나가사키에 뿌리를 박고 묵묵히 살아 온 주민들의 혈관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미국과 일본 정부의 부단한 노력과 약자들의 아픔은 하루라도 빨리 묻어버리고 잊어버리려 하는 사람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출근길에 쓰러져 유명을 달리 하는 피폭 2세, 3세들의 현실에 나가사키는 여전히 원폭의 공포를 안고 웅크린 도시였다.

한국 전쟁의 종전을 위해 한반도에 핵폭탄 투하를 고려했던 미국. 혈맹이니 어쩌니 하며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던 무리들의 뇌를 거치지 않은 소음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베트남에서, 광주에서 자행되었던 우리 군의 만행에 대한 반성과 사죄가 제대로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피폭 지도를 가리키며 피폭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오오츠카씨

우리와 함께 한 간담회가 당일 세 번째 순서였다고 하시던 피폭자 오오츠카씨는 간담회 장소에 미리 와서 준비하고 계셨다. 작은 체구와 온화한 얼굴로 발표 자료를 찬찬히 정리하고 계신 분을 보고 있자니 그 날의 일을 떠올리게 하는 건 너무 잔인한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간단한 인사와 오늘의 자리를 마련해 주심에 대한 감사 이후 오오츠카씨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여느 여름날과 다를 바 없었던 8월 볕이 쨍하던 아침, 점심은 집에 와서 먹어야 해, 하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친구들과 학교로 놀러 가던 시점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매미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고, 친구는 외친다.

"어~이~ 매미가 네 쪽으로 날아간다" 순간, 세상이 어두워졌다고 했다. 강한 바람에 몸이 높이 날아가고. 정신을 차린 꼬마가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친구도, 나무도, 학교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녹아내리고, 타오르고, 재는 날아갔다.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피폭 이후 차례로 죽어간 가족들 중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손아래 동생이 죽었던 때라 하셨다. 열선 이후 가스 흡기로 인한 비강과 호흡기의 괴사로 피폭 후 얼마 되지 않아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간 동생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눈꺼풀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여러분은 저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먼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나는 왜 여러분이 내 형제 같은 느낌이 들까요…" 하며 온화하게 웃으시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 떨어졌다.

친구들과 매미 잡고 놀던 열 살짜리 소년에게서 동생과 어머니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앗아가고 70년의 세월 동안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오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피폭직후 폐허가 된 나가사키 시 모습
피폭 후 폐허가 된 오오우라 천주당과 나가사키를 재현해 놓은 자료관의 모습

그것은 잊혀지기 마련인 지나간 순간이 아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폭탄은 체르노빌에도 후쿠시마에도 차례차례 떨어졌으며 지금도 울진에, 경주에, 울산에, 부산에, 영광에, 투하 될 예정이다. 모습을 바꿔 가며 존재하는 탐욕의 역사와 함께.

 

김신애 (가정의학과 의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대구·경북지부 문화국장)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