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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거사를 끌어낸 인의협[인의협 30주년 특별기고] 강릉아산병원 안과 조수근 교수
조수근 | 승인 2017.11.09 17:35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의 물결을 따라 '올바른 민중사회 건설'이란 목표 아래 의료인들은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 시민단체 건설에 나섰다.

그 해 겨울 더 평등한 사회에서 시민의 건강권이 보편적으로 지켜지길 바라는 사회를 꿈꾸는 의사 187명이 여전도 회관에 모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를 창립했다.

이어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이하 건치),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이하 청한), 노동건강연대가 연달아 창립되면서,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이란 이름으로 함께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연대활동을 펼치고 있다.

인의협은 '세상이 아프면 의사도 아파야 한다'는 창립 정신에 따라 아픈 사람을 보듬는 의사로서 사회적 책임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숙인·쪽방촌 사람들·철탑 위의 농성자·이주노동자·낙도오지 주민·북한 어린이 등 소외계층에 대한 진료는 물론,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료영리화 정책, 안전규제 완화 등 비인도적 정책에 앞장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본지는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는 인의협의 역사와 활동을 돌아보고 기념하기 위해 기획연재를 시작. 그 첫번째로 인의협 이보라 사무국장 인터뷰, 김미정 반핵팀장의 기고글을 게재 했다.

세 번째로는 인의협 조수근 회원의 기고글을 싣는다. 이어 인의협 이현석·박태훈 회원의 기고글이 순차적으로 게재 될 예정이다.

- 편집자


다음 날 아침, 물에 푹 젖은 운동화에서는 매운 최루액 냄새가 났다. 운동화를 벗어 놓은 현관에는 고춧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매캐한 공기가 떠돌아 다녔다. 욕실에서 운동화를 빨고 있는데 거실에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 백남기 어르신의 중태 소식이 뉴스로 나왔다. 최루액 때문인지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3년 전 12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던 건 이런 날이 올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2012년 12월 20일 새벽,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온 몸은 열로 들끓었고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2007년은 그렇다 쳐도 어떻게 5년을 겪고도 다시 최악의 수를 둘 수 있을까? 대선 토론 방송 직후 서울 경찰청에서 짜 맞춘 듯이 국정원 댓글은 없었다는 중간 수사 보도를 냈던 장면, 불법으로 빼낸 NLL 관련 대화록을 왜곡해가며 선동하던 집권당 정치인의 모습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앞으로 또 5년 얼마나 시민들의 삶과 나라와 역사가 망가질 것인가?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백남기 농민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그 끝도 모를 공포와 분노에 온 몸이 아려왔다. 먼동이 터오는데도 한 숨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슬슬 당시에 근무하고 있던 병원의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전공의들을 데리고 집담회를 해야 하고 그런 다음 종일 수술 스케줄이 이어져 있었다. 그대로 한 숨도 안자고 나가서 집담회를 하면 수술 시간에 제대로 집중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위의 교수님들에게 꾸지람을 듣더라도 집담회를 빠지고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것이 수술 받을 환자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이 들어 도로 자리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정권을 교체하지 못한 2013년엔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연구실에서 집에서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뉴스만 보고 분개하는 것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공중보건의사 시절 뭔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보겠다고 가입만 하곤 아무 관심도 두지 않고 있던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이하 인의협)의 문을 다시 두드렸다. 회비를 꼬박꼬박 내고 신입회원(?) 모임에도 나가 가입인사를 하면서 회원 선생님들과 얼굴도 익히고 성명서에 이름도 올리고 시간되는 모임에 가끔 참석도 하면서 열성적이지는 않았지만 회원으로서 의무는 다하려고 노력하는 정도의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좀 더 깊숙이 (사실 고공 농성장이나 무료진료소 나가시는 선생님들, 집행부 일을 보시는 선생님들이나 현장에 나가 몸으로 뛰시는 선생님들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지만) 인의협에 발을 담그게 된 계기가 된 것은 2015년 11월 1차 민중 총궐기 집회였다.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는데 인의협 진료 지원단으로 참가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강릉의 병원과 서울을 오가면서 인의협 행사에 거의 참여를 못해 미안해하던 터라 흔쾌히 참여하게 되었다. 페퍼포그와 곤봉으로 무장한 전투경찰에 맞서 죽창을 아스팔트에 두드리며 맞섰던 신입생 시절의 쌀 개방 반대 시위와 1994년 경찰 기동대 60개 중대 6천5백 명을 서울대 캠퍼스에 진입시켜 범민족대회를 잔인하게 진압한 현장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기억이 있었다.

경찰이 故백남기 농민 사인을 놓고 논란이 일자 시신 탈취 시도를 했고, 이에 맞서 시민들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지키는 모습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났고 보수정권이 연달아 집권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쳐온 터라 시위에 얼마나 부상자가 발생하겠는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광화문으로 나갔다. 그런데 집회현장에선 여기저기 부상자가 속출했고 물대포에 안구 전방 출혈이 발생한 집회 참가자까지 진료하게 되었다. 경찰 차벽은 요지부동이었고 차벽에 연결된 밧줄을 당기는 참가자들의 몸짓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 앰뷸런스의 긴급한 소리가 들리고 집회 참가자 한 명이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의식 불명인 상태로 서울대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는 말이 들려왔다. 다음날 나는 눈물로 범벅진 얼굴로 운동화를 빨면서 백남기 어르신의 소식을 들었다.

인의협에서는 물대포 도입을 검토하던 영국이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물대포의 심각한 유해성을 발견하고 물대포 도입을 포기했던 관련 보고서들에 대한 번역 및 검토에 들어갔고 나도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고자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경찰의 강경진압과 물대포의 위험성에 대한 시민단체 연합의 기자회견에 당시 집회 참가자 및 안과 전문의 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기자회견은 일부 신문에 단신으로만 처리 되고 텔레비전 뉴스에는 아무런 보도도 나오지 않았다. 도저히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한겨레신문에 물대포의 위해성과 백남기 어르신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뉴스타파에 당시 집회 부상자들을 진료한 경험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백남기 어르신에 대한 사망진단서가 병사로 나왔을 때에는 의대 선후배 동기들을 설득해 성명서에 연명하도록 했다. 광화문 촛불집회에 의료지원단으로 때로는 일반 시민으로 참석하면서 설마설마 우리가 할 수 있을까 하던 일들이 현실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

故백남기 농민 추모 대회

안방거사 (집안에서만 사회 현실에 비분강개하고 아무런 행동은 하지 않던 공중보건의사 시절의 나를 아내는 안방거사라고 비꼬았었다)로 만 살아오던 나는 인의협을 통해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싸워나가고 그리고 함께 이기고 함께 나누는 법을 배웠다. 집행부를 구성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여러 선생님들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방법을 깨닫고 스스로 살아온 길을 되돌아 보고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나는 아직 안방거사에서 갓 마당으로 나온 풋내기일 뿐이다. 그래서 원고 청탁을 받고 이런 글을 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했다. 성명서에 이름이나 올리는 것 외에 딱히 인의협에 도움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집행부에서 부탁하는 일이라면 뭐라도 할 수 있는 것은 해보자는 생각에 주저리주저리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이 아직도 마당으로 나오지 않은 수많은 안방거사들에게 작은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수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강릉아산병원 안과 교수)

 

조수근  gcnews@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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