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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를 이기는 건 ‘인정’하는 것입니다[인터뷰]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 3학년 이승현 씨
안은선 기자 | 승인 2017.11.10 19:45

‘혐오’란 단어가 유행처럼 쓰이고 있는 요즘이다. 사회변화와 맞물려 ‘여성혐오’부터 시작해, 특정 계층에 ‘충(벌레)’을 붙여 싸잡아서 그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한편,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혐오와 인정 그 어딘가에서 분투하고 있다.

혐오란 것은, 낯선 것, 나와 다른 것에서 출발한다. 낯선 것은 알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들은 신성화되거나 천박한 것이 된다. 그것이 설령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상화되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가까이 할 수 없고, 하고 싶지 않은 정서가 깔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인 '혐오'의 반대말은 ‘사랑’이 아니다. ‘인정’이다.

다름을 인정하기는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2008년부터 지금까지 적게는 일주일에 2~3번, 많게는 5번을 노숙인의 재활을 돕는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에서 상담 봉사를 해 오고 있는 이가 있다. 경희대학교 치과대학‧치의학전문대학원(이하 경희대 치전원) 3학년 이승현 학생을 본지가 지난 7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지난 2008년 서강대학교 전자과 2학년 때 ‘신학적 인간학’이란 교양과목을 패스하기 위해 우연히 당시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로 노숙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갔다 발목이 잡혔다. 처음엔 몇 번이고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는 가슴 아픔과 의문이 이승현 학생의 발을 잡아끌었다고 했다. 그는 단순 동정심으로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며, 상담 봉사를 통해 다름을 인정 하고, 인정받는 것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날 인터뷰에는 경희대 치전원 예방사회치과학교실 류재인 교수가 동석해 질의를 이어갔다.

- 편집자

교양과목 수료위해 우연히 찾은 노숙인 상담센터,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아픔이 계속 그곳으로…

- 류재인 : 언제부터 노숙인 상담을 시작한 건가요? 어떻게?

이승현(이하 이) : ‘신학적 인간학’이란 교양과목을 처음 수강했을 때, 경영대생들이랑 팀플(팀 플레이)를 하니까, 좀 약삭빠르게 그들이 좋은 건 다 가져가 버려서 어정쩡한 것 밖에 할 수 없었어요. 결과는 C였고.

생각해보면 교양이니까 그냥 버려도(?)되는 건데, 정작 전공과목 중엔 D받은 것도 있거든요. 근데 그 때는 철학이고, 인간에 대한 과목인데 이걸로 C를 받다니. 뭔가 분해서? 재수강을 하게 됐어요.

그 과목 담당은 신부님들이 하셨는데, 조현철 신부님이라고 저랑 같은 과 나오고 지도교수님까지 같은 선배님이었어요. 그 분이 많이 도와주시려고 했는데도, 재수강인데도 저한테 돌아온 건 경영대생들이 좋은 걸 다 가져간 뒤 남은 것뿐이었어요.

그게 임영인 신부님이 쓰신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란 책이었어요. 그걸 읽고 요약하고 감동도 많이 받고, 노숙인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어요. 그런데 사실 에피소드들이 너무 교과서적인? 편견속의 노숙인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그래서 요약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조 신부님께 상담했더니 ‘노숙인을 인터뷰 하는 게 어때?’하셔서 당시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로 갔어요.

*참고로 임영인 신부는 1996년 IMF로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실직 노숙인’이란 이름으로 노숙인이 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방조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컨테이너 박스를 서울역에 불법으로(?)가져다 놓고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를 열고, 노숙인들의 재활을 도왔다. 현재는 서울시 외주사업으로 편입돼 ‘다시서기 상담보호센터(이하 센터)’로 개칭, 운영되고 있다.

이승현 학생

- 시작은 그렇지만, 지금까지 계속하게 된 계기 같은 게 있나요?

이 : 당시엔 ‘노숙인’ 하면. 혹은 노숙인을 돕는다고 하면 복지쪽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센터 상황도 열악하고, 복지사들 처우도 좋지 않고. 어쨌든 센터에 연락을 하고 찾아가니 ‘아니 이런 훌륭한 젊은이가!’라며 기대 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단기로는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와서 밥이나 퍼”라고 하셨어요.

- 좀 쌀쌀맞은데. 괜히 싫을 수도 있잖아요?

이 : 제가 좀 고집도 있고, 어차피 1학기 정도 휴학할 생각도 있어서 하겠다고 했어요.

- 휴학해선 뭘 하려고 했어요?

이 : 장사를 해서 돈을 좀 벌어보고 싶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해서, 돈을 번 경험이 있었거든요.

- 돈 많이 벌었어요? 그건 다 어떻게 썼나요?

이 : 돈은 뭐 꽤 벌었죠. 대부분은 유흥비(?)로 쓰고, 제 학원비 제가 내고…. 이렇게 말하면 되게 어려운 집인가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유복하게, 사랑 많이 받으면서 자랐어요.

어쨌든, 손 벌리지 않고 제가 가능한 선에선 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지금도 손 벌리는 게 잘 안돼요.

-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노숙인 상담은 어떻게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계속 지금까지 거의 10년째 하고 있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 : 낮에는 휴대폰 케이스를 팔고, 저녁엔 노숙인 상담을 할 수 있다고 계속 상담사들을 설득하면서 인터뷰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센터 쪽에서도 젊은 사람이 관심 갖는데 그냥 돌려보낼 순 없으니까 상담가 분이랑 만나서 저녁도 먹고 차도 마시고 얘기했어요.

나름 특별한(?)대접을 받으니 가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며칠 있다보니 완전히 발목이 잡혀서…

- 그래서 지금까지?

이 : 처음엔 도망가려는 노력을 많이 했어요. 처음 3~4개월은 거의 인사밖에 못했어요. 상담은 커녕 인사해도 받아주지도 않으니…. 그래도 상담원분들이 격려해주고, 어떻게든 노숙인들과 라포가 형성된 분들이 일부러 절 데리고 나가서 인사 시켜주시기도 했는데도 잘 안됐어요.

- 그러면 보통 아무리 특별 대접을 받았다 해도 그만두기 마련인데….

이 : 제가 좀 고집도 있고, 사실 그때까지 살면서 실패란 걸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인터넷 쇼핑몰도 나름 성공했고, 주도적으로 살았고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거든요. 유복하게 자랐고, 공부할만한 환경도 됐고, 대학도 잘 갔잖아요?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에 거만했어요. 처음에도 제가 1,2주 만 하면 이 사람들 다 시설로 보낼 수 있다. 뭐 그런 생각까지 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아니었잖아요? 인사 안받아주고, 무시당하고. 병으로도 맞기도 했고, 엄동설한에 뺨을 맞기도 했고. 욕에, 부모 욕에, 조상 욕에…. 그러면서도 뭔가 이게 큰 도전처럼 느껴지는 거에요. 당시엔 또 내가 뭔 갈 못해낸다는 게 이해도 안됐고.

-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이 : 사실 동정심을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그런 사람도 아니고.

상담 시작하면서 3~4개월 지날 무렵에 인사를 해 주시는 분이 생겼어요. 그 때가 겨울이었는데, 하루는 그 분 안색이 안 좋아서 안부를 묻고 그리고 나서 퇴근했거든요. 그런데 그 날 밤에 돌아가신 거예요.

- 충격이었겠네요.

이 : 사실 제가 지금까지 상담을 나가는 가장 큰 이유가 그 분 때문이에요. 저에게 의미가 큰 사람이죠.

사실 따지고 보면 저랑 관계가 없는 사람인데, 왜 내가 이것 때문에 이래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가슴이 아픈 근원도 모르겠고. 그 일 있고나서 ‘절대 안가야지’ 했는데 상담사 분들이 계속 연락해 주면서, 조금 위로도 되고, 그러면서 계속 나가게 됐고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나가고 있네요.

독립적, 성취지향적인 사람이지만,
노숙인 상담은 그걸 뛰어 넘은 일
그것이 치전원으로까지 이어졌다…

- 낮에 인터넷 쇼핑몰은 어떻게 운영했나요?

이 : 당시에 막 스마트폰이 확산되던 때라서 노키아 뮤직익스프레스라는 모델이 한국에 상륙하면서 엄청 팔렸어요. 그 노키아폰 특징이 지금은 커버를 씌우는 거지만, 그건 자기가 원하는 색깔로 완전히 기본 케이스 자체를 교체할 수 있는 거였어요.

26가지 색깔을 팔았어요. 중국 공장에서 떼다가 팔았죠. 굉장히 잘 팔렸어요. 그래서 휴학기간이 1년으로 늘어나긴 했지만….

그러다가 아이폰4가 출시되면서 범퍼케이스가 막 유행을 타더라구요. 그래서 거래하던 공장에 물어보니 ‘된다’고 해서 물건 값 다 보내고 했는데, 막상 물건이 왔는데 전부 불량이었어요. 그 공장이 만들 능력이 안되는데 된다고 한 거였죠.

- 이런, 사기를 당했네요.

이 : 네, 직접 심천에 가서 보고 왔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죠. 오랫동안 거래한 곳이기도 했고. 이걸로 여유 사업자금 몇 천만 원을 다 날렸죠.

- 가슴이 아팠겠네요.

이 : 그런데 당시엔 별 생각 없었어요. 사실 돈을 벌려고 했다기 보다는 ‘이게 먹히네?’ 하는 희열이 좋았어요. 내가 내놓은 물건을 이렇게 찾다니 하면서. 마케팅은 기법을 약간씩 변형하는 것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거든요. 그 때 나오는 희열이 좋았어요.

게다가 뭐 돈을 많이 쓰는 편도 아니라서 심적 타격은 없었어요.

- 그렇게 사업하면서 상담 봉사를 하는 건 쉽지 않았을텐데…. 게다가 한창 놀고 싶은 나이잖아요?

이 : 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 PC방은 꼭 가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3번 가면 나머지 4일은 놀 수 있으니까요. 부모님께선 집에 잘 안 붙어 있는다고 서운해 하신 건 있지만.

- 그러면 어떻게 해서 치전원에 오게 된 건가요?

이 : 계속 상담센터는 나가면서 4학년 무렵 석사를 하고, 삼성메디슨으로 병역특례를 가고 싶었어요. 초음파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러던 중에 메디슨쪽 TO가 없어진단 소문이 돌아서 학사로 병역특례를 가게 됐어요. CCTV를 만드는 업체였어요.

아무튼 그곳에서 일하면서, 생산직으로 살 건 아니지만 회사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성취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눈에 보이는 성취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런데 출퇴근에 2시간씩 쓰고 하루에 최소 8시간, 12시간을 회사와 회사일에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깝더라구요.

그러면서 생각해 봤어요.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유일하게 성취가 없어도 가게 되는 곳이 노숙인 상담센터더라구요. 복지분야가 잘 맞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복지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가, 2014년에 서울역 13번 출구에 무료진료소가 있는데, 열린치과봉사회에서 나와 치과가 생겼어요. 아무튼 그 시점이 의사들이 현장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어요.

어느날 진료소 내 정신건강팀에서 나온 정신과 의사분과 같이 노숙인들에게 인사하면서 검진같은 걸 하는 데 동행했는데, 그 전까지 제가 상담사로 가서 그 분들에게 ‘이건 배가 나온 게 아니라 복수가 찬거니까 입원하셔야 된다’고 설득에 설득을 해도 듣지 않으시던 분들이, 정신과 의사분이 입원해야 한다고 한마디 하니까 바로 알겠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놀라기도 하고. 사회복지 공부를 할까 고민하던 중에 의전원을 생각하게 됐어요.

사실 학점도 좋지 않고, MEET나 DEET는 선택받은 사람만 가는 거라 기대도 안했어요. 의전원밖에 몰랐는데, 주변에서 경희대 치전원이란 곳을 알려줘서 그쪽으로 지원하게 됐죠.

아무튼 경희대 치전원에 수시전형을 넣기로 하고, 병역특례로 일하는 산업체 공장에서 몰래몰래 무릎에 책 펴놓고, 인강(인터넷 강의)은 귀에 꼽고 들었어요.

그런데 서류 내려고 보니까 막상 낼 수 있는 게 없더라구요. 쇼핑몰 매출 증명서를 낼 수도 없고. 봉사시간 같은 건 한 장으로 축약해서 내는데, 당시 제 봉사시간이 3천 시간이 넘어서, 담당자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우선 가져와 보라고 하더라구요. 봉사 증명서, 내용 같은 거 쭉 뽑아봤는데 스테이플러가 안들어 갈 정도로 두꺼웠어요. 아무튼 제출하고, 그게 잘 된 건지 어쩐지는 몰라도 합격이 됐어요.

류재인 교수

- 와. 대단하네요. 그러면 확실히 상담할 때도 달라졌겠네요?

이 : 네. 물론 치전원생이라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전부터 서울역 아이돌이에요 저.

아무튼, 그 이후로 노숙인 분들이 제 말을 잘 들어주시죠. 가끔 상담원 분들이 SOS를 보내시면 가서 돕기도 하구요. 돌팔이 같지만, 일회용 미러 들고 다니면서 입 좀 보자고 하고, 이대로 방치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겁주면서 병원으로 보내요. 안 그러면 안 가실 분들이라….

막 그렇게 전문지식을 남용하면서, 원활하게 상담을 하게 됐어요.

- 노숙인들의 구강상태는 어떤가요?

이 :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대부분이에요. 그래서 진료소에서도 덴처밖에 안하기도 하구요.

인상 깊었던 분이 한분 계신데, 그 분은 공무원 하다가 이후엔 공기업에서도 일하다가 보증 선 게 잘못돼서, 쫓기면서 노숙인이 된 분이에요.

그런데 그 분이 일이 잘못되기 직전에 서울에 있는 모 치과에서 임플란트 20개를 어번트먼트까지만 한 상태였어요. 예약 메모 같은 거 보여주시면서 말씀 하시더라구요. 파이널만 하면 되는데 이미 값도 지불이 다 됐고.

저희 입장에서는 치과 수소문해서 찾고, 전화 걸어서 사정 얘기하고 진료를 진행시키면 된다고 봤어요.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 분이 과거 공무원이었고, 남루한 행색을 보이는 걸 용납하지 못하는 분이었어요. 그래서 치과에 전화까지 다 해놓고, 몇 날을 설득한 끝에 모시고 가려 했는데, 결국엔 저희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가 버리셨어요.

소외계층에 친구되는 ‘예수회’ 전통에 감동
‘정의와 공의’의 가치관 갖고 한 길 걸을 것

- 안타깝네요. 노숙인 센터는 어떻게 운영되나요?

이 : 박원순 시장때 정책적 변화가 있어서 센터도 서울시에 새로 지어주고, 서울시 외주 사업으로 보조 받아서 운영되고 있어요. 그래서 현재는 자원봉사자는 없고 다 유급 상담가들이에요. 무급은 저밖에 없어요.

서울시 정책방향에 맞추다 보니까 입소 위주로 사업이 진행되는 경향이 생겼어요.

게다가 지금 일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저보다 경력도 적고(!), 현장상담 안하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전 무급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봐 온 게 있어서, 최대한 기준을 노숙인들에게 두려고 해요.

외부, 외부인의 기준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저씨들이 시설 입소 안하려는 게 시설이 낙후돼서 좁아서 등등 이유도 있지만, 사실 30년을 밖에서 살았는데 건물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랑 같이 사는 게 불편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기준을 노숙인들에게 맞추되 응급한 일은 없게 하자. 밥이라고 굶지 않게 하자는 게 목표에요.

- 그렇군요.

이 : 이제는 의료인의 길을 걷는 입장에서, 전에는 인사하면서 돌때는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갔어요. 달달하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조금이라도 영양을 생각해서 생강차나, 비타민 음료, 떡 같은 것을 가지고 가려고 해요.

또 다른 바람이 있다면, 사회가 변화했으면 해요. 사회 변화는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 특별히 소속된 단체가 그런 곳이 있나요?

이 : 아뇨. 가입한 곳은 없어요. 그래도 촛불집회 같은 행사나 이런 데는 개별적으로 참여해요. 아까 말씀드린 조현철 신부님과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분이 하시는 운동이나 행사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이죠. 지금은 탈핵운동 하고 계신데, 삼보일배 같은 어려운 일은 조 신부님께 맡겨드리고 전 응원만….

- 무급인데다 경력도 오래됐고, 그렇다고 딱 어느 단체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고. 조금은 독특한 캐릭터 같네요.

이 : 그렇죠. 그러다 보니 센터에 지침이 있긴 하지만 잘 따르는 편은 아니에요. 어차피 차나, 보온병 같은 건 제가 준비해 가는 거라서요. 그리고 혼자 하는 게 익숙하기도 하구요.

그게 처음 막 센터에 발을 들였을 때, 상담원 한 명이 나를 신경쓰면 일이 확 밀려버리는 걸 많이 봤거든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혼자서 하고, 신경 쓰이지 않게 하려는 게 습관이 됐어요. 그래서 가기 전에 전화만 하고 겹치지만 않게 조절하죠.

- 혼자서 하는 게 쉽진 않을 텐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뭔가요?

이 : 체득된 것이기도 한데. 종교적 이유가 커요.

- 종교가 뭔가요?

이 : 전에는 개신교 였고, 지금은 성공회 교회에 나가고 있어요.

아무튼, 제 기준에서 종교를 계속 가지고 있는 이유는 ‘정의와 공의’ 때문에요. 현장에 가는 이유는, 소외된 사람들이 집회를 하거나 할 때 나가서 응원하는 건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특히 조현철 신부님이 그런 곳에 많이 데려가 주셨어요. 용산 참사부터요. 강압적으로 와서 뭐 해, 하시는 게 아니라 ‘여기 오면 밥 사줄게’ 하셔서 또 가서 집회 참석하고 밥 먹고, 자연스럽게 나가게 됐어요.

종교인들 중에 특히 예수회 신부들이 현장에서 사목을 많이 하세요. 프란치스코 교황도 예수회 출신이라, 그분이 교황 되자마자 노숙인들 불러 식사했잖아요? 소외된 사람들 속으로 가는 게 예수회 전통이거든요. 전 이제 정말 멋있게 느껴졌어요.

“누군가는 계속 얘기해야만 한다”
노숙인의 상황 알리고 돕는 일에
예비 의료인으로서 목소리 낼 것

- 쉽지 않은 일인데. 이런 일을 하는 걸 친구들? 동기들도 많이 아나요?

이 : 학교 친구들은 다 알아요. 부러 숨기거나 하지 않거든요.

- 반응은 어때요?

이 : 100이면 100 다 대단하다고 해요. 그런데 그 반응은 사실 오래전부터 겪은거라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아요.

- 안은선 : 인터뷰 요청이 부담스럽진 않았나요?

이 : 가끔 작은 종교단에서 노숙인 지원을 하고 싶다고 얘기 좀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요. 그러면 전 거절하지 않아요. 노숙인에 대한 인식이랄지, 복지에 대해서 누군가는 많이 이야기를 해 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더군다나 치과의사라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아지니까 그런 이야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요. 저녁에 동기들이 술 먹자고 할 때도 서울역에 가야하니까 거절하기도 하고.

그래도 동기들이 자기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다름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다름을 알고 ‘인정’할 순 있다

-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죠?

이 : 네. 알아요. 노숙인에 대해 온정적이지 않은 사람도 있죠. 그 사람들이 인간을 혐오하는 게 아니라 우리사회의 미관을 위해서, 그런 사람을 없애야 한다는 모 씨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죠.

서울역서도 심심치않게 만나요. 노숙인들이 박스 같은 거 깔고 자니까, 자고 있는데 그 위에 소주 붓고 라이터로 불 지르려는 사람도 봤고. 소주에 불이 붙진 않죠. 저도 발견하면 그 때는 욕하고 소리지르면서 제재해요.

혐오 범죄는 정말 많이 봐요. 그냥 때리기도 하고, 술 먹고 노숙인들에게 화풀이 하는 사람. 1년에 몇 번씩 봐요. 처음엔 그런 걸 보면 정말 화가 나고, 이해가 안갔어요.

- 다른 생각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게 힘들죠.

이 : 이제는 그래서 그런 걸 굳이 이해하려고하진 않아요. 그래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그 존재자체는 인정해요. 인정조차 하지 않으면 너무 화가 나기 때문이에요.

사실 저도 처음엔 노숙인이란 존재가 이해가 안갔고, 그들을 이해하고 나니까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존재들이 보이고, 이제 그들을 이해는 못하지만 인정하게 됐어요.

이승현 학생

- 이런 경우엔 보통 주변 사람들이 내 생각을 지지해주고 동참해주길 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화가 나는 단계로 가는데.

이 : 저는 형제가 형 하나에요. 굉장히 친해요. 언젠가 형이랑 드라이브 하면서 나눈 대화가 아직도 생생해요.

그 때 형이 ‘나는 내 가족과 주변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밖에서 무슨 욕을 먹더라도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신부님(조현철)은 탈핵운동 하는데 형은 한수원 다니거든요. 거기에 이런 말까지 들으니 참.

아무튼 형 이야길 들으면서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의 간수의 일화가 겹쳐지더라구요. 그 때 제가 깨달은 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구나, 그게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형도 이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그 일 이후에 이해는 못하지만 존재는 인정하게 됐어요.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욕하거나 화를 내지 않게 된 사건이에요.

- 그러면 부모님께서는 이런 활동하는 걸 어떻게 보시나요?

이 : 사실 아버지도 아마 형과 비슷한 입장일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제가 품고 있는 가치를 전부 오픈하진 않았어요.

처음부터 노숙인 상담 간다고 말하지 않은 건 그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겠구나, 반대할 거라 생각해서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어요. 어머니께는 상담 다닌지 3년 만에, 아버지껜 5년 만에 말했어요.

어머니는 걱정하실까봐 그랬고, 아버지는 가치관이 달라서 시간이 좀 걸렸어요. 전략적으로 한다고 했는데.

- 말씀드린 이후로 변화는 있었나요?

이 : 처음에 아버지는 ‘그런 델 왜가냐?’했는데 이제는 간다고 하면 ‘다녀와라’ 하는 일상이 됐어요. 정말 큰 변화죠. 형도 전에는 비슷했다가 얼마 전엔 비타민 음료를 사서 서울역 센터에 왔더라구요.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면서.

또 지난번 송년회에 센터에서 ‘자원봉사상’을 준다고 해서, 그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도 했어요.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리고 동네친구들은 가치관이 비슷한 친구들이 많아서 많이 응원을 해 줘요. 몇년전 크리스마스 땐 같이 와서 노숙인들에게 물건을 나눠주기도 했어요. 지금도 만나면 그 때 얘기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면 전 ‘말만하지 말고 좀 와’ 하기도 하죠.

노숙인의 구강건강 통계 내는 게 목표
치과예방의 관점에서 현장 이해하고 싶다

- 좀 이야기를 바꿔서, 앞으로 계획이나 목표가 있다면? 특히 예비치과의사로서.

이 : 원래 사회복지사를 하려다가 의료계로 발을 들여놓게 됐지만, 사이버대학으로라도 사회복지사 2급은 따려고 해요.

학교에서도 그렇고, 임상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큰데, 임상 치과의사도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노숙인 구강건강상태에 대한 통계를 내보고 싶어요.

노숙인 건강상태에 관심이 많으니까, 4분위에 속한 사람, 취약계층, 의료급여 1종, 2종에 속한 사람들을 어떻게 병원으로 불러들이고, 병원에서 어떤 진료와 관리를 통해 건강이 좋아질 수 있을까 비용평가도 하고 그 분야에 대해서 연구해 보고 싶어요.

- 노숙인 구강건강 상태를 조사한 자료가 없어서 그 자체로 유의미 할 것 같네요. 보통 보건쪽에서는 노숙인 되는 과정과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한 연구 정도에요.

이 : 그래서 4분위에 대한 통계라던지 유병율 조사가 하고 싶고, 방법을 배우고 싶어서 작년 여름방학에는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박상민 교수님이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어요. 거기서 국민건강영양조사 등 빅데이터를 가지고 논문을 작성해 보기도 했어요.

저의 방향성은 일정해요. 향후 제가 개원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컨설턴트가 될 수도 있고 장사를 할 수도 있지만, 노숙인 구강건강 관련한 데이터를 가능한 선에서 기록해 놓고 싶어요. 전 상담원이기도 하니까 노숙인들 구강검진 하는 건 어렵지 않거든요. 아무튼 치과예방적 측면에서 통계 프로그램을 배워 연구나 조사를 하고 싶어요.

- 안은선 : 잘 되길 바래요. 응원할께요. 오랜시간 동안 인터뷰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 네 감사합니다.

안은선 기자  gleam0604@gunch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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