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석의 붉은 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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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의 붉은 철쭉
  • 권기탁
  • 승인 2017.09.25 18: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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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지리산 가족등반 후기 ③

본지는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전북지부(회장 이준용) 권기탁 회원이 지난 7월 30일부터 31일까지 진행한 지리산 가족등반 일대기를 6회에 걸쳐 게재한다.

짧지만 굵은 지리산 등반 경험과 가족간의 소중한 이야기를 주 1회씩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소싯적 지리산에 몇 번 올랐었다. 분명 현재 아들들 수준의 개멋(?)이 그때도 작용했으리라.

그렇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새롭게 알고 나서는 그 산이 다르게 보였다. 특히 90년 대학 입학 후 얼마 안지나 읽었던 ‘녹슬은 해방구’는 큰 충격을 주었다.

세석은 250명이 한꺼번에 묵을 수 있는 가장 큰 대피소이다. 저녁시간이 되니 여기저기서 굽고, 끓이고 시끌덤벙하다. 앉는 공간이 부족해 서서 먹고, 바닥에 앉아서도 먹는다. 시골장터가 따로 없다. 그렇지만 다들 고된 산행 후 식사여서 그런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우리는…, 딱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음식을 가지고 갔다. 마치 처음 캠핑 갔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장비도, 음식도 너무 단출해 내놓기가 뻘쭘하다. 그나마 다행으로, 어느 친절한 분을 만나 데크 한쪽에 앉는 행운을 얻었다.

우리 옆에 앉은 일행은 4명(남1,여3)이었는데, 멋진 60대들로 보였다. 본인 표현으로 ‘산꾼’이라 했는데, 아침에 성삼재에서 출발해 정확히 22.6km를 걸어왔단다. 우와~ 대단하신 분들. 게다가 여러 가지 짐을 잔뜩 넣은 배낭은 무척 크고 무거워 보였다.

그들은 여러 음식을 꺼내 먹다가 우리를 힐끗힐끗 봤다. 도저히 불쌍해서 안 되겠다 싶었던지 “이거 좀 먹어봐요” 여러 음식을 건넸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산속에서 진정 귀인을 만났다.
염치를 따질 사이도 없이 “고맙습니다” 절로 소리가 나왔다.
이윽고… “술 한 모금 하실 줄 알면 받으세요” 이런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술 쪽을 비굴하게 본 적은 결단코 없다.ㅋㅋ) 분명한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술 좀 싸가지고 올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치레를 잘 못한다는 지청구를 듣는 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녔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넙죽 절을 했다. 바로 뭔 술인지도 모른 상태에서 원샷을 했는데.. 기가 막혔다. 양주였다.

답례로 드릴 것은 입 밖에 없다.

“선생님은 지리산을 잘 아시나 봐요?” 가볍게 여쭤봤다.

젊었을 때 뭔가 한가락 하셨을 것 같은 그 분의 입에서 무거운 얘기가 흘러 나왔다. “제가 잘난 척 좀 할게요. 여기가 세석평전입니다. (주위를 가리키며) 여기 보이는 것들이 다 철쭉입니다. 이곳 철쭉이 무척 붉어요. 반야봉 철쭉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이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이게 다 빨치산의 피가 묻어서 그런 겁니다. 이곳에서 정말 많이 죽었어요. (잠시 말을 멈추시다가) 역사를 알면 이곳이 달리 보입니다.”

나도 다시금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 분과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와 여건이 아니었다.

다음에 철쭉이 흐드러지게 필 때 세석을 찾아오리라.

다음에 계속…

흐드러지게 핀 세석의 철쭉 (ⓒ권기탁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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