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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구원 이야기[특별기고] 한국산업구강보건원 김광수 전 이사장
김광수 | 승인 2017.11.08 18:48

본지는 구강부분에 발생할 수 있는 직업병을 연구하고, 근로자의 구강건강 향상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사)한국산업구강보건원(이하 산구원)의 창립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김진범 전 이사장에 이어 김광수 전 이사장의 특별 기고문을 싣는다.

참고로 산구원 창립 20주년 기념식 및 학술대회는 오는 11일 오후 3시부터 용산 센트레빌 아스테리움 C동 2층 상상캔버스에서 진행된다.

- 편집자

1.
일단 한국산업구강보건원(이하 산구원) 이야기를 하자면 ‘산업구강보건협의회(이하 산구협)’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 즉, 비록 산구원은 산구협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는 해도 그 성격이 크게 변했다는 점을 우선 강조해야겠다. 그래서 산구협에 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해야 한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사실을 다르게 기억할 수도 있겠다. 산구협이 산구원이 된 것은 1997년 그러니까. 20년 전이고, 산구협 활동이 시작된 것은 아마도 1991년쯤 되는 듯하다.

아직도 내게는 그 당시 자료들이 제법 있지만 책장 속에 쌓여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 그걸 꺼내 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걸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그걸 건치 사무실에 맡겨놓는다고 해도 볼 사람도 없지만, 회관이 이사 몇 번 하다보면 결국 없어질 것이다. 내가 죽는 날까지 그것들을 버리지 않는다면 처자식들이 버리게 될 것이다.

1996년 산업구강보건협의회 제15차 정기학술집담회 (ⓒ 김광수)

아시다시피 산업 구강보건은 건치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강조되었던 사업이다. 당시 조직 이름은 산업보건분과였다. 그것은 노동자의 건강 문제와 특히 직업병과 산업재해 등의 문제를 다루자는 것이었다. 그 뜻은 숭고하였고, 그 목표는 원대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초창기에 산업보건 분과의 중심인물은 전동균 선생이었다. 물론 공해문제는 반반분과, 즉 반핵 반공해 분과에서 송학선 선생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반반분과가 중심이 되어서 IPPNW, 즉 ‘국제 핵전쟁을 반대하는 의사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단체로 필리핀으로 갔던 일도 있었다.

당시는 노동자 혁명을 한다는 생각으로 위장 취업을 하던 시기였고, 다니던 대학을 포기하고 노동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 철창을 마다 않고 죽음도 각오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우리들에게는 적어도 그런 생각들이 나태해지려고 하는 우리를 채찍질하고,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새벽에 돌아가는 우리를 이끌어갔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운동에 동참하고, 운동의 주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노동자들을 동지라고 생각했기에 그 운동을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산업보건 운동을 했다.

2.
몇 년이 경과하면서 우리는 운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만 했다. ‘전태일이 간절히 바라는 대학생 친구’인 노동자들의 벗이 되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구강보건 분야에서 무언가 우리의 할 일을 찾아야 했다. 당시는 이미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나 노건연(노동자건강연대)이 활발히 활동하고, 노동운동도 노동상담소나 혹은 위장취업자들에 의해서 상당히 분업화‧전문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이 할 수 없는 우리의 고유 분야로서  ‘구강(口腔)’ 분야에 주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문송면 군이 수은 중독에 의해서 사망한 것이 1988년인데, 대부분의 보건의료단체들은 그때에 생겨났다. 건약, 인의협, 청한(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노건연 등이 그것이다. 문송면 군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났고, 건치를 비롯한 보건의료단체들이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이 구강보건의 영역은 아니었다.(비록 그것이 수은에 의한 재해였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얼마 후, ‘원진 레이온 사태’가 났다. 인조견사인 레이온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유해가스가 대량 나오지만 회사는 작업장 환경수칙을 무시했고, 기계가 노후화되어서 사용할 수 없는 장비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는 회사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죽어나갔다.

이것이 산업재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건치 회원들은 노동자들의 치주병 검사를 하였고, 그 결과로 질병과 이황화탄소(CS2)중독과의 인과관계가 확증되었다. 당시 여러 회원들이 그 과정에 참여했는데, 고소영 선생, 김진숙 선생 등이다. 왜 여선생님들 이름만 생각날까? 아, 한영철 선생도 물론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 일은 물론 정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한편, 그것도 역시 우리가 의과(醫科)를 돕는 일이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의과에 종속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우리의 전문적인 분야를 찾아야 했다. 아마도 그것이 ‘산구협’가 탄생하게 된 계기가 될지 모르겠다.

3.
산구협의 초기에는 한영철 선생님과 조영수 선생이 정말 열심히 하셨다. 고소영 선생, 김진숙 선생은 물론, 김혜영‧이상윤‧고대호 선생도 있었다. 당시는 정기적으로 학술발표회를 하고, 논문도 쓰고, 산구협 학술지도 열심히 냈다. 우리나라에서의 산업구강보건활동의 역사를 발굴하고 정리해 낸 것도 그때이다.

그 일은 유독 조영수 선생이 열심히 했다. 물론, 그러저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서 한영철 선생님과 조영수 선생이 대한치과의사협회(이하 치협) 치무이사도 하였다. 두 분이 치협 이사를 한 것은 본인들의 역량과 또한 동시에 치협에서 건치를 동반자로 생각하고, 구강보건 분야를 대부분 건치에 위탁한 정도로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어느 것이 원인이 되었건 시기적으로는 그때가 건치활동과 산구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때일 것이다. 당시 산구협의 활동은 ‘산구협 학술지’에 소상히 나와 있다. 그 자료들은 현재 정세환 교수님 중심으로 취합되어 있다.

산업구강보건협의회지 (ⓒ 김광수)

내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조영수 선생이 치협 치무이사를 마치고 나서 다음 집행부에서 일할 치무이사를 뽑는데, 내게 그 자리를 맡겼다. 그러나 나는 치무이사 자리를 거절했는데, 그건 순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이유에서였다. 내가 피곤하고 힘들고 돈이 많이 들것 같고 별로 이득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거친 바닥에서 굴러먹는 일’에 짜증을 내는 나의 소심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는 어쨌든 “나는 힘들더라도 그 일을 했어야 했다”는 반성을 많이 했다. 그 때가 내가 미국을 가기 전인지 후인지 확실치 않다. 내가 미국을 간 것은 1996년 2월부터 1997년 6월까지였다. 아마 귀국하자마자였던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모두 함께 일했던 당시를 그리워한다. 당시 산구협의 주역이었던 한영철‧조영수 선생, 그리고 김진숙 선생이나 고소영 선생도 그러할 것이다.

4.
산구원은 1997년에 창립되었다. 사실은 산구협이 이름만 바꾼 것인데, 이름이 바뀌고, 법인으로 등록을 하고, 김종배 교수님을 이사장으로 모시면서 그 아이덴티티도 변질되었기에 유감이다. 김종배 교수님은 학자이시고, 주장이 강하신 분이다. 그리고 정부와 함께 구강보건사업을 해 오신 분이다. 그 결과로 산구협 당시의 재야 운동의 성격이 없어졌다. 그 후 문혁수 교수님이 이사장을 맡으셔서 노력하셨지만, 그러한 학술단체의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그 후, 이사장을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내가 이사장을 맡았었지만, 그러나 결국 세월만 까먹은 셈이었다. 나는 예방치과계에서 힘을 발휘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건치에서 그 사업을 다시 부활시킬만한 계제가 되지도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미력이나마 명맥을 유지하려고 했고, 직업병 보다는 (나는 직업성 구강병으로서 산부식증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노동자의 구강건강 차원에서 ‘산업장 정기 구강검진’에 관심을 쏟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발전된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동안은 이흥수 교수가 총무이사로써 정말로 눈물겨운 노력을 많이 하였다. 무능한 이사장으로서 이흥수 교수에게 많은 짐을 떠맡기고 일을 덜어주거나 격려해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미안하고,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크다.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서 최충호 교수에게 화를 냈던 것도 두고두고 미안하다.

5.
그 후 김진범 교수가 이사장을 맡게 된 것은 산구원으로서는 정말 행운이었다. 김진범 교수는 아무도 하지 않겠다던 일을 스스로 떠맡았는데, 그로서 산구원의 부활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산구협 산구원과 20년 이상 역사를 같이 했던 이흥수 교수가 이사장이 되어 더욱 활발한 운동이 기대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흥수 교수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이흥수 교수에게 갚을 빚이 있을 뿐이다.

김진범 교수와 나는 대학 동기이다. 대학 1학년 때부터 같이 다녔다. 물론 서울대 예방치과도 동문이다. 학위는 내가 좀 늦게 받았지만. 물론 함께 김종배 교수님 제자이다. 나는 건치 동료들과 함께 수돗물 불소화 운동을 했는데, 김진범 교수가 늘 도와주었다. 물론 수불은 김 교수 자신의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건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개업을 하고 치위생과 교수로서 수불사업을 소홀히 할 때에도 그는 꾸준히 수불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정말 훌륭한 친구다. 나는 내년에 은퇴하지만 김진범 교수는 3년 후에 은퇴한다. 김진범 교수가 있기에 그래도 그나마 우리나라 구강보건이 유지되고 있다.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하고, 그가 나보다 3년이라도 더 교수노릇 한다는 것도 상당히 다행이다.

1994년 7월 25일 구강보건 실무통계 세미나 (ⓒ 김광수)

6.
산구원의 사업을 간단히 말하겠다.

① 산부식증은 노동자 대중의 병이 아니다. 사업으로서의 보편성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직업성 구강병 전문병원’을 지정받아 검진료 수입을 올려 산구원 재정을 확보할 궁리를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 가능성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 생각이 잘못일 수도 있다.

② 그렇다면 여전히 남은 일은 ‘산업장 집단 구강검진’인데, 현재는 국가 검진 체계가 발전하고, 또 검진을 행하는 치과의사들도 많아져서, 건치가 역점사업으로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검진의 질이 문제인데, 형식적 검진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검진 현장에 가 보면 “치과는 그래도 제대로 한다”는 반응을 볼 수가 있다. 그러니 의과에 비해서 매우 적은 검진료를 받으면서 검진의사의 충성심만 자꾸 요구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도 있다.

③ 이에 예방이나 검진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의 치료체계의 붕괴에 대한 우려가 훨씬 크다. 즉, 의료상업화, 의료의 자본시장으로의 편입이 당면문제라는 생각이다. 의료상업화를 호시탐탐 노리던 이명박근혜 체제가 끝났기에 우선 의료상업화 문제는 한숨 돌렸지만, 그 잔당들은 여전히 사회 각층에 포진해 있고, 거대자본의 마수는 언제라도 건강한 진료보장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예방과 공중보건 사업도 중요하지만. 악마와 같은 자본의 마수로부터 노동자들의 건강과 의료를 지켜내는 일이 우선 화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하고, 건치와 함께 산업구강보건 사업이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기고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광수 (한국산업구강보건원 전 이사장, 한양여자대학교 치위생과 교수)

김광수  kks@hywom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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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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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의동 2017-11-09 09:15:45

    산구원의 역사와 예전 활동들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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